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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역사/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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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루이나/역사)] [include(틀:관련 문서, 문서명1=루이나/역사/철학사, 문서명2=루이나/역사/지성사,문서명3=루이나/교육, 문서명4=루이나/언론, 문서명5=루이나/과학 기술)] [목차] == 개요 == 루이나의 정치·사회·종교 사상의 흐름을 다루는 문서. 철학자들의 학설 자체는 [[루이나/철학]] 문서에서 다루며, 이 문서는 사상이 정치 체제와 사회 운동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쓰였는지에 초점을 둔다. 루이나 사상사를 관통하는 첫째 축은 권력은 위임된 것이라는 관념이다.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에서 왕이 공동체의 추대로 왕관을 받은 이래, 왕권은 계약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500년 넘게 쌓였다. 1689년 [[왕위협약]], 1885년 왕위 폐지, 20세기 군정에 맞선 저항권 사상은 모두 이 '추대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둘째 축은 군에 대한 경계와 문민 우위의 원칙이다. [[루이나 계승전쟁]]에서 육군이 왕당파의 주력이었다는 기억은 1885년 헌법의 군 통제 조항으로 이어졌고, 1978년 [[10.10 군사반란]]이 유독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배경이 되었다. 셋째 축은 국가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를 둘러싼 대립이다. 국가는 질서와 안보로 정당화된다는 흐름과 생활의 보호로 정당화된다는 흐름이 늘 맞섰다. 루이나의 두터운 복지국가와 냉전기 안보 국가는 같은 시대에 함께 자랐다. 오늘날 루이나 정치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경제 정책보다 군정과 검은 10년 같은 과거사에 대한 태도라는 점도 이 대립의 연장선에 있다. == 왕정기 == === 추대 전통 === 1372년 [[알드리크 1세]]는 빌베른 속왕국 체제를 무너뜨린 뒤에도 스스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벨포르에 귀족·성직자·도시 대표를 소집해 추대를 받는 형식을 택했다. 이 [[벨포르 추대회의]]가 루이나 정치사상의 출발점이다. 추대의 논리를 처음 글로 정리한 사람은 수도원장 '''[[코널 마크 브리언]]'''(1318?~1389)이다. 『추대에 관한 소론』(1374)에서 그는 왕위를 혈통이 아니라 공동체가 맡기는 직무로 보았다. 왕은 공동체의 첫 번째 종이며, 맡긴 자는 맡긴 것을 되물을 수 있다. 다만 브리언은 '되물음'의 절차를 정하지 않았고, 이 공백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왕과 참의회 사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추대 전통은 알드리크 왕조 아래에서 참의회(후일의 [[루이나 의회|의회]])를 소집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왕은 추대회의의 형식을 빌려 정통성을 확인받았고, 이는 루이나 왕권이 '맡겨진 권력'이라는 관념을 대중의 상식으로 만들었다. === 루이나 내전과 주권 논쟁 === 17세기 들어 왕권과 의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1647년 [[루이나 내전]]이 일어났고, 1659년까지 [[호국공 체제]]의 공위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는 루이나 정치사상이 가장 빠르게 갈라진 때다. 왕당파의 대표 이론가 '''[[에드먼드 칼로웨이]]'''(1594~1663) 주교는 『왕관의 근원』(1652)에서 왕권신수설을 폈다. 왕권은 신에게서 직접 오며, 추대회의는 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 정한 왕을 확인할 뿐이다. 그는 추대 전통을 계약으로 읽는 순간 왕정은 끝난다고 경고했다. 계약으로 세운 왕은 계약으로 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전 중 의회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평등파가 등장했다. 지도자 '''[[새뮤얼 크로프트]]'''(1614~1678)는 『자유민의 합의』(1648)에서 귀족과 도시 대표만이 아니라 모든 성인 남성이 추대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인 남성 보통선거, 의회의 정기 선거, 종교 관용, 채무 투옥 폐지를 요구했다. 크로프트의 요구는 호국공 체제 아래에서 묵살되었지만, 200년 뒤 선거권 운동의 고전으로 되살아났다. 공화주의자 '''[[제임스 오들리]]'''(1611~1677)는 『균형의 공화국』(1656)에서 정치 체제는 토지 소유의 분포를 따른다고 보았다. 땅이 한 사람에게 몰리면 군주정이, 소수에게 몰리면 귀족정이, 다수에게 나뉘면 공화정이 된다. 따라서 공화정을 지키려면 상속에 상한을 두어 소유를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그는 호국공 체제를 공화정의 이름을 빌린 군사 독재라고 비판하다 투옥되었다. 이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이 나왔다. 홉스는 주권자가 보호하지 못하면 복종의 의무도 끝난다고 썼는데, 왕당파는 이를 패배한 왕을 버리고 새 권력에 복종하라는 권고로 읽었다. 의회파도 홉스를 반기지 않았다. 홉스의 계약은 신민들끼리 맺는 것이어서 주권자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었고, 추대 전통이 말하는 '맡긴 것을 되물을 권리'가 그의 체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 왕위협약과 협약론 === 1659년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1689년 의회는 [[제이머스 2세]]를 폐위하고 빌베른계 왕을 맞아들이면서 [[왕위협약]]을 맺었다. 새 왕은 협약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왕위에 올랐다. 협약을 이론으로 정당화한 사람이 '''[[헨리 애슐리]]'''(1641~1712)다. 『협약론』(1690)에서 그는 추대 전통과 홉스의 계약론을 결합했다. 사람들이 정부를 세우는 것은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홉스는 옳다. 그러나 왕은 계약 바깥에 서 있지 않다. 추대받은 왕은 공동체와 맺은 협약의 당사자이며, 협약을 깨뜨린 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은 것이다. 애슐리의 협약론은 이후 200년 동안 루이나 헌정의 표준 해석이 되었다. === 관용과 무역 === 18세기 [[린데나우 왕조]] 아래에서는 국교회와 비국교도의 관계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비국교도 목사 '''[[에이브러햄 니스벳]]'''(1702~1771)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1745)에서 국가의 목적은 생명과 재산의 보호이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앙을 강제하는 것은 국가가 맡지 않은 일을 하는 월권이다. 강제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을 만들 뿐이다. 해외 무역과 식민지가 커지면서 경제도 사상의 쟁점이 되었다. '''[[제임스 모턴]]'''(1718~1786)은 『무역의 원리』(1764)에서 [[루이나 오리엔탈 컴퍼니]]의 독점을 공격했다. 국부는 금과 은의 축적이 아니라 노동과 교환에서 나오며, 특허 회사의 독점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민 전체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과 같다. 모턴의 자유무역론은 [[장바티스트 르노블]]의 상업사회론과 함께 18세기 루이나 자유주의의 경제적 축을 이루었다. === 노예무역 폐지 운동 === 루이나의 해외 팽창은 노예무역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마리안 델로름]]의 동정론이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운동을 조직한 것은 '''[[샬럿 웨일스]]'''(1749~1820)였다. 그는 노예선 선원과 생존자의 증언을 모아 『바다 건너의 증언』(1788)으로 펴냈고, 설탕 불매 운동을 조직했다. 웨일스는 추상적 원칙보다 구체적 증언이 여론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 방식은 이후 루이나 시민운동의 기본 문법이 되었다. === 혁명 논쟁 === 18세기 말 대륙의 혁명 소식은 루이나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낳았다. 급진파 '''[[대니얼 레이번]]'''(1757~1819)은 『인민의 권리』(1792)에서 추대 전통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왕을 추대한 것이 공동체라면, 공동체는 왕을 두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그는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공공연히 주장하다 1794년 선동죄로 투옥되었다. 이에 맞선 보수주의의 고전이 '''[[찰스 펨버턴]]'''(1745~1812)의 『선례에 관하여』(1793)다. 펨버턴은 추대 전통을 레이번과 정반대로 읽었다. 1372년의 추대는 한 번의 계약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선례의 출발점이며, 그 선례들 자체가 공동체의 지혜다. 살아 있는 세대가 한 번의 표결로 죽은 세대와 태어날 세대의 몫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루이나 보수주의의 원류가 되었다. == 19세기 == === 선거권 운동 === 19세기 전반, 산업화로 성장한 도시 노동자와 중간계급은 의회가 여전히 지주와 대상인의 것이라는 데 불만을 품었다. 1838년 시작된 [[인민청원 운동]]은 성인 남성 보통선거, 비밀투표, 의원 재산 자격 폐지, 의원 세비 지급, 선거구 인구 균등화를 요구했다. 지도자 '''[[존 패링턴]]'''(1801~1866)은 크로프트의 『자유민의 합의』를 다시 펴내며, 이 요구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200년 전에 이미 제기되었다가 배신당한 약속이라고 호소했다. 운동은 1848년 대규모 청원이 부결되며 쇠퇴했으나, 요구 사항 대부분은 공화국 수립 뒤 현실이 되었다. === 공화주의 운동 === 제국 경영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과 존재감 없는 왕실에 대한 회의가 겹치면서, 19세기 중반 공화파 단체가 처음으로 세력을 얻었다. 언론인 '''[[니콜라 드레베]]'''(1819~1888)는 『보이지 않는 왕』(1861)에서 물었다. 왕이 통치하지 않고 의회가 통치하며 국민 대다수가 왕의 얼굴조차 모른다면, 왕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드레베는 왕정이 해롭다기보다 쓸모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쓸모없는 제도는 결국 위기 때 해로워진다는 것이 그의 예언이었고, 이 책은 20년 뒤 계승전쟁 때 의회파 병사들의 배낭에서 가장 자주 발견된 책이 되었다. === 계승전쟁과 주권 논쟁 === 1882년 [[에드먼드 3세]]가 후사 없이 죽고 왕비 [[아델하이트]]가 선박 목수 [[가스파르 뮈롱]]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왕위 계승은 곧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되었다. [[루이나 계승전쟁]](1882~1885)은 무기의 전쟁이자 팸플릿의 전쟁이었다. 의회파 [[벨포르 연합]]의 논거는 세 가지였다. 뮈롱의 계열은 1689년 왕위협약으로 계승권을 잃었다는 헌정 논거, 왕을 세우는 권한은 1372년 이래 대표기구에 있다는 추대 논거, 루이나어도 못하는 인물을 대륙 출신 왕비가 앉히는 것은 외국의 섭정이라는 주권 논거다. 왕당파 [[은사슴단]]은 왕위 계승은 혈통의 문제이지 표결의 대상이 아니며, 의회가 왕을 고르기 시작하는 순간 왕정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맞섰다. 왕당파의 논리를 가장 정교하게 편 사람은 국교회 고교회파 성직자 '''[[바솔로뮤 크레스웰]]'''(1820~1890)이다. 『혈통과 성유』(1883)에서 그는 왕위의 정당성이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혈통과 대관식의 성유에서 나온다며 칼로웨이의 신수설을 되살렸다. 의회파의 이론가 '''[[조제프 랑글루아]]'''(1832~1899)는 『주권의 거처』(1883)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홉스의 '인공 인격' 개념을 빌려, 주권은 왕의 몸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공 인격에 있으며 그 인격을 대표하는 것은 한 사람일 수도 합의체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왕이 후사 없이 죽었다고 주권이 사라지지 않으며, 추대회의가 왕을 세울 수 있다면 왕을 세우지 않을 수도 있다. "왕은 죽어도 리바이어던은 죽지 않는다"는 랑글루아의 문장은 1885년 5월 [[벨포르 추대회의]]가 왕위 자체를 폐지할 때 사실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칼로웨이가 230여 년 전에 경고한 대로, 계약으로 세운 왕은 계약으로 폐해졌다. === 사회주의의 유입 === 산업화의 그늘에서 사회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878년 벨포르에 세워진 야간 노동자 학교는 대륙의 사회주의 문헌이 루이나어로 읽힌 최초의 공간이었다. 같은 시기 [[피에르 앙셀]]의 협동조합 사회주의는 국가 대신 결사로 사회를 다시 짜자고 주장했다. 노동운동 안에서 국가를 장악할 것인가, 국가 바깥에 결사를 세울 것인가라는 논쟁은 이때 시작되었다. [[오언 카다른]]의 언어 민족주의도 이 시기 사상의 한 축이었다. 켈트 기층의 루이나어를 민족의 몸으로 본 그의 사상은 빌베른과 대륙에 대한 문화적 자립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 안의 다른 언어 공동체를 위계 아래에 두는 논리로도 쓰였다. == 제1·2공화국 == === 공화주의와 제국 === 1885년 의회파 다수는 [[공화연합(루이나)|공화연합]]으로 전환해 공화국의 첫 여당이 되었고, 같은 해 헌법은 성인 남성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초기 공화연합의 이념은 공화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였으나, 해외 제국의 경영이 국가의 과제가 되면서 곧 성격이 바뀌었다. 제국주의 공화주의의 대변자 '''[[아서 펜로즈]]'''(1848~1921)는 『바다의 공화국』(1894)에서 루이나의 자유는 바다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계승전쟁에서 의회를 구한 것이 해군이었듯 공화국을 지키는 것도 해군과 해외 거점이며, 제국을 잃은 공화국은 대륙 강국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공화국이 왕정보다 제국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맞선 반제국주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에서 나왔다. '''[[에스더 메이필드]]'''(1862~1937)는 『제국의 장부』(1907)에서 식민지 경영의 수익과 비용을 실제 재정 자료로 계산해, 제국이 국민 전체에게는 손해이고 소수의 무역 회사와 군납 업자에게만 이익이라는 것을 보였다. 자유를 내건 공화국이 다른 민족의 자유를 빼앗는 모순을, 그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장부의 문제로 드러냈다. === 사회적 자유주의 === 20세기 초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다시 정의했다. 공화연합에서 갈라져 나온 개혁파의 이론가 '''[[휴 랭던]]'''(1856~1928)은 『시민의 조건』(1902)에서 굶주린 사람에게 계약의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썼다. 랭던에 따르면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가 자유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상태가 자유다. 따라서 공교육, 노동 시간 규제, 노령 연금 같은 국가의 개입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실질화하는 것이다. 랭던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사회입법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 여성 참정권 운동 === 1885년 헌법은 성인 남성 보통선거를 도입했지만 여성을 제외했다. '''[[이디스 레인]]'''(1868~1941)은 『절반의 공화국』(1899)에서 왕을 거부한 공화국이 국민의 절반을 여전히 신민으로 남겨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추대 전통에 기댄 레인의 논법은 단순했다. 공동체가 통치자를 세우는 것이라면, 여성은 공동체가 아닌가? 레인이 이끈 운동은 청원과 행진에서 시작해 납세 거부로 나아갔고, 루이나 여성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 노동운동 === 20세기 초 노동운동의 주류는 직종별 숙련공 조합이었다. 이에 맞서 1913년 창립된 철도 노동조합 RRWF는 직종·등급·성별에 관계없이 철도에 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조합으로 묶는 산업별 조직을 내걸었다. 위원장 '''[[몽고메리 K. 번즈]]'''는 비폭력과 비정치를 원칙으로 삼았다. 노동자는 정당이 아니라 조합의 단결로 싸워야 하며, 폭력은 국가에 개입의 빌미만 준다는 것이다. 1916년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은 이 원칙들의 시험대였다. 재봉부 지부장 [[애나 콜필드]]의 연설이 보이콧 결의를 이끌었으나, 법원의 금지명령과 군경 투입 앞에 파업은 패배했고 조합은 해산되었다. 패배는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하나는 비정치 원칙의 한계였다. 국가가 법원과 군대로 파업을 꺾는 이상 노동자도 국가 권력에 들어가야 한다. 번즈는 이 결론에 따라 정당 정치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하나는 배제의 대가였다. 시민권 요건으로 이민 노동자를 조합에서 배제한 결과, 바로 그들이 대체 노동자로 투입된 것이 패배의 원인 중 하나였다. 산업별 조직이 정작 가장 약한 노동자를 밖에 두었다는 반성은 이후 루이나 노동운동의 단골 교훈이 되었다. ===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분화 === 1919년 노동조합 세력은 [[루이나 노동당|노동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노동당은 국제 노동운동 조직 가입과 해외 영토 문제를 두고 갈라졌다. 제국의 즉각 해체와 해외 영토 철수를 주장한 반제국주의 좌파가 이탈해 [[루이나 공산당|공산당]]을 세웠고, 초대 서기장은 엘리아스 T. 그로브였다. 두 당의 차이는 국가를 보는 방식에 있었다. 노동당은 의회를 통해 국가를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공산당은 의회가 제국과 자본의 도구인 이상 개혁은 체제를 연장할 뿐이라고 보았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반제국주의, 노동자 자주관리를 축으로 한 공산당의 강령은 이후 100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 === 정교회 사회사상 ===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온 망명자들은 정교회와 키릴 문자와 함께 독특한 사회사상을 가져왔다. 공산주의를 피해 온 이들은 철저히 반공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에도 비판적이었다. [[세르게이 베르흐네프]]의 인격주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의 인격을, 계약이 아니라 공동성을 사회의 기초로 보았다. 이 때문에 정교회계 지식인들은 국가 주도 복지에는 우호적이면서도 반공적인 독특한 입장을 갖게 되었다. 정교회 신자가 늘면서 정교회는 정치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1921년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 [[필립 R. 코널리]]가 첫 정교회 신자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은 이 변화를 상징한다. 오늘날 정교회계 보수주의는 이 시기에 형성된 반공·공동체·복지의 결합을 원형으로 한다. === 대공황과 국가 개입 === 대공황은 루이나 사상 지형을 바꿔 놓았다. 제12대 대통령 [[러더퍼트 J. 헤이슬러]]는 공공사업과 주택 건설, 실업 구제에 국가 재정을 대규모로 쏟아부었다. 노동당의 강령을 노동당이 아닌 대통령이 먼저 집행한 셈이었다. 이 정책의 이론적 대변자가 경제학자 '''[[앨버트 크레인]]'''(1883~1962)이다. 『계획과 자유』(1934)에서 그는 시장이 스스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굶는다고 썼다. 국가가 투자를 계획하는 것은 자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업이라는 가장 큰 부자유를 없애는 것이다. 크레인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시장을 유지하되 투자와 고용의 큰 방향은 국가가 정하는 혼합경제를 제시했다. 크레인의 경제학과 [[루이즈 아르노]]의 '보존의 국가'론, [[헨리 웨이크필드]]의 고통 우선 원칙이 합쳐지면서, 국가는 국민의 생활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는 관념이 정파를 넘어선 상식이 되었다. 1948년 노동당이 자유주의 세력과 합당해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을 창당한 것은 이 합의가 정당 체제로 굳어진 결과였다. == 제3공화국과 냉전 == === 반공 자유주의 === 1949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 결정을 이론적으로 옹호한 사람이 '''[[앙리 보샹]]'''(1904~1979)이다. 『자유의 방파제』(1952)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자유를 없애려는 세력에게까지 자유를 허락하면 스스로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했다. 관용은 관용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며, 그 약속 바깥에 선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른바 '방어적 민주주의'론이다. 보샹의 논리는 이후 70여 년 동안 루이나 반공 체제의 기본 언어가 되었다. 비판자들은 누가 '약속 바깥에 선 자'인지 정하는 권한이 결국 국가에 있으며, 그 권한은 공산주의자에서 노동조합으로, 노동조합에서 비판 언론으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검은 10년의 경험이 이 비판을 뒷받침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평가다. === 안보 국가론 === 냉전과 두 차례 랜드 전쟁 속에서 안보는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법철학자 [[가스통 브레몽]]은 법의 효력이 최종적으로 질서를 세우겠다는 결단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그의 비상사태 법리는 냉전기 안보 입법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질서는 저절로 서지 않는다"는 그의 문장은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의 표어로 쓰였다. 1950년대 후반 국가안보회의 안건으로 추진된 [[제방 계획]]은 안보 국가론이 도달한 극단이었다. 좌익의 위협을 부풀리기 위해 국가가 극우 조직을 키우고 그 테러를 좌익에게 뒤집어씌운 이 계획은, 공포가 통치의 수단이 되면 국가가 스스로 공포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의 존재는 1981년에야 드러났지만, 이후 루이나 정치사상의 거의 모든 논쟁은 이 사실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 평화·반핵 운동 === 1950년대 루이나가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자 반핵 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의 상징적 인물 '''[[마들렌 오지에]]'''(1907~1996)는 『마지막 무기』(1959)에서 핵무기는 지키려는 것을 지키는 무기가 아니라 지키려는 것까지 함께 파괴하는 무기라고 썼다. 보호를 명분으로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는 무기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반핵 운동은 이후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의 공동 뿌리가 되었다. === 반전과 징병 === 1958~1963년 [[1차 랜드 전쟁]]과 1973~1977년 [[2차 랜드 전쟁]]은 징병제 국가 루이나의 사회 전체를 전쟁에 끌어들였다. 1975년 [[띠에우리엔 대학살]] 보도 이후 참전 지지 여론이 무너지면서, 반전 사상은 학생과 제대군인 사이로 빠르게 퍼졌다. 학생운동의 이론가 '''[[마르크 베르티에]]'''(1944~)는 『징집된 대학』(1969)에서 징병 행정과 대학의 관계를 분석했다. 대학 진학이 징집 연기와 보직 배치에 영향을 주는 구조에서, 누가 전선에 가는지는 계급이 정한다. 그는 대학이 중립적인 학문 공간이 아니라 전쟁 동원 체계의 일부라고 비판했다. 이 문제의식은 1976~1977년 [[10월 전선]]이 징병사무소에서 빼낸 명부를 공개하면서 실증되었고, 이후 징병 형평성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 신좌파와 공포 비판 ===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은 구좌파의 경제주의와 거리를 두고, 일상과 문화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레옹 테시에]]의 『공포의 생산』(1968)은 이 흐름의 대표 저작이다. 국가와 언론이 불안을 생산해 복종을 얻는다는 그의 분석은, 제방 계획이 드러나기 13년 전에 그 구조를 짚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무장투쟁의 논리들 === 1970년대 [[검은 10년]]의 무장 조직들은 저마다의 정당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논리들은 실제로 저질러진 폭력과는 별개로 사상사의 검토 대상이 된다. [[혁명적 노동자동맹]](RWL)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범죄로 원 동맹을 파괴했으니, 씌워진 혐의를 실제로 수행함으로써 그 혐의가 거짓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좌파 정당들은 무고함을 근거로 유죄를 자처하면 국가의 조작을 사후에 정당화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 행동대]](PAU)의 '수형자 계급론'은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가둔 이상 유죄판결은 진실이 아니라 국가의 선택이므로 모든 수형자가 정치범이며, 매수될 것이 없는 수형자야말로 혁명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정작 [[아르덴역 폭발]] 사건의 오심 피해자 대다수가 가입을 거부하며 "우리를 가둔 논리를 그대로 쓰는 자들"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 논리의 자기모순을 드러냈다. [[10월 전선]]의 '예고 원칙'은 폭파 전 경고, 야간 설치, 설비·서류만 표적으로 삼는다는 규범이었다. 그 근거는 도덕이 아니라 일관성이었다. 민간인 학살에 항의하는 조직이 민간인을 죽이면 항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1977년 예고가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숨지자 조직이 이를 시인한 것은, 무장 조직이 스스로의 원칙에 책임을 진 드문 사례로 기록된다. 극우 쪽에서는 [[공화국의 방패]]가 질서의 회복을 내걸었다. 회원 대다수는 조직이 국가가 만든 것임을 몰랐고 자신들의 신념을 진심으로 믿었다.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남이 짜 놓은 각본을 연기했다는 이 이중 구조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루이나 사상사의 가장 쓰라린 사례로 꼽힌다. == 군정과 민주화 == === 저항권 사상 === 1978년 [[10.10 군사반란]]으로 [[알렉산더 모로]]의 군정이 들어서자, 1885년 이래의 문민 우위 원칙과 추대 전통이 저항의 언어로 되살아났다. 인권 변호사 '''[[앙드레 퐁텐]]'''(1931~2011)은 군정 아래에서 비밀리에 돌던 『저항의 권리』(1979)에서 저항권의 요건을 정식화했다. 헌법 질서 전체가 파괴되었을 것, 다른 구제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을 것, 저항의 목표가 헌법 질서의 회복일 것. 이 세 요건 아래에서 시민의 저항은 반란이 아니라 헌법의 마지막 수호가 된다. 퐁텐의 저항권론은 군정에 맞선 롱비치의 [[12.23 민주화운동]]과 1980년 [[10.24 시민혁명]]을 정당화하는 법리로 널리 인용되었다. === 종교계의 저항 === 군정기에 언론과 정당이 묶이자 교회가 저항의 공간이 되었다. 정교회 신부 '''[[니콜라이 페도토프]]'''(1928~2004)는 정교회 전통의 '자기 비움' 신학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신이 스스로를 비워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왔듯, 교회도 권력과 특권을 비우고 박해받는 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는 교회를 수배자의 피난처로 내주었고, 이 경험을 『비움의 교회』(1983)로 정리했다. 반공을 이유로 군정에 우호적이던 정교회 주류와 페도토프 계열의 분열은 오늘날까지 정교회계 정치사상의 두 갈래로 남아 있다. === 벨포르의 봄과 헌정주의 === 10.24 이후의 이행기인 [[벨포르의 봄]]은 헌정주의 사상의 시대였다. 핵심 질문은 다시는 군이 헌정을 뒤엎지 못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였다. 1980년 [[주거권 보장법 (루이나)|주거권보장법]]이 군정기 철거와 강제퇴거에 대한 반성에서 제정된 것처럼, 이 시기 입법은 대체로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는 동시에 국가의 보호 의무를 명시하는 방향을 따랐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제방 계획]]과 [[스틸워터 계획]]의 일부를 밝혀내면서, 루이나 사상계는 국가가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나탈리 오베르]]와 [[미셸 다르시]]로 대표되는 국가 정당성과 책임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 소유자 민주주의 논쟁 === 1980년대 집권한 [[민주연합(루이나)|민주연합]]은 공공주택 세입자에게 자기 집을 살 권리를 주는 매수권 제도를 도입했다. 이론적 대변자 '''[[로저 핼리웰]]'''(1939~2017)은 『소유하는 시민』(1984)에서 국가가 집을 빌려주는 사회의 시민은 영원한 세입자이며, 자기 집을 가진 시민만이 국가로부터 독립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유는 자유의 물질적 기초라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이 논리가 공공주택을 잘라 파는 일을 자유의 언어로 포장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르노의 계보를 잇는 이들은 보호가 소유로 대체되면 집을 살 수 없는 사람만 남은 공공주택이 낙인의 공간이 된다고 경고했다. 논쟁은 매수권을 유지하되 판 만큼 대체 공급을 의무화하는 타협으로 정리되었다. 이 타협은 루이나에서 시장 친화 정책이 복지 합의의 틀 안에서만 받아들여지는 방식의 전형이 되었다. === 사형 폐지와 문민 우위 === 1989년 [[루이나 헌정 위기|3.29 헌정위기]]를 일으킨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가 1989년 12월 12일 처형되었다. 이것이 루이나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다. 처형 직후 사형 폐지론자 '''[[엘렌 로샤르]]'''(1946~)는 『마지막 처형』(1990)에서 물었다. 헌정을 파괴한 자를 죽이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국가가 죽일 권한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인가? 로샤르는 국가에 생명을 빼앗을 권한을 남겨 두는 한, 그 권한은 언젠가 다시 쿠데타 세력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90년 제6공화국 헌법은 사형을 폐지하고, 계엄을 엄격히 제한하며, 군의 불법 명령 거부를 명문화했다. 1885년 헌법의 군 통제 조항에서 시작된 문민 우위 사상은 이로써 헌법의 가장 단단한 조항이 되었다. == 제6공화국 == === 과거사의 균열 === 제6공화국 이후 루이나 사상 지형의 가장 큰 특징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경제 정책보다 과거사에 대한 태도라는 점이다. 복지국가 자체는 여야를 막론한 합의의 대상이 되었지만, 제방 계획과 스틸워터, 군정을 어떻게 평가하고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가를 두고는 사회가 깊이 갈라졌다. 진보 진영은 [[미셸 다르시]]의 책임론에 기대어, 형사 책임을 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청산의 실패라고 보았다. 보수 진영은 냉전기 안보 정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과거사 논쟁이 국가 기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반박했다. 이 균열은 [[루이나/언론|언론 지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주거권 운동 === 1990년대 이후 주거권 운동은 아르노의 '보존의 국가'론을 현대적 권리의 언어로 다시 썼다. 운동가 '''[[장뤽 파이야르]]'''(1958~)는 『문 앞의 권리』(1997)에서 주거권이 집을 '가질' 권리보다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야르에 따르면 퇴거는 단지 거처를 잃는 일이 아니라 일자리, 학교, 이웃, 다니던 병원까지 한꺼번에 잃는 일이다. 따라서 국가가 가장 먼저 막아야 할 것은 노숙이 아니라 퇴거다. 이 문제의식은 이후 임대차 보호와 임대료 안정 입법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 페미니즘 === 현대 루이나 페미니즘은 두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재생산권이다. 임신중절 합법화를 둘러싼 논쟁은 2011년 대통령 거부권, 2016년 「재생산권 보장 및 임신중절 합법화법」 제정, 이후의 폐지 시도와 개정으로 이어지며 현대 루이나 정치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징병이다. 루이나는 남녀를 모두 징집하는 나라로, 이를 성평등의 증거로 볼 것인가를 두고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이 이어졌다. '''[[카린 오스트로바]]'''(1971~)는 『징집된 평등』(2009)에서 동원의 평등은 권리의 평등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여성을 똑같이 징집한다는 것은 국가가 여성을 똑같이 '쓸 수 있다'는 뜻일 뿐, 군 안팎에서 여성이 똑같은 권리와 안전을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한편 [[클라라 몽고메리]]의 돌봄 윤리는 홉스 이래 루이나 사상의 주체가 늘 독립된 성인 남성이었다는 점을 비판하며, 복지국가론에 계약이 아닌 의존과 돌봄이라는 새로운 근거를 제공했다. === 녹색 사상 === 반핵 운동에서 출발한 녹색 사상은 공업 지대의 오염 문제와 만나며 독자적 흐름이 되었다. '''[[클레망스 바이]]'''(1963~)는 『바다의 몫』(1999)에서 루이나 사상사가 국가와 시민, 노동과 자본의 관계만 물었을 뿐 바다와 땅의 몫은 묻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바다로 번영한 나라가 바다에 가장 많이 빚진 나라라는 그의 주장은 녹색 운동의 대표 구호가 되었다. === 탈식민 비판 ===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을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진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 정책은 빌베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가 빌베른계 주민을 지배한 역설로 비판받았다. [[세레나 발로티]]의 '번역의 비대칭'론은 이 비판을 언어와 문화의 차원으로 넓혔고, [[에스더 메이필드]] 이래의 반제국주의 전통은 현대 탈식민 비판으로 이어졌다. === 이주와 시민권 === 1990년대 이후 [[유고랜드]] 출신 이주민을 비롯한 이주 공동체가 커지면서 시민권의 범위가 새 쟁점이 되었다. 유고랜드 출신 한국계 정치학자 '''[[한서진]]'''(1975~)은 『두 개의 이름』(2006)에서 이주민이 겪는 차별이 법의 공백이 아니라 시민의 정의 자체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추대 전통 이래 루이나 사상은 '공동체가 권력을 세운다'고 말해 왔지만, 그 공동체에 누가 속하는지는 한 번도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2000년대 [[주거차별 금지법 (루이나)|주거차별금지법]] 제정의 배경이 되었다. 반대편에서는 이민 통제를 요구하는 극우 민족주의가 성장했다. 이들은 카다른의 언어 민족주의를 끌어와 루이나어 공동체만이 진정한 루이나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이나어 자체가 켈트 기층 위에 라틴어와 빌베른어가 켜켜이 쌓인 '지층'이라는 카다른의 핵심 논지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안보와 자유 === 2001년 [[1.19 사건]]과 뒤이은 [[루이나-고랜드 전쟁]]은 안보와 자유의 오래된 긴장을 다시 불러냈다. 시민적 자유 연구자 '''[[로라 펜더개스트]]'''(1960~)는 『비상의 일상화』(2005)에서 반테러 입법이 '임시 조치'의 형식으로 도입되었다가 영구화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펜더개스트는 1977년 반테러 임시조치법에서 2000년대 반테러 입법에 이르는 흐름을 분석하며, 비상은 끝나지 않고 일상이 된다고 경고했다. 제방 계획을 겪은 사회가 같은 경로를 되밟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 현대 보수주의 === 현대 루이나 보수주의는 복지국가를 받아들인 보수주의다. 정교회계 보수 사상가 '''[[프레데릭 콜링우드]]'''(1958~)는 『물려받은 것들』(2012)에서 펨버턴의 선례론과 베르흐네프의 공동성 사상을 결합했다. 콜링우드에 따르면 복지국가 역시 세대를 거쳐 물려받은 제도이므로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대상이다. 보수주의가 맞서야 할 것은 국가의 크기가 아니라 가족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를 해체하는 힘이며, 그 힘은 시장에서도 국가에서도 나온다. 이 입장은 냉전 반공주의와 시장주의에 기댔던 구보수와 거리를 두며, 보수 진영 내 개혁파의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 === 좌파의 재편 === 2022년 공산당 불법화의 근거였던 법 조항이 폐지되면서 73년 만에 공산당이 다시 등록되었다. 같은 해 결성된 [[좌파연대]]와의 통합 논의는 [[사비에트]]에 대한 평가 차이로 결렬되었다. 사비에트를 제국주의에 맞선 대항 축으로 볼 것인가, 관료제로 변질된 체제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냉전이 끝나지 않은 랜드해협에서 루이나 좌파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 기술과 민주주의 === 국가 전략 인공지능의 도입은 최근 사상계의 새 쟁점이다. [[사무엘 레비츠키]]가 제기한 '계산과 판단의 구분'은 정치사상의 문제로도 옮겨졌다. 기계에 판단을 맡긴 결정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는가? 선출되지 않은 체계가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줄 때 민주적 통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추대 전통이 650년 동안 물어 온 '권력은 누구에게서 오는가'라는 질문의 최신판이다. == 주요 사상가 == ||<tablealign=center><bgcolor=#131230><color=#ffc224> '''시대''' ||<bgcolor=#131230><color=#ffc224> '''사상가''' ||<bgcolor=#131230><color=#ffc224> '''생몰년''' ||<bgcolor=#131230><color=#ffc224> '''주저''' || ||<|10> 왕정기 || 코널 마크 브리언 || 1318?~1389 || 『추대에 관한 소론』 || || 에드먼드 칼로웨이 || 1594~1663 || 『왕관의 근원』 || || 새뮤얼 크로프트 || 1614~1678 || 『자유민의 합의』 || || 제임스 오들리 || 1611~1677 || 『균형의 공화국』 || || 헨리 애슐리 || 1641~1712 || 『협약론』 || || 에이브러햄 니스벳 || 1702~1771 ||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 || 제임스 모턴 || 1718~1786 || 『무역의 원리』 || || 샬럿 웨일스 || 1749~1820 || 『바다 건너의 증언』 || || 대니얼 레이번 || 1757~1819 || 『인민의 권리』 || || 찰스 펨버턴 || 1745~1812 || 『선례에 관하여』 || ||<|4> 19세기 || 존 패링턴 || 1801~1866 || - || || 니콜라 드레베 || 1819~1888 || 『보이지 않는 왕』 || || 바솔로뮤 크레스웰 || 1820~1890 || 『혈통과 성유』 || || 조제프 랑글루아 || 1832~1899 || 『주권의 거처』 || ||<|5> 제1·2공화국 || 아서 펜로즈 || 1848~1921 || 『바다의 공화국』 || || 에스더 메이필드 || 1862~1937 || 『제국의 장부』 || || 휴 랭던 || 1856~1928 || 『시민의 조건』 || || 이디스 레인 || 1868~1941 || 『절반의 공화국』 || || 앨버트 크레인 || 1883~1962 || 『계획과 자유』 || ||<|3> 제3공화국 || 앙리 보샹 || 1904~1979 || 『자유의 방파제』 || || 마들렌 오지에 || 1907~1996 || 『마지막 무기』 || || 마르크 베르티에 || 1944~ || 『징집된 대학』 || ||<|4> 군정·민주화 || 앙드레 퐁텐 || 1931~2011 || 『저항의 권리』 || || 니콜라이 페도토프 || 1928~2004 || 『비움의 교회』 || || 로저 핼리웰 || 1939~2017 || 『소유하는 시민』 || || 엘렌 로샤르 || 1946~ || 『마지막 처형』 || ||<|6> 제6공화국 || 장뤽 파이야르 || 1958~ || 『문 앞의 권리』 || || 카린 오스트로바 || 1971~ || 『징집된 평등』 || || 클레망스 바이 || 1963~ || 『바다의 몫』 || || 한서진 || 1975~ || 『두 개의 이름』 || || 로라 펜더개스트 || 1960~ || 『비상의 일상화』 || || 프레데릭 콜링우드 || 1958~ || 『물려받은 것들』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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