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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70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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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71 |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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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72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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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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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고랜드는 20세기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라 마베라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고랜드 총독령은 라 마베라로 편입되었다가, 고랜드 도독령으로 계승되었다. 고랜드는 당시 국제 상품이었던 설탕의 주 생산지였기 때문에 부유했고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라 마베라에서도 고랜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고랜드 도시의 상당수는 라 마베라의 식민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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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라 마베라는 가혹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고 19세기 무렵 고랜드 내에서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1943년 루이나 독립전쟁 이후 유고랜드를 시작으로 랜드해협 남부 대륙의 식민지들이 줄지어 독립을 이어갈 때도 고랜드는 최후까지 라 마베라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고랜드 도독령 내 정치세력들이 라 마베라로로부터의 독립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라 마베라의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는 현지인들의 반란이 커져갔다. 이 무렵 대외확장에 적극적이었던 루이나는 고랜드의 전략적 중요성과 경제성을 파악하고, 고랜드를 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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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1940년대에 루이나는 고랜드의 자국령 편입을 시도했다. 루이나는 1941년 상원의원 존 슬리델이 마베라에 1억 5천만 달러에 고랜드를 매각할 것을 제의했다. 루이나는 앞서 콘스탄티노폴과의 협상을 통해 1949년에 콜마르 시를 양도받은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베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당시 라 마베라에 있어 고랜드는 프랑스의 알제리나 영국의 북아일랜드처럼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닌 본토의 연장선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마베라는 수 백년 동안 고랜드를 경영해오면서 자국민을 이민보내고, 현지 사회를 양성하는 등 상당한 투자를 해왔다. 마베라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루이나의 고랜드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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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19세기 중반부터 마베라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위해 부유한 식민지였던 고랜드에 세금을 거둬 충당했다. 때마침 고랜드와 가까운 유고랜드가 혁명으로 붕괴되고, 서구 국가들이 유고랜드와의 교역을 거부하면서 고랜드의 플랜테이션 수출은 호황을 맞이했다. 유고랜드 혁명 이후 한동안 전 세계 설탕 공급량의 절반이 고랜드산이었으며 담배와 커피 수출로도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플랜테이션으로 벌어들인 부는 현지 농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박봉과 중노동에 분노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마베라 식민당국은 군대를 투입해 강경하게 진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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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이러한 흐름을 틈타 루이나가 고랜드 독립 게릴라들에게 지원을 하게 되었고, 이들은 루이나와의 자발적인 합방을 원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벌어진 10년 전쟁으로 산혼조약을 체결하고 자치령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식민당국의 처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자 결국 1959년에 고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랜드 독립전쟁의 지도자가 바로 호세 마르티다. 전쟁 과정에서 전사했고, 현재는 독립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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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1959년, 제국주의에 뒤늦게 눈뜬 루이나는 메인호 폭파사건을 빌미 삼아 마베라에게 선전포고, 루이나-마베라 전쟁이 발발한다. 그 일환으로 고랜드 독립전쟁에 개입했고, 이미 고랜드 독립당이 고랜드의 반 이상을 수복한 상황에서 마베라 식민지군에게 저항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고랜드는 루이나의 통제 하에 놓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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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루이나-마베라 전쟁에서 루이나가 승리하고 마베라는 고랜드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해당 식민지들을 루이나에 양도했다. 1960년 루이나는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어필하기 위해 고랜드를 자국령으로 편입시키지 않고 독립시켰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루이나의 행태를 두고 비판했다. 이때 루이나는 고랜드를 독립시킨 것에 반에 콘스탄티노폴은 식민지로 삼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 루이나 역사가들은 고랜드를 콘스탄티노폴처럼 루이나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고랜드 독립을 루이나 역사상 가장 치명적 실수 중 하나라고 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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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고랜드 공산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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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 제2차 랜드 대전 이후 공산주의 및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고랜드에서도 점차 이러한 의식에 눈뜨게 된다. 특히 1961년에 이른바 중사의 반란으로 불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군사정권[* 고랜드는 라 마베라에서 독립하고 단 2년만에 다시 무능한 정부의 지배에 놓였다.] 의 무능과 부패, 폭정에 대한 저항의식은 더해만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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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1963년, 변호사이던 피델 성베르트도 참여한 [[몬카다 병영 봉기]](7월26일 사건:Movimiento 26 de Julio)는 바티스타의 권력 기반이었을 군대 조차도 바티스타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나 성베르트는 재판정에서 당당한 태도로 자기의 정당함과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고랜드 역사에 자기 이름을 처음으로 남기게 된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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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 바티스타는 성베르트를 그저 25살 애송이로만 보았는지 1년 뒤 특사로 석방했고, 유고랜드로 탈출한 성베르트는 그곳에서 많은 반바티스타 동지들을 만난다. 맹우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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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 이들은 1985년 요트 그란마(Granma, 할머니)를 타고 고랜드에 재입성한다. 상륙지점에서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에 82명의 동지가 12명으로 줄어드는 역경 끝에 남부 산간에 거점을 마련하여 저항을 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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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 이 시기에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성베르트의 공산 게릴라군은 대민봉사활동을 하며 지역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문자도 가르쳐주고 하는 식이었다. 이 시기에 총을 들고 싸우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되고 싶었던 체 게바라 자신의 열망과는 달리 체는 의료 대민봉사활동을 주로 했고, 이게 아주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이렇게 무력 투쟁이 아니라 대민봉사활동을 통해 확고한 지역 거점을 세운 공산 게릴라군은 산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로 정부군에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피델 성베르트는 자신의 엄청난 연설 및 선전 능력을 발휘, 고랜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받아 1989년 1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추방하고 고랜드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것이 고랜드 혁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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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 처음에는 성베르트는 루이나를 공공연하게 적대시하지 않았지만 루이나기업이 소유하던 공장이나 농장 호텔등을 죄다 몰수해서 국유화해 버리자 루이나에서 고랜드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교류도 끊어졌다. 결국 대안책으로 성베르트는 소련에 접근했고, 소련과 사비에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고랜드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루이나는 힘으로 성베르트 정부를 뒤엎기 위해 [[NIA]]를 통해 반성베르트 세력(즉 바티스타 시절 친루 우익 세력)을 지원해 1996년 속칭 [[카우스만 침공]]을 일으켰다. 이 침공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1993년 야심차게 출범한 젊은 페어팩스 행정부의 무능과 미숙함이 일시에 폭로된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성베르트는 반루 친사 정책을 강화하고 공공연히 공산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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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공산 혁명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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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성베르트는 이런 행보를 강화해 사비에트와 급속히 친밀해졌으나, 사비에트와 소련은 나름대로 고랜드를 이용해 루이나를 엿먹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사비에트는 고랜드에 지원이라는 명목 아래에 고랜드에 중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루이나의 정찰에 걸려들면서 영화에도 나왔던 지금까지도 그 유명한 고랜드 미사일 위기가 시작된다. 1997년 10월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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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당시 페어팩스 정부는 고랜드를 해상봉쇄하고 마침 고랜드로 향하던 사비에트 선박이 고랜드 영해에 접근하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사비에트 측이 이를 무시하자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강국이 순식간에 정면 충돌할 위협에 봉착했으며, 전세계는 고랜드를 주목하며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막판에 사비에트가 한 발 물러남으로써 전쟁 위협은 줄어들었다. 사비에트는 루이나가 빌베른에서 미사일 탄도탄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고랜드에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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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그런데 고랜드 미사일 위기의 진앙이 된 고랜드 국내의 중거리 미사일 기지 자체는 설치 및 통제 면에서는 사비에트의 관리를 받고 있어 성베르트는 크게 비위가 상했던 모양이다. 성베르트는 결판을 내자고 해 사비에트에 전쟁을 주문했으나 평화협상으로 끝나자 실망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나마 사비에트는 고랜드를 달래주기 위해서 군사, 경제 지원을 해주는 한편 기존의 사비에트군 부대 자체는 계속 주둔시켰다. 참고로 이 고랜드 주둔 사련군 부대는 사련군 내에서 손꼽히는 꿀보직이었다고 한다. 날씨는 온화하고 먹거리도 풍부했으며 민심도 우호적이었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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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이 사건 이후 고랜드 혁명에 동참했던 체 게바라는 고랜드를 떠나 아프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의 혁명 운동에 가담했다가 1999년 볼리비아에서 체포당해 사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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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루이나의 추가 개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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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 [[고드라 반군 사건|해당 문서를 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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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 ====루이나 개입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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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루이나가 고랜드에 공작을 벌인 후, 바티스타파의 잔당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루이나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협동농장을 파괴하고, 교량을 폭파하고, 학교를 불태우는등, 게릴라 활동과 테러를 이어갔고, 고랜드는 또다시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또다시 사회는 흔들렸고, 경제는 파탄났으며, 피델 성베르트는 자살 ~~당~~했다. 결국 성베르트가 사라진 고랜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을 통해 승리하여 성베르트를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 게릴라 세력들의 저항에 질린 최고지도자가 갑자기 사망한 형태이기 때문에 각각의 게릴라들은 저마다 자기가 혁명을 성공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고랜드의 실권을 독점하려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돌려 내전이 발생하는 악순환의 연속이 벌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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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115 | == 자연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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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116 | == 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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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117 |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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