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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공화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북산공화국 제5대 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
3대 대선
4대 부선
1960년 3월 15일
4대 대선
5대 부선
1960년 8월 12일
4대 대선
부통령제 폐지
투표율
97.01%
▲ 2.63%p
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득표율
100%
득표수
9,633,376
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득표율
79.19%
17.51%
득표수
8,337,059
1,843,758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1. 개요2. 특징
2.1. 부정선거 방식2.2. 부정선거 방식
2.2.1. 투표 단계2.2.2. 개표 단계
3. 결과
3.1. 대선 결과


1. 개요 [편집]

960년 5월 13일 치러진 부정선거. 이 사건으로 인해 3.15 의거와 4.19 혁명이 발발했다. 직전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승리했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하세가와 쇼이치가 사망할 경우 대통령직이 민주당 소속 부통령에게 승계된다는 것을 우려한 자유당에 의해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다.

특히 이 선거를 둘러싸고는 루이나가 자국에 우호적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정치권과 언론계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처럼 회자되고 있다.

2. 특징 [편집]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하세가와 쇼이치는 민주당 후보였던 이이누마 아키노리에게 도전을 받았으나, 선거 운동 기간 도중에 이이누마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결국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된 오카다 타츠오는 야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하세가와가 일방적인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선거에서는 오카다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를 누르고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개표 결과는 하세가와 504만 표, 오카다 약 216만 표, 그리고 이미 투표 당시 사망한 이이누마를 기리는 추모표가 약 185만 표가 나왔다. 이를 합산하면 하세가와는 전체 득표의 55.7%를 얻는 데 그쳤고, 약 44.3%의 유권자가 끝끝내 그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2대 대선에서 74.6%를 얻으며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고 믿었던 하세가와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 속에서 55.7%를 확보하며 승리한 것이니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하세가와와 자유당 입장에서는 “독식 구도”가 깨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성균관대학교의 서중석 명예교수는 1955년 전후로 불었던 ‘하세가와 숭배 운동’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제3대 대선을 앞두고 하세가와에 대한 찬양이 자유당 정권과 친여 세력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성되었고, 유력 야당 후보가 선거 도중 병사하는 호재까지 겹쳤음에도 유권자의 44%가 끝내 그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는 것이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전체 득표에서 친자유당 후보의 합계도 과반에 미달해 최소한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비판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그런데 제3대 대선 직후 실시된 1956년 8월 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예컨대 신린시의원 47명 가운데 40명이 민주당 소속이었고, 자유당은 단 1명만 당선됐다. 사회 곳곳에서 하세가와를 기리는 건물과 동상이 세워지던 와중에 나온 결과라, 하세가와의 심정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은 대선 직후부터 곧바로 차기 대선을 걱정해야 했다. 1958년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233석 중 127석을 차지하며 과반은 확보했으나, 민주당도 신린,후잔,로쿠 등 주요 도시에서 승리하며 개헌저지선 79석을 확보했다.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42.1%에 머물렀다. 불리해진 국면을 뒤집기 위해 자유당은 오카다 타츠오를 국가민주진보당 사건으로 제거했고, 언론을 탄압하며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발동했다.

이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는 내무장관 사이토 다카아키가 있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하세가와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선거에서 반드시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득표 공작을 점검하게 했고, 1959년엔 전국을 순회하며 직접 공무원들에게 자유당 후보 당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독려했다.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하세가와 쇼이치 대통령과 다카하시 요시후미 선생이 반드시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적이 있느냐? 법은 나중 일이고, 우선 당선부터 시켜 놓아야 한다. 콩밥을 먹더라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더라도 내가 간다. 이는 국가대업 수행을 위한 지시이니, 군수와 경찰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

— 사이토 다카아키, 군수 및 경찰서장들과의 모임에서 (출처: 북산 내무부 비밀 문건)
4할 사전투표: 선거 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한 표를 포함해 전체 유권자의 약 4할 정도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단위로 조장의 확인을 거쳐 투표하고,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인원들을 투표소 주변에 배치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유권자들이 자유당에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억지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내쫓는다.

— 당시 내무부가 하달한 구체적인 부정선거 행동 지침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면에 나선 인물이 바로 내무장관 사이토 다카아키였다. 그는 집권 이후 줄곧 하세가와 대통령의 ‘실행자’로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세계관은 단순했다. “정권은 곧 국가이고,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따라서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사이토는 제3대 대선과 지방선거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한 뒤, 단순한 국내 통제만으로는 정권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 조직을 확대하고, 공무원 친목회를 통해 매주 충성 맹세를 다짐하게 했지만 민심은 이미 이탈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젊은 층과 학생 운동의 성장세는 정권의 입장에서 불길한 징조였다. 사이토는 정권을 지탱할 수 있는 새로운 축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곧 그것이 루이나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959년 말, 그는 루이나 벨포르 주재 북산 공사관을 통해 루이나 당국과의 비밀 접촉을 개시했다. 외형상으로는 경제 협력과 기술 원조를 요청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 목적은 선거 관리·여론 조작·정보 활동에서 루이나의 노하우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하세가와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루이나 금융 네트워크를 통한 비밀 자금 지원 확보.

루이나 자문단이 제공하는 선거 관리·심리전 기법 도입.

루이나 정보기관을 통한 야당·학생 운동 세력 색출 및 약점 수집.

루이나 해군·공군의 북산 연안 훈련을 명목으로 한 위력 시위 전개.

하세가와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외세의 손을 빌리면 국부로서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사이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정권의 붕괴가 곧 국가의 붕괴라는 논리를 반복했고, 결국 대통령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루이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소규모 고문단이 입국하여 선거 관리 기구와 경찰 지휘부에 직간접적 자문을 제공했고, 신문·방송사 편집국에는 루이나식 심리전 기술이 스며들었다. 여론은 점차 인위적으로 조정되었고, 반대파의 목소리는 차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결코 무상으로 제공된 것이 아니었다. 사이토는 루이나와의 비밀 교섭 과정에서 막대한 국가 이권을 내주었다. 항만 사용권 일부가 루이나 해군에 개방되었고, 동부 산지의 광물 채굴권과 석탄·석유 탐사권이 루이나 기업에 넘어갔다. 철도·전력망·항만 건설 사업은 루이나가 사실상 독점했으며, 일부 공군기지와 해안 포대는 ‘공동 관리’라는 명목으로 루이나 군의 전초기지로 전락했다.

이권 양도의 폭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루이나 기업들은 북산 시장을 잠식했고, 북산군의 장비는 루이나 군수산업체가 공급하는 것으로 교체되었다. 사이토는 당내 회의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정권이 살아남지 못하면 이권도, 주권도 의미가 없다. 정권을 지켜야 백성도, 나라의 체면도 지킬 수 있다.”라며 이를 정당화했다.

정권 내부와 사회 전반에서는 곧 소문이 퍼졌다. “루이나가 선거를 관리하고, 사이토가 나라를 팔아넘겼다.” 언론은 이미 철저히 통제되어 공개 비판은 불가능했지만, 정계와 재계의 핵심 인사들은 속으로 분노를 쌓아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경찰의 감시망은 촘촘했고, 반대파 정치인은 체포되거나 가택연금당했다.

이후 치러진 선거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관리되었다. 투표소 설치부터 개표 과정, 여론 조정, 반대파 억압까지 루이나식 기술이 정교하게 반영되었다. 부정선거의 체계는 완벽해 보였으나, 그 뒤에 깔린 사실은 주권이 외세에 의해 갉아먹히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2.1. 부정선거 방식 [편집]

2.2. 부정선거 방식 [편집]

가능한 온갖 수법들이 총동원되었다. 다음은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입수한 부정선거 관련 문서에 나온 정황들이다.

2.2.1. 투표 단계 [편집]

  • 4할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함의 40% 정도를 하세가와 쇼이치, 다카하시 요시후미 표로 미리 채워놓고 시작했다. 선거 전에 미리 표를 넣거나 준비된 투표함으로 바꿔치기하는 등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억지 구실을 붙여 투표소에서 쫓아냈다.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 “선거가 끝났다”고 속이거나 협박, 납치, 폭행으로 내보냈다.
  • 3인조·5인조·7인조 투표: 유권자를 3~7명씩 한 조로 묶어 조장 확인 아래 투표하게 했다. 조장은 당연히 자유당 표를 찍게 강요했다.
  • 완장부대 압박: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에 배치돼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 뇌물 살포 및 협박: 막걸리, 고무신 등을 뿌리며 자유당 표를 사거나, “어깨”들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압력을 넣었다.
  • 빙글빙글 투표함: 투표함을 들고 한참 돌아다니다가 준비된 다른 투표함으로 바꿔치기했다.
  • 유령 유권자: 이미 사망했거나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이름으로 표를 행사했다.
  • 백지 투표지 채우기: 기표소에 연필과 지우개를 비치해 유권자가 나간 뒤 자유당 표를 새로 기표했다.
  • 집단 위임 투표: “문맹층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마을 대표가 주민 수십 명의 표를 대신 행사했다.
  • 투표소 폭주: 야당 강세 지역 투표소 앞에 차량을 늘어서게 해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게 했다.
  • 노인 위협 투표: “자유당 찍지 않으면 연금이 끊긴다”는 소문을 퍼뜨려 노인들을 겁주었다.
  • 이동 투표함: 공장에 투표함을 들고 가 관리자 입회 아래 집단 투표를 강요했다.
  • 결혼식 표 만들기: 혼인 신고가 되지 않은 청년 남녀를 급조로 부부로 등록시켜 투표권을 늘려냈다.
  • 유권자 바꿔치기: 야당 지지 성향 청년들을 경찰이 잡아가고, 그 이름으로 자유당 당원들이 투표했다.
  • 점심시간 매표: 노동자들에게 도시락과 막걸리를 나눠주며 “먹은 사람은 자유당에 표를 찍으라”고 강제했다.
  • 군인 강제 투표: 군인들이 장교의 감시 아래서만 투표하도록 하여 자유당 표를 강요했다.

2.2.2. 개표 단계 [편집]

  • 올빼미표: 밤중에 투표소에 잠입해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했다. 대낮에는 일부러 정전을 일으켜 어둠을 틈타 바꿔치기도 했다.
  • 피아노표: 매수된 검표원이 야당 표를 책상 밑으로 떨어뜨린 척하며,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 피아노 건반 치듯 도장을 찍어 무효표로 만들었다.
  • 샌드위치 개표: 다른 후보 표 뭉치 위아래에 자유당 표를 씌워 전부 자유당 표로 집계했다. 아예 검표조차 하지 않고 한 뭉치를 몽땅 자유당 표로 계산하기도 했다.
  • 주먹 개표: 개표장에서 야당 표를 발견하면 아예 주먹으로 구겨버리거나 불태웠다.
  • 뒷골목 개표: 정전을 핑계로 투표함을 끌고 나가 뒷골목에서 따로 개표해 전부 자유당 표로 만들었다.
  • 거꾸로 카운트: 집계표를 일부러 거꾸로 기입해 야당 표는 줄고 자유당 표는 늘어나게 했다.
  • 창의적 무효처리: 야당 표에 점 하나를 찍거나 종이를 찢어 무효표로 분류해 버렸다.
  • 묻지마 몰표: 첫 표와 마지막 표가 자유당 후보라면, 중간 표 뭉치 전체도 자유당 표로 처리해버리는 억지 논리를 사용했다.

3. 결과 [편집]

3.1. 대선 결과 [편집]

[1] 기호 1번 후지타 히로유키 후보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