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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인식 == 동사랜드 역사 서술의 첫 번째 쟁점은 민족의 기원이다. 공식 역사는 '제방의 시대'의 토착 공동체와 몽골 이후의 베트남계 사회를 하나로 이어진 동사랜드사로 서술하며, 강제 이주라는 기원보다 무너진 제방을 되살려 땅을 일군 개척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오늘날 주민의 주류가 원의 강제 이주민에서 기원한다는 점이 정설이며, 이주민 사회에 흡수되지 않고 구릉지에 남은 토착 소수민족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동사랜드 역사학은 남꽝 왕국의 책봉 체제를 '형식은 사대, 실질은 자주'로 평가한다. 조공과 책봉은 의례였을 뿐 내정과 군사는 왕국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반면 청평 역사학은 남꽝 왕국을 청평 문명권의 남방 번속국으로 서술하며, 1620년대 서부 국경 전쟁에서 청평군이 왕국을 지켜 낸 일을 강조한다. 1929년 티삼응우지 조약에 대한 평가는 더 엇갈린다. 동사랜드 역사학은 이를 '독립이라는 이름의 보호국화'로 보지만, 청평을 떠나 독자 국가로 인정받은 첫 계기였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국호 '동사랜드'가 이 조약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동사랜드 안에서 불편한 주제로 남아 있다. 동사랜드 정부의 공식 역사관은 1945년 9월 혁명으로 성립한 인민공화국이 오늘날 국가의 직접적인 기원이며, 1949~1963년은 '점령기'라고 본다. 1951년 10월의 탈퇴 의결과 봉기는 점령에 맞서 주권을 되찾으려 한 '인민적군 혁명'으로 서술되고,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은 사비에트가 이를 뒤늦게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동사랜드의 공식 문서가 독립 연도를 1951년으로 적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입장은 정반대다. 1949년 가입은 동사랜드 인민회의의 자발적 청원에 따른 것이고, 1951년 결의는 헌법상 권한이 없는 기관의 무효 행위이며, 1963년 분리는 연방이 선의로 승인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비에트 역사 교과서는 동사랜드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으며, 1951~1963년의 진압과 항전은 '동부 소요'로 짧게 언급될 뿐이다. 슬라브계 주민의 기억은 두 서사 어디에도 온전히 들어가지 않는다. 1950년대 이주민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국가 정책에 따라 옮겨진 사람들로 기억하며, 1963년 이후의 공직 배제와 러시아어 학교 축소를 '두 번째 이주'라고 부른다. 호앙 티 마이의 사인, 1949년 진주와 1951~1952년 진압의 사망자 수, 동부 개척 사업의 강제성 여부는 지금도 두 나라 역사학계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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