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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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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learfix] == 개요 == Windenbrück Railway Strike 빈덴브루크 철도 대파업은 1916년 심각한 경제 불황기에 루이나의 노동 정책을 형성한 두 개의 상호 연관된 파업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1916년 봄 빈덴브루크에 있는 [[하트웰 궤도차량 주식회사]](Hartwell Railcar Company, HRC) 공장에 대한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uina Railway Workers' Federation, RRWF)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이 실패하자 RRWF는 HRC 객차를 운반하는 모든 열차에 대한 전국적인 보이콧을 선언했다. 1916년 4월 17일부터 6월 2일까지 지속된 이 전국적 철도 보이콧은 루이나 노동법의 전환점이 되었다. 보이콧은 RRWF와 HRC, 주요 철도회사들, 기성 노동조합들, 그리고 [[조지 에스턴]] 총리가 이끄는 [[루이나]] 정부 모두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 파업과 보이콧으로 인해 루이나 전역의 화물 및 여객 교통이 상당 부분 마비되었다. 갈등은 4월 17일 [[빈덴브루크]]에서 시작되었다. HRC 공장 직원 약 4,000명이 최근의 임금 삭감에 반발해 [[살쾡이파업]]에 돌입한 것이었다. HRC 차량을 제작하는 공장 노동자 대부분은 빈덴브루크 외곽에 조성된 [[기업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기업도시는 창업주이자 소유주인 [[찰스 R. 하트웰]]이 모범적인 공동체로 직접 설계한 곳이었다. 공장 노동자이자 재봉사 노조 RRWF 지부장이었던 [[애나 콜필드]]는 RRWF 대의원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동료들에게 파업을 촉구했다. 1914년 경기침체로 경제 전반이 약화되자 철도회사들은 HRC의 신형 객차 구매를 중단했다. HRC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잔류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다. 파업의 원인으로는 기업도시 내 민주주의의 부재, 회사의 경직된 온정주의적 통제, 과도한 수도·가스 요금, 그리고 노동자들의 주택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회사 방침 등이 꼽혔다. 당시 노동자들은 아직 자체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1913년 [[몽고메리 K. 번즈]]가 창설한 RRWF는 비숙련 철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조직이었다. 번즈는 RRWF 조직원들을 빈덴브루크로 파견해 불만을 품은 공장 노동자들을 대거 가입시켰다. HRC가 RRWF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협상도 거부하자, RRWF는 공장을 상대로 파업을 선언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번즈는 파업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HRC 차량의 철도 운행 자체를 중단시키기로 결정했다. 다만 차장 및 객차 승무원 같은 열차 탑승 직종 노동자들은 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번즈와 RRWF는 HRC 객차를 탑재한 모든 열차에 대한 대규모 보이콧을 선언했다. 보이콧은 루이나 전역 대부분의 철도 노선에 영향을 미쳤으며, 절정기에는 약 19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루이나 노동총동맹]](Ruina Labour Federation, RLF)은 RRWF가 자신들의 조합원을 빼앗으려 한다는 이유로 보이콧에 반대했다. 명망 높은 [[루이나 기관사 형제단]]과 [[화부 조합]]도 보이콧에 반대했으며, 번즈가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던 화부 조합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는 이에 맞서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빈덴브루크에서만 폭동으로 11명이 사망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추가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재산 피해는 수천만 [[루이나 달러]]를 초과했다. 루이나 정부는 번즈를 비롯한 보이콧 지도자들을 상대로 우편 열차 운행 방해 행위를 금지하는 법원 명령을 받아냈다. 파업 참가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조지 에스턴]] 총리는 군경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여러 도시에서 폭력 사태가 잇따랐고, 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번즈는 법원 명령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으며, RRWF는 해산되었다. == 배경 == 낮은 임금, 비싼 임대료, 그리고 유토피아적 노동자 정착촌이라는 이상의 실패는 이미 오래전부터 HRC 노동자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트웰 기업도시]]와 같은 기업도시는 노동자들이 멀리 이동할 필요 없이 모든 생활을 좁은 구역 안에서 해결하도록 설계되었다. 회사가 운영하는 상점과 주택에 의존하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경쟁을 소멸시켰고, 그 자리를 착취와 독점, 높은 물가가 채웠다. 이러한 상황은 1914년 경기침체로 더욱 악화되었다. [[찰스 R. 하트웰]]은 매출 감소를 이유로 임금을 20~30% 삭감했다. 그러나 임대료를 내리거나 회사 상점의 물가를 조정하지 않았으며, 생활비 보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직원들은 소유주인 하트웰에게 직접 항의했지만, 하트웰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항의에 나선 노동자들을 해고하기까지 했다. 1916년 4월 17일, 나머지 직원들이 일제히 작업을 멈추면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파업은 결국 총리가 루이나 군경을 파견하면서 끝이 났다. == 보이콧 == 공장 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몽고메리 K. 번즈]]가 이끄는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에 가입했고, RRWF는 HRC 객차가 포함된 열차 운행을 거부하는 보이콧을 통해 파업을 지원했다. 파업 당시 HRC 노동자의 약 35%가 RRWF 조합원이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철도회사들로 하여금 HRC에 타협을 압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번즈는 1916년 4월 17일 보이콧을 공식 선언했다. 나흘 만에 수십 개 철도회사 소속 12만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HRC 객차 취급을 거부하며 파업에 합류했다. 철도회사들은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를 통해 대응을 조율했다. 이들은 파업 대체 노동자, 이른바 [[파업 파괴자]]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파업 참가자들의 적대감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많은 이민 노동자들이 파업 파괴자로 모집되어 피켓 라인을 넘었다. RRWF가 표출하는 배타성이 자신들을 다른 노동 시장에서도 배제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노조가 처한 곤경에 민족적 긴장까지 더하는 결과를 낳았다. 파업 직원 없이는 철도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빈덴브루크에서 보이콧의 타격은 가장 컸다. RRWF 조합원들이 "단결"을 내세워 철도망을 마비시키면서 HRC를 향한 시민들의 압력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 산하 철도회사들은 협상을 거부하고 법원의 파업 중단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기업 권력의 저력을 과시했다. 빈덴브루크에서는 파업 참가자와 대체 노동자 간의 충돌이 잦았고 종종 폭력 사태로 번졌으며, 결국 군경이 투입되어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언론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다. 언론은 대체로 산업계의 편에 서서 파업 참가자들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번 보이콧은 산업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커지는 동시에, 루이나 사회에 내재된 민족적·경제적 분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후 번즈의 체포는 루이나 정부가 노동자의 권리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빈덴브루크 철도 대파업을 루이나 노동운동사의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16년 4월 21일, 번즈는 빈덴브루크 인근 [[그레이스턴]]에서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평화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난 뒤 군중 일부가 격분해 인근 건물에 불을 지르고 기관차를 탈선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루이나 각지에서는 연대 파업 참가자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철도 선로를 막거나, 파업 파괴자들을 위협하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었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촉구하는 여론도 높아졌다. == 정부의 개입 == 파업 사태의 처리는 [[조지 에스턴]] 총리가 임명한 [[헨리 포그]] 내무장관이 맡았다. 루이나 내각의 대다수는 "공포 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빈덴브루크에 군경을 파견해야 한다는 포그의 제안을 지지했다. 포그는 철도 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내무장관 취임 이전에 복수의 철도회사로부터 거액의 착수금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포그는 반노조 성향의 법원 판사들로부터 RRWF 관계자들이 파업에 영향을 받는 철도 직원들에게 "업무 수행을 거부하거나 태만하도록 강요하거나 부추기는" 행위를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받아냈다. 담당 판사 중 한 명은 훗날 노동 분쟁이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개입에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금지명령이 발효되자 철도 운영자들은 파업을 예상하여 포그에게 자체 금지명령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번즈와 다른 RRWF 지도자들은 금지명령을 무시했다. 번즈는 각 지부에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열차를 움직이고 모두를 끌어내려면 금지명령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각지에 금지명령이 내려진 후 루이나 군경이 이를 집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번즈는 폭력이 파업의 진행을 저해하고 군사 개입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처음에는 파업 확대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를 딛고 번즈는 파업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그는 RRWF 조합원들에게 법원의 금지명령과 군경 모두를 무시하라고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한 사람과 넓은 마음만이 금권정치와 오만한 독점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군대, 금지명령, 어용 언론에 겁먹지 마십시오. 파업을 지속하고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파업이 끝나면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은 조합원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을 보호할 것입니다.'' >---- >[[몽고메리 K. 번즈]] 번즈는 루이나 전역 모든 노동조합원의 총파업을 원했지만, [[루이나 노동총동맹]](RLF) 의장을 비롯한 기성 노동조합들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루이나 경찰 고위 관계자는 정부에 "정규 병력보다 약한 전력으로는 우편 열차의 통행을 확보하거나 법원의 명령을 집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곧이어 군경 병력이 파견되어 빈덴브루크에 도착했다. 번즈는 처음에는 군경이 평화를 유지하며 파업과 보이콧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 믿고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군경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열차 운행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보이콧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군경은 RRWF가 도시별로 루이나 전역의 교통망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를 하나하나 저지했다. 수천 명의 경찰 병력과 육군 병력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조지 에스턴]] 총리가 지방 당국의 허가 없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군병력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턴 총리는 우편물 운송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실상 열차 운행 재개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그의 경제 노선에 부합하고 자본을 보호하는 데 훨씬 더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이는 우편물 배송 차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 측 법률 고문들은 보이콧이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고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군경의 투입과 그에 따른 유혈 사태는 오히려 더 큰 폭력 사태를 불러왔다. 파업 과정에서 다수의 참가자가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재산 피해는 수천만 [[루이나 달러]]를 초과했다. === 지역별 대응 === 파업은 루이나 전역 수백 개의 도시와 마을에 영향을 미쳤다.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기관사·화부·차장 등 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성 [[루이나 기관사 형제단|형제단]] 조합들은 이번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RRWF 조합원들은 파업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들은 대체로 비숙련 지상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일반 시민과 상공인들은 대체로 철도회사의 편을 들었고, 농민들은 RRWF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주요 철도 거점 도시인 [[포트메이슨]]에서는 지역 정교회 신부 [[A. W. 캐버나]]가 RRWF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설교에서 이번 보이콧을 과거 루이나의 독립 쟁취 과정에 빗대며, 지방 관리들과 [[조지 에스턴]] 총리가 "건국 선조들의 정신을 저버렸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침략적이고 억압적인 기업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지키는" 대신, 지도자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금권 귀족의 순종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포트메이슨은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며칠 뒤 인근의 소규모 철도 거점 마을 [[록크로프트]]에 군병력이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격분한 파업 참가자들이 군용 열차를 에워싸는 사태가 벌어졌다. 간신히 유혈 충돌을 모면한 군병력은 해당 노선을 강제로 개통했다. 파업이 끝난 후 철도회사들은 파업에 가담했던 직원들을 전원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하버스턴]]에서는 보이콧이 노동운동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대도시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파업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파업 참가자들이 임금 삭감에 대한 오랜 불만을 토로하며 철도회사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파업 참가자들은 폭력과 태업도 서슴지 않았고, 철도회사들은 이를 내전이나 다름없다고 규정한 반면, RRWF는 비숙련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맞받아쳤다. === 체포와 재판 === [[몽고메리 K. 번즈]]는 우편물 운송 방해 공모 및 법원이 철도 운행 방해 중단과 보이콧 해산을 명령한 금지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번즈는 저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L. 크로스와 헨리 트럼블의 변호를 받았다. 공모 재판에서 크로스는 번즈와 RRWF가 아니라 철도회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반대파를 상대로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번즈가 무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검찰은 배심원 중 한 명이 병에 걸리자 공모 혐의를 취하했다. 크로스는 법원 금지명령 위반 혐의로도 번즈를 변호했지만, 번즈는 결국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업 과정에서 노조원들이 폭파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교를 건너다 열차 사고로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훗날 [[빈덴브루크]] 외곽에 기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파업 참가자들에 의해 살해당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졌있었며, 이 오벨리스크는2021년 철거되었다. == 여론 == [[조지 에스턴]] 총리는 파업이 점점 더 심각한 물리적·경제적 피해를 야기하는 상황에서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홀런드의 친노동적 사고방식과 사회 개혁주의적 성향은 외부인들에게 일종의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여겨졌다. 홀런드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늘 노동자 편에 선다는 점을 우려했으며, 사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업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론은 대체로 파업에 반대했고 에스턴의 조치를 지지했다.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동부 지역 의원들은 에스턴을 지지한 반면, 서부 지역 의원들과 진보파는 대체로 그를 비난했다. [[빈덴브루크]] 시장 홀런드는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했고, 파업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전까지 경찰의 개입을 막았다. 홀런드 시장은 에스턴을 비난하며 정부의 개입 없이도 시 차원에서 모든 소요 사태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에스턴의 편을 들며 파업 참가자들을 악당으로 몰아세웠고, 홀런드 시장만이 파업 참가자들의 편에 섰다. 주요 신문들은 파업의 책임을 홀런드에게 크게 돌렸다. 언론 보도는 광범위했으나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각종 보도와 사설은 파업 참가자들을 군경이 표방하는 애국심에 반하는 외국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장과 철도에서 일하는 이민 노동자들이 파업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폭도, 이방인, 무정부 상태, 법질서 위반 등을 경고하며 여론을 자극했다. 에스턴 총리와 언론은 파업이 무정부 상태와 사회 불안을 조장할 것을 우려했다. 에스턴은 RRWF가 정부 권위에 대한 봉기를 부추기고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맹비난했다. 파업에 참여한 이민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부추겼다. 한편 종교계에서도 파업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일었다. [[빈덴브루크]] 일대의 일부 기성 교회 지도자들은 보이콧을 비난하며 [[찰스 R. 하트웰]]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반발한 교인들이 교회를 대거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빈덴브루크 정교회의 신부는 RRWF와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덜 알려진 여러 신부들도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여파 == === 노동운동의 변화 === 파업 이후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은 해산되었고, 정부는 HRC에 기업도시 내 주거용 자산을 매각하도록 명령했다. RRWF가 붕괴된 후 많은 HRC 노동자들은 [[루이나 노동총동맹]](RLF)에 가입했다. [[찰스 R. 하트웰]] 사망 이후 HRC의 경영권은 새로운 경영진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회사는 노동자들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 우수한 주거·여가 시설을 제공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기업도시를 산업 용도로 전환하여 녹지 대신 창고와 수리 시설을 들어섰다. HRC가 루이나 철도차량 산업을 독점하며 계속 성장하는 동안, 하트웰 기업도시는 주택 노후화와 비좁은 생활 공간으로 점차 쇠락해갔다. 이 회사는 수십 년 뒤 문을 닫기 전까지 지역 최대 고용주 자리를 유지했다. === 번즈의 전향 === 감옥에서 풀려난 후 [[몽고메리 K. 번즈]]는 사회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로 변모했다. 그는 석방 이듬해 [[루이나 사회민주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이후 사회당 후보로 총선에 수차례 출마했다. === 정치적 파장 === 파업 주도자들, 특히 번즈에 대해 민사 및 형사 소송이 잇따라 제기되었고, [[루이나 대법원]]은 번즈의 행동을 부정하는 만장일치 판결을 내렸다.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정부가 고용주의 편에 섰다며 에스턴을 강하게 비난했고, 군 병력 대신 시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묵살된 것에 분개했다. [[조지 에스턴]] 내각은 파업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국가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찰스 R. 하트웰]]의 온정주의적 경영 방식이 파업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며, 기업도시 운영 방식을 "반시민적"이라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하트웰이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안긴 것을 강하게 질타했다. "미적으로 잘 꾸며진 시설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낼지 모르지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후 루이나 정부는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HRC의 정관이 기업도시 운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HRC에 하트웰 기업도시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기업도시는 이후 빈덴브루크 시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상당 부분이 역사 지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노동자의 날 제정 === 파업 이후 [[조지 에스턴]] 총리와 의회는 노동계를 달래기 위한 제스처로, 급진적인 [[5월 1일 노동절|메이데이]]와 별개로 [[루이나 노동자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관련 법안은 파업이 공식 종료된 지 6일 만에 의회를 통과했다. 파업 종식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동조했던 [[루이나 노동총동맹]] 의장은 이 공휴일 지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민주화운동]][[분류:루이나의 노동운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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