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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역사/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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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나 내전과 주권 논쟁 === 17세기 들어 왕권과 의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1647년 [[루이나 내전]]이 일어났고, 1659년까지 [[호국공 체제]]의 공위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는 루이나 정치사상이 가장 빠르게 갈라진 때다. 왕당파의 대표 이론가 '''[[에드먼드 칼로웨이]]'''(1594~1663) 주교는 『왕관의 근원』(1652)에서 왕권신수설을 폈다. 왕권은 신에게서 직접 오며, 추대회의는 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 정한 왕을 확인할 뿐이다. 그는 추대 전통을 계약으로 읽는 순간 왕정은 끝난다고 경고했다. 계약으로 세운 왕은 계약으로 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전 중 의회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평등파가 등장했다. 지도자 '''[[새뮤얼 크로프트]]'''(1614~1678)는 『자유민의 합의』(1648)에서 귀족과 도시 대표만이 아니라 모든 성인 남성이 추대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인 남성 보통선거, 의회의 정기 선거, 종교 관용, 채무 투옥 폐지를 요구했다. 크로프트의 요구는 호국공 체제 아래에서 묵살되었지만, 200년 뒤 선거권 운동의 고전으로 되살아났다. 공화주의자 '''[[제임스 오들리]]'''(1611~1677)는 『균형의 공화국』(1656)에서 정치 체제는 토지 소유의 분포를 따른다고 보았다. 땅이 한 사람에게 몰리면 군주정이, 소수에게 몰리면 귀족정이, 다수에게 나뉘면 공화정이 된다. 따라서 공화정을 지키려면 상속에 상한을 두어 소유를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그는 호국공 체제를 공화정의 이름을 빌린 군사 독재라고 비판하다 투옥되었다. 이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이 나왔다. 홉스는 주권자가 보호하지 못하면 복종의 의무도 끝난다고 썼는데, 왕당파는 이를 패배한 왕을 버리고 새 권력에 복종하라는 권고로 읽었다. 의회파도 홉스를 반기지 않았다. 홉스의 계약은 신민들끼리 맺는 것이어서 주권자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었고, 추대 전통이 말하는 '맡긴 것을 되물을 권리'가 그의 체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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