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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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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콘스탄티노폴]] == 역사 == === 개관 === 콘스탄티노폴의 역사는 크게 로마 시대, [[빌베른]] 통치기, 도시국가 시대, 공화국 시대(1945~1970), 루이나 점령기(1970~1981), 군벌 시대(1981~1994), 그리고 루이나의 자치권 회복 선언 이후 현재까지로 나뉜다. 포르틸락해협 양안에 걸쳐 랜드해협 서부의 남북을 잇는 자리에 앉아 있는 탓에, 해협을 건너는 육로와 해협을 지나는 해상로가 모두 이 도시를 거쳐야 했고, 그 때문에 콘스탄티노폴은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가 탐내는 도시였다. 다만 이 도시의 역사를 관통하는 특징은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점보다, 그 누구도 이 도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로마는 철수했고, 빌베른은 손을 놓았으며, 공화국은 독재자에게 넘어갔고, 혁명정부는 스스로를 잡아먹었으며, 루이나는 점령만 하고 떠났다.[* 루이나의 역사학자 마르셀 D. 오브리는 이를 두고 "콘스탄티노폴은 정복하기 어려운 도시가 아니다. 정복하기는 쉽고, 책임지기는 불가능한 도시다"라고 평했다.] 현재의 무정부 상태는 이 반복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 고대와 로마 시대 === 도시의 기원은 기원전 7세기 무렵 그리스계 항해민이 해협 남안의 곶에 세운 교역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콘스탄티노폴의 공용어 가운데 그리스어가 남아 있고, 구시가의 오래된 지명 상당수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은 이 시기의 흔적이다. 초기의 거점은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물과 식량을 대고 통행료를 받는 소규모 항구에 불과했으나, 해협 북안의 내륙 부족들과 소금·곡물·가죽을 교환하는 중계무역이 자리 잡으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로마가 랜드해협에 진출한 뒤 이 도시는 속주 체제에 편입되었고, 해협 방어를 위한 함대 기지와 세관이 설치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로마의 랜드해협 속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꼽혔으며, 4세기 초 황제의 행차를 기념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이름이 이후 빌베른어식 '콘스탄티니예'와 현대의 '콘스탄티노폴'로 이어진다.[* 개칭 이전의 이름은 기록마다 표기가 달라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지에서는 흔히 '곶'을 뜻하는 옛말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5세기 들어 로마 본국의 사정이 악화되자 랜드해협의 군단은 차례로 본토로 소환되었고, 로마는 해협에서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다. 주둔군과 총독이 떠난 콘스탄티노폴은 순식간에 무주공산이 되었다. 한동안은 도시 원로원을 자처한 대지주와 선주들이 과두 자치를 이어갔으나, 성벽을 지킬 병력도, 해협을 지킬 함대도 없는 도시가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이 짧은 자치기는 이후 콘스탄티노폴 역사에서 되풀이될 '주인 없는 번영'의 첫 사례로 평가된다. === 빌베른 통치기 === ==== 병합 ==== 무주공산이 된 랜드해협 제2의 대도시를 차지한 것은 [[빌베른]]이었다. 빌베른 제1제국은 해협 동부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을 병합했고, 도시 원로원은 저항 대신 자치 특권의 일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었다. 빌베른은 도시를 '콘스탄티니예'로 개칭하고 총독부를 두었으며, 로마 시대의 함대 기지를 해협 요새로 개축해 포르틸락해협의 통행을 통제했다. 병합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유럽과 랜드해협을 잇는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 들어오는 모직물·금속 제품·포도주와 랜드해협 내륙에서 나오는 곡물·목재·광물이 이 도시의 부두에서 교환되었고, 빌베른은 해협 통행세와 관세만으로 해외 영토 전체의 행정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역할은 빌베른 제1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끊기지 않았고, 이후의 공화정 체제, 이른바 식민공화제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 바다 위의 궁정 ==== 빌베른 통치기의 콘스탄티노폴은 상업 도시인 동시에 빌베른 고위 귀족층의 휴양지였다. 해협을 내려다보는 언덕마다 왕족과 대귀족의 별궁과 정원이 들어섰고, 여름이면 본국의 궁정이 통째로 옮겨 온 듯하다 하여 '바다 위의 궁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현재도 도심 외곽에는 당시의 별궁과 정원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공화국 시기와 인민혁명정부 시기에는 관광 명소로 쓰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무장세력의 거점이나 피란민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별궁이 늘어나면서 아예 콘스탄티노폴에 눌러앉은 왕족도 생겨났다. 이들은 본국 왕가의 방계로서 도시의 언덕 지구에 영지를 두고 대대로 거주했는데, 현지에서는 이들을 '해협 분가(分家)'라고 불렀다. 해협 분가는 본국 정치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도시 안에서는 해상 귀족 및 대선주 가문과 혼인으로 얽히며 상당한 사회적 권위를 누렸다. 이들의 존재는 수백 년 뒤 독립 직후의 왕정복고 운동으로 이어진다. ==== 제국의 멸망과 식민공화제국 ==== 빌베른 제1제국이 멸망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뒤에도 콘스탄티노폴의 지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 공화국은 해외 영토를 포기하지 않았고, 식민부가 임명하는 총독이 도시를 통치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다. 왕가는 본국에서 정치적 권한을 잃었지만 콘스탄티노폴의 별궁과 영지는 사유재산으로 인정받았기에, 해협 분가를 비롯한 옛 왕족들은 오히려 본국보다 이 도시에서 더 왕족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이 시기 콘스탄티노폴은 사실상 '왕족이 사는 공화국 식민지'라는 기묘한 구조를 띠었다. 총독부는 공화국의 행정을, 언덕의 별궁은 옛 왕정의 권위를, 부두의 선주 가문은 실제 돈을 쥐고 있었고, 세 세력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해협 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 앞에서는 늘 타협했다. ==== 제1차 랜드대전쟁과 통제의 이완 ==== 그러나 빌베른 본국의 장거리 통치는 처음부터 효율이 떨어졌다. 본국에서 해협까지는 배로 수 주가 걸렸고, 총독부의 보고와 본국의 훈령이 오가는 사이 현지 사정은 이미 바뀌어 있기 일쑤였다. 이 구조적 약점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이 빌베른 공화정 수립 후 200여 년이 지나 벌어진 [[제1차 랜드대전쟁]]이었다. 빌베른은 이 전쟁을 해외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특히 랜드해 전투에서 해군이 사실상 괴멸하면서 해협 일대의 제해권을 잃었다.[* 당시 빌베른 해군은 랜드해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했고, 무역선 보호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노폴의 선주들은 이때부터 자체적으로 무장 호송선단을 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도시국가 수비대의 모체가 된다.] 함대가 없는 본국은 총독부에 병력도 예산도 보낼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행정적·군사적 통제는 급속히 느슨해졌다. 총독은 여전히 임명되었지만, 실제로는 부두의 선주 가문들이 동의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 도시국가 시대 === ==== 상인 연맹과 집정관 체제 ==== 본국의 통제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부두의 선주와 무역상들이었다. 이들은 '항만 상인 연맹'을 결성해 세관과 항만 사용료, 호송선단 운영을 공동으로 관리했고, 연맹 총회에서 무기한 임기의 집정관을 선출해 도시의 일상 행정을 맡겼다. 집정관은 연맹 총회의 만장일치 의결로만 해임할 수 있었기에 사실상 종신직에 가까웠으나, 반대로 연맹의 어느 한 가문이라도 등을 돌리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연맹의 핵심은 해협 무역을 양분하던 열두 선주 가문으로, 현지에서는 흔히 '열두 집'이라 불렀다. 집정관은 대개 열두 집 가운데 가장 힘이 약한 가문에서 뽑혔는데, 강한 가문 출신이 집정관이 되는 것을 다른 가문들이 모두 꺼렸기 때문이다.] 연맹은 빌베른 정부 및 옛 왕가와의 관계를 '우호적 분리'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빌베른의 영토로 남고 총독 역시 의례적으로 존속하지만, 도시의 재정과 행정, 방위는 연맹이 자율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본국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고, 해협 분가를 비롯한 옛 왕족들 역시 영지와 별궁을 보장받는 대가로 이를 받아들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빌베른이 통치 효율을 이유로 현 [[델라웨어]] 지역을 포기한 일이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과 빌베른 세력권을 잇던 육로가 끊겼고, 바닷길마저 제해권 상실로 불안정해지면서 본국과의 교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두어 세대가 지나자 도시에 남은 빌베른의 흔적은 언어를 제외하면 거의 퇴색했고, 콘스탄티노폴은 사실상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 해협의 번영 ==== 본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콘스탄티노폴은 범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연맹은 해협을 지나는 모든 상선에 동일한 통행료를 부과하는 대신 국적을 따지지 않았고, 이 '누구에게나 열린 해협' 원칙 덕분에 유럽 각국의 상선이 앞다투어 콘스탄티노폴을 기항지로 삼았다. 랜드해의 상업 루트를 사실상 장악한 이 도시는 빠르게 부를 축적했다. 특히 금융업과 해상보험업이 도시의 번영을 떠받쳤다. 연맹은 해상보험 분쟁만을 전담하는 해사 법정을 두어 판결의 신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보장했고, 예금주의 신원을 묻지 않는 무기명 예금을 허용해 각국의 자본을 끌어들였다.[* 특히 금융업과 해상보험업에서의 독자적 규제가 자본을 끌어들이는 주요 요인이었다. 또한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무기명 예금 제도는 훗날 스타투드라 정권의 비자금 은닉 창구로 악용되었다.] 이 시기 콘스탄티노폴의 보험 증권은 랜드해협은 물론 유럽 대륙의 항구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신용이 높았다고 한다. ==== 연합 체제의 동요 ==== 그러나 이런 연합 체제 아래의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은 연합이지, 매주 다투고 다음주엔 같이 술 마시는 수준의 유연한 체제였다.] 연맹은 본질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른 가문들의 느슨한 담합이었기에, 무역이 호황일 때는 서로 양보할 여유가 있었지만 불황이 닥치면 곧바로 제 몫을 챙기기 위한 다툼으로 번졌다. 19세기 후반 증기선이 보급되자 해협 무역의 구조 자체가 흔들렸다. 대형 증기선은 콘스탄티노폴에 기항할 필요 없이 해협을 통과해 버렸고, 통행료와 기항 수입에 의존하던 중소 선주 가문들이 잇따라 몰락했다. 살아남은 대가문들은 몰락한 가문의 선박과 부두를 헐값에 사들이며 더욱 비대해졌고, 부두 노동자들은 일감이 줄어든 상태에서 임금 삭감까지 떠안아야 했다. 20세기 초에는 부두 파업과 가문 간 무력 충돌이 해마다 되풀이되었으며, 연맹 총회는 집정관 선출조차 몇 달씩 합의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 균열을 더욱 벌려 놓았다. 교전국 상선의 발이 끊기면서 해협 무역은 급감했고, 명목상의 종주국인 빌베른이 전쟁에 휘말리자 콘스탄티노폴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논란도 커졌다. 교전국들은 콘스탄티노폴을 빌베른의 영토로 보아야 할지, 중립 도시국가로 보아야 할지를 두고 제각각의 태도를 취했고, 그 사이 도시의 선주들은 양측 모두와 거래하며 이익을 챙겼다. 전쟁이 끝났을 때, 콘스탄티노폴의 모호한 지위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데에는 도시 안팎의 의견이 모였다. === 독립과 공화정 수립 === ==== 1945년 독립 ==== 전쟁으로 국력이 바닥난 빌베른은 명목만 남은 해외 영토를 유지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다. 1945년 빌베른 정부와 항만 상인 연맹은 콘스탄티노폴의 주권을 도시에 이양하는 조약에 서명했고, 수백 년간 의례적으로 존속하던 총독직은 이로써 폐지되었다. 콘스탄티노폴은 국제법상으로도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곧바로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낳았다. 연맹은 기존 체제를 그대로 국가 체제로 격상하려 했지만, 몰락한 중소 가문과 부두 노동자, 전쟁 중 급증한 도시 빈민, 그리고 호송선단에서 출발해 어엿한 군대로 성장한 도시 수비대는 열두 집의 과두정을 더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해협 분가를 중심으로 한 옛 왕족 세력이 가세하면서, 신생국의 정체(政體)를 둘러싼 대립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 왕정복고 내전 ====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왕정파였다. 해협 분가의 방계 후손인 아달베르트 포르틸락 공을 옹립한 왕정파는 옛 왕가의 정통성을 내세워 콘스탄티노폴 왕국의 복고를 주장했고, 해협 분가와 혼인으로 얽혀 있던 해상 귀족 및 일부 도시 귀족이 이들을 지지했다. 연맹 내 대가문 일부도 과두정 유지가 어렵다면 차라리 왕정 아래서 기득권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뒤에서 자금을 댔다. 1946년 3월, 왕정파는 언덕의 옛 별궁 지구에서 포르틸락 공의 즉위를 선포했다. 이에 맞서 도시 수비대 지휘관 니키포로스 벨라스 대령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파는 '공화수호위원회'를 결성했고, 수비대 병력의 대다수가 공화주의파를 따랐다. 이후 14개월 동안 이어진 내전은 언덕의 별궁 지구와 부두 사이의 시가전으로 전개되었는데, 병력과 화력에서 앞선 공화주의파가 점차 언덕을 포위해 들어갔다. 1947년 5월 별궁 지구가 함락되면서 내전은 공화주의파의 승리로 끝났다. 왕정파는 사실상 전멸했고, 포르틸락 공을 비롯한 일부만이 [[루이나]]나 [[체르드]]로 망명했다.[* 사실상 전멸했고 일부는 루이나나 체르드로 망명했다. 루이나로 건너간 망명 왕정파는 이후 벨포르의 보수 정계와 연을 맺으며 콘스탄티노폴 역대 정권에 대한 루이나의 적대 여론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 내전으로 '바다 위의 궁정'의 별궁 상당수가 불타거나 무너졌고, 옛 왕족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었다. ==== 제1공화국의 출범 ==== 1947년 7월 공화수호위원회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콘스탄티노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헌법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해 의회가 수상을 선출하고 수상이 실권을 갖도록 했으며, 대통령은 의회가 간선하는 의례적 국가원수로 두었다. 이듬해에는 독자 화폐인 콘스탄디가 발행되었다. 초대 수상에는 내전을 승리로 이끈 벨라스가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정은 처음부터 불안했다. 내전에서 이긴 것은 수비대였지 공화주의 이념이 아니었고, 의회의 다수는 여전히 선주 가문의 돈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차지했다. 벨라스 정부는 전후 복구와 항만 재건에 힘썼으나, 복구 사업의 이권은 대부분 살아남은 대가문들에게 돌아갔고 부두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공화국'의 체계를 확립했지만, 그 실질은 과두정에 군복을 입힌 것에 가까웠다. === 스타투드라 정권 === ==== 집권 과정 ==== 제1공화국의 불안정을 자신의 권력으로 바꾼 인물이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1902~1959)였다. 부두 지구의 하역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스타투드라는 내전 당시 공화수호위원회의 후방 치안 책임자로 두각을 나타냈고, 1947년 벨라스 내각의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내무장관으로 재임한 9년 동안 경찰청장 임명권과 경찰 병력의 운영권을 한 손에 쥐었고, 이를 발판으로 정부 안팎에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쌓아 나갔다. 그 핵심이 1950년 무렵부터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 이른바 '서번트 갱'이었다. 스타투드라는 연설 때마다 "나는 공화국의 종복일 뿐"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그를 따르는 부두 건달과 제대 군인, 실업자들이 스스로를 '종복'이라 부르면서 바깥에서는 이들을 서번트 갱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번트 갱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부두 파업을 폭력으로 분쇄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경찰은 이들의 폭력을 사실상 묵인했다.[* 1952년 대부두 파업 당시 서번트 갱이 파업 지도부 11명을 집단 폭행해 3명이 사망했으나, 기소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경찰 보고서에는 '노동자 간의 우발적 충돌'로 기록되었다.] 1956년 1월 벨라스 수상이 급서했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당시부터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한 달 뒤 의회는 스타투드라를 제2대 수상으로 선출했는데, 표결 당일 의사당 주변을 서번트 갱 수백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후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 일당독재의 확립 ==== 스타투드라는 집권 초기부터 정치깡패 조직인 서번트 갱과 정부 내 비밀경찰을 동원해 야당과 언론을 숙청했다. 1956년 9월 공포된 「국가안정특별법」은 '공화국의 안정을 해치는 결사'를 해산할 권한을 수상에게 부여했고, 이 법에 따라 야당 세 곳이 해산되었다. 같은 법으로 신문사는 17개에서 2개로 통폐합되었으며, 남은 두 신문의 편집국장은 모두 내무부가 추천한 인물로 채워졌다. 비밀경찰의 중심은 내무부 특별조사과였다. 영장 없는 구금 권한을 부여받은 특별조사과는 부두 지구의 옛 세관 창고를 개조한 청사를 썼는데, 창고 벽이 회색 석재였던 탓에 시민들은 이곳을 '회색 창고'라 불렀다. 회색 창고에 끌려간 사람은 대개 돌아오지 못했고, 해협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폴의 경찰청장 임명권과 병력 운영권을 직접 장악했으며, 재임 중 시민 실종건만 4천 건이 넘는다. 1959년 혁명 이후 회색 창고에서 발견된 구금 대장에 기록된 인원만 4,212명이었고, 대장에 오르지 않은 인원까지 합치면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에는 의례적 국가원수였던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스타투드라는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은 채 수상이 대통령 직무를 겸임하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곧 수상 관저를 대통령궁으로 옮겼다. 1958년 11월 총선에서는 여당인 국민질서당이 의석 100석 가운데 94석을 차지했는데, 선거 당일 투표소마다 서번트 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가 되었다. ==== 외자 유치와 플라자 그룹 ==== 스타투드라 정권은 외국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단기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정권은 법인세를 사실상 면제하고 도시국가 시절의 무기명 예금 제도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폴을 랜드해협의 조세 피난처로 만들었으며, 항만과 광산의 개발권을 외국 기업에 헐값으로 넘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7년 루이나의 광산회사 [[플라자 그룹]]이 따낸 남부 타우로 산지의 희귀광물 채굴권이었다. 계약 기간은 60년, 정부가 받는 채굴료는 생산액의 3%에 불과했다. 외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1957년과 1958년의 성장률은 수치상으로 두 자릿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윤은 정권 핵심부와 대가문, 외국 기업에 집중되었고, 광산과 항만의 일자리는 서번트 갱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선 배정되었다. 실업률과 빈곤율은 오히려 점차 상승했으며, 1958년 겨울에는 빵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부두 지구와 북부 빈민가를 중심으로 번졌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은행과 기업들은 이 시기 스타투드라 정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고, 이 관계는 훗날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를 끝까지 적대하는 배경이 된다. ==== 몰락 ==== 빵값 시위를 서번트 갱과 경찰로 진압하면서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정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겼다. 외자 이권의 배분을 두고 대가문과 정권 핵심부가 대립했고, 서번트 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수비대 출신 장교들은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스타투드라는 경쟁자로 떠오른 군 장성 두 명을 1958년 말 반역 혐의로 체포했는데, 이 조치는 오히려 군 내부의 이반을 결정적으로 부추겼다. 1959년 초에 이르러 정권을 지키는 것은 서번트 갱과 회색 창고뿐이었다. === 신보석운동과 인민혁명정부 === ==== 신보석운동 ==== 스타투드라 정권에 맞선 세력의 구심점은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었다. 신보석운동은 1954년 변호사 레안드로스 모라이티스(1921~1969)가 부두 노조 활동가, 내륙 농업협동조합 운동가, 교사들과 함께 결성한 조직으로, 이름은 도시국가 시절 콘스탄티노폴을 부르던 별칭인 '해협의 보석'에서 따왔다. "이 도시의 보석은 열두 집의 금고가 아니라 이 도시의 사람들"이라는 창립 선언문의 문구처럼, 해협의 부를 소수의 손에서 되찾아 오자는 것이 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모라이티스는 빌베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인물로, 1952년 대부두 파업 재판에서 노동자들의 변론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신보석운동은 처음에는 합법적인 사회운동 단체로 활동했으나, 1956년 「국가안정특별법」으로 해산 명령을 받은 뒤 지하로 들어갔다. 이후 3년간 신보석운동은 부두 노조와 내륙 협동조합을 거점으로 조직을 넓혔고, 1958년부터는 정권에 등을 돌린 수비대 출신 청년 장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 3월 혁명 ==== 1959년 3월 13일 새벽, 신보석운동의 무장대 46명과 이들에 합류한 수비대 장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군은 먼저 국영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혁명을 선포했고, 이어 북부 병영을 무혈 점령한 뒤 대통령궁으로 진격했다. 이 병영 점령을 지휘한 인물이 훗날 인민군 사령관이 되는 야니스 브론다키스 소령이었다. 방송을 들은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서번트 갱과 경찰은 사실상 저항을 포기했고, 대통령궁은 그날 정오를 넘기기 전에 함락되었다. 스타투드라는 대통령궁 뒤편의 옛 궁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붙잡혔다. 혁명재판소는 3월 20일 그에게 반역과 살인 교사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고, 이튿날 스타투드라와 측근 6명이 처형되었다. 나머지 측근과 국민질서당 간부들은 처형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서번트 갱은 해산되었지만 조직원 대부분은 처벌을 피해 흩어졌다.[* 흩어진 서번트 갱 조직원 가운데 상당수는 이후 밀수와 고리대금업으로 명맥을 이었고, 루이나 점령기와 군벌 시대에 이르러 다시 무장 조직의 형태로 등장한다.] ==== 인민혁명정부 ==== 1959년 3월 25일, 신보석운동은 모라이티스를 수상으로 하는 '콘스탄티노폴 인민혁명정부'를 선포했다. 혁명정부는 곧바로 1947년 헌법을 정지시키고 부정선거로 구성된 기존 의회를 해산했으며, 빌베른식 의회주의를 "식민 유산의 잔재"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발표된 임시헌장에는 "민주주의란 다수가 굶는 것에 투표하는 체제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대신 구역별 인민위원회와 노조·협동조합 대표로 구성된 인민자문회의가 입법을 대신했다. 다만 혁명정부는 헌정의 연속성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해산된 의회의 의장직만은 남겨 두고, 스타투드라 정권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원로 공화주의자 안셀모 페드레로에게 이를 맡겼다. 페드레로는 실권이 전혀 없는 명예직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혁명정부가 헌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정지했을 뿐"임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다. 이 어정쩡한 자리는 10년 뒤 루이나 개입의 명분 논쟁에서 뜻밖의 역할을 하게 된다. 혁명정부는 복지 중심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우선 인민상공회의소를 설립해 열두 집이 쥐고 있던 항만 사용권과 수출입 허가를 한데 모았고, 중소 상인과 협동조합에도 허가를 개방했다. 1960년에는 「국민의료법」으로 무상의료를 도입해 구역마다 인민 진료소를 세웠으며, 교사와 대학생을 빈민가와 내륙으로 보내는 문맹 퇴치 운동을 벌여 문맹률을 1959년 38%에서 1968년 9%까지 끌어내렸다. 관광산업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방치되었던 별궁 유적을 정비해 관광지로 개방했고, 1965년에는 남부 에스테리 곶에 대형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 건설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덕분에 혁명정부는 초기에 높은 지지를 받았다. ==== 승인 문제와 광산 국유화 ==== 그러나 주변국들은 무장 봉기로 들어선 혁명정부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에 난색을 보였다. 이 태도는 오래가지 않아, 혁명정부가 대외 채무를 승계하고 외국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1961년까지 랜드해협 국가 대부분이 차례로 승인했다. 끝까지 승인하지 않은 것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뿐이었다. 특히 루이나는 스타투드라 시기부터 이어져 온 자본 투자 관계 때문에 혁명정부에 적대적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0년 7월의 타우로 광산 국유화였다.[* 루이나의 광산회사인 플라자 그룹은 콘스탄티노폴 남부의 희귀광물 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해당 광산은 곧 국유화 대상이 되었다. 혁명정부는 1957년 계약이 뇌물로 체결된 무효 계약이라며 보상을 거부했다.] 플라자 그룹의 로비를 받은 루이나 정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 정부의 루이나 내 자산을 동결했고, 196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산 물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었기에 그 타격은 컸다. 혁명정부는 그 빈자리를 [[사비에트]]와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원조로 메웠고, 이 선택은 루이나의 적대감을 더욱 굳혔다. ==== 고립과 내부 분열 ==== 1960년대 중반, 혁명정부는 주변국인 [[체르드]] 공화국의 좌파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이를 계기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1966년에는 혁명정부의 몇 안 되는 우방이던 라 마베라 지역의 좌파 정권이 붕괴하면서 콘스탄티노폴은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루이나의 금수 조치로 관광객은 발길을 끊었고, 건설 중인 에스테리 곶 공항은 공산권의 자재와 기술자 없이는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67년부터는 설탕과 식용유, 연료가 배급제로 바뀌었다. 이 와중에 정부 내부의 분열도 심화되었다. 부수상 디미트리 사카렐리스는 사비에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신보석운동의 이론가로, 당내에 '혁명이론연구회'라는 이름의 계파를 조직해 세를 불렸다. 사카렐리스는 모라이티스의 개혁을 '반(半)혁명적 타협'이라 비판하면서 항만과 토지의 전면 집산화, 공산권과의 동맹 명문화 등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요구했다. 반면 모라이티스는 관광과 해운으로 먹고사는 작은 나라가 한쪽 진영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보았다. 1968년 9월 신보석운동 중앙위원회는 모라이티스와 사카렐리스가 권력을 나누는 '공동지도체제'안을 표결에 부쳤다. 모라이티스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몇 주 뒤 입장을 번복했고, 사카렐리스 계파는 이를 "당의 결정에 대한 개인의 반역"이라 몰아붙였다. 이듬해 봄에 이르자 혁명정부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쪼개져 있었다. 수상실은 모라이티스를, 중앙위원회와 인민군은 사카렐리스를 따랐다. === 4월 쿠데타와 10월 학살 === ==== 4월 쿠데타 ==== 1969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 인민군 사령관 야니스 브론다키스는 사카렐리스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민군 병력은 새벽에 모르나 언덕의 수상 관저를 포위했고, 모라이티스 수상은 저항 없이 관저에 감금되었다. 국영 라디오는 그날 아침 "수상은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를 쉬며, 당 중앙위원회가 국정을 맡는다"는 짤막한 발표만을 내보냈다. 10년 전 3월 혁명 당시 북부 병영을 점령해 혁명의 문을 연 장교가, 이번에는 그 혁명의 지도자를 가둔 셈이었다. 쿠데타 이후 사카렐리스 계파는 모라이티스를 따르던 각료들을 차례로 해임하고, 남아 있던 유일한 비(非)당 기관지를 폐간했다. 배급은 더욱 줄어들었고 구역 인민위원회는 당 중앙의 지시를 전달하는 창구로 전락했다. 모라이티스가 감금된 반년 동안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퍼져 나갔다. 루이나는 이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루이나 정부는 혁명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지만, 모라이티스가 사카렐리스보다는 훨씬 다루기 쉬운 상대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루이나는 체르드 정부에 모라이티스 수상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체르드는 내정 불간섭과 작전 위험을 이유로 거절했다.[* 체르드가 불과 몇 년 전 자국을 공개 비판했던 인물을 구출하는 데 병력을 걸 이유는 없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 10월 19일 ==== 1969년 10월 19일, 모라이티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 봉기가 발발했다. 부두 노조의 총파업 선언을 신호로 3만여 명의 군중이 모르나 언덕으로 몰려갔고, 관저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군중에게 총을 겨누지 못한 채 길을 비켜 주었다. 풀려난 모라이티스는 군중과 함께 해안의 올드 파로스 요새로 향했다. 인민군 사령부가 있던 이 요새를 되찾아 군을 장악하고, 방송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계산이었다. 요새의 수비대는 싸우지 않고 무장을 해제했다. 그러나 오후 1시 무렵 북부 병영에서 출동한 장갑차 3대가 요새 앞에 도착했다. 장갑차는 경고 없이 요새 안뜰의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피하려던 사람들이 요새의 성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렸다. 요새를 다시 장악한 병력은 모라이티스와 각료 7명, 부두 노조 지도자 2명을 안뜰 벽 앞에 세워 총살했다. 군이 봉기를 진압하다가 지도자들을 총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도자들을 총살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총살 명령이 사카렐리스에게서 나온 것인지, 현장 지휘관의 독단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카렐리스는 이후 재판에서 "중앙위원회는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지시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모라이티스와 각료들의 시신은 북부 병영에서 소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평의회가 발표한 민간인 사망자는 17명이었으나, 이후의 조사에서는 적게는 40명, 많게는 12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다로 뛰어내린 뒤 실종된 사람이 많아 정확한 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 혁명군사평의회 ==== 그날 저녁, 브론다키스와 사카렐리스는 '혁명군사평의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평의회 의장은 브론다키스가 맡았고, 사카렐리스는 공식 직함 없이 '정치위원'으로서 평의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평의회는 96시간 동안의 전면 통행금지를 선포하면서 위반자는 경고 없이 사살한다고 발표했고, 이 기간 동안 거리에는 인민군 순찰대 외에 아무도 다닐 수 없었다. 평의회는 곧이어 혁명정부 시절 헌정 연속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던 국회의장 안셀모 페드레로를 체포해 가택연금하고, 모라이티스 계열 인사 수백 명을 구금하는 등 시민 통제를 강화하였다. 불과 반년 만에, 콘스탄티노폴은 스타투드라 시절보다도 더 폐쇄된 나라가 되었다. === 루이나의 침공 === ==== 개입 결정 ==== 10월 19일의 총살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나는 즉시 움직였다. 루이나 국가안보회의는 긴급특별상황팀을 구성했고, 이튿날인 10월 20일 상황팀은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잭슨 대통령은 이를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10월 22일부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루이나는 공동체 차원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사비에트와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들은 이를 '제국주의 침략의 포장'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11월 4일 아무런 결론 없이 결렬되었다. 실제 침공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몇 가지 사정이 겹쳤다. 첫째, 11월부터 3월까지의 포르틸락해협은 겨울 폭풍과 짙은 해무 때문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둘째, 콘스탄티노폴에는 의과대학 유학생 410명을 포함해 약 2,300명의 루이나인이 체류하고 있었고, 성급한 개입은 이들을 인질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셋째, [[루이나 의회]] 안에서도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선전포고 없는 무력개입에 반대했고, 여당인 공화연합 내부에서도 신중론이 적지 않았다.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1970년 3월 에스테리 곶 공항의 활주로가 부분 개통되자 곧바로 사비에트의 수송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루이나 정부는 이 공항이 공산권의 군사 공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항의 활주로 길이는 대형 여객기 운항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었고, 수송기가 실어 나른 화물의 대부분은 공사 자재였다는 사실이 이후 확인되었다. 다만 루이나 측은 지금도 "공항의 용도는 활주로가 아니라 누가 쓰느냐로 결정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어 4월 17일 평의회가 루이나 국적의 의대 유학생 29명과 해상보험사 직원 7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면서,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게 되었다. 1970년 5월 6일 잭슨 대통령은 최종 작전 명령에 서명했다. 루이나 의회에는 작전 개시 2시간 전에야 통보가 이루어졌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후 공개된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루이나 외무부는 콘스탄티노폴 남항구의 통제권을 '전략적 안보지대'로 명시해놓고 있었다.] 개입의 법적 근거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루이나 정부는 침공 직후, 가택연금 중이던 페드레로 의장이 작전 전날인 5월 7일 자로 루이나에 개입을 요청한 서한을 공개했다. 혁명정부가 헌정의 연속성을 보여 주려고 남겨 둔 명예직이, 역설적으로 그 혁명정부를 무너뜨리는 외국 군대를 부르는 법적 근거가 된 것이다. 페드레로 본인은 서한을 직접 작성했다고 확인했으나, 서한이 실제로 작전 이전에 작성되었는지, 연금 상태에서 어떻게 루이나 측에 전달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해명되지 않았다. ==== 새벽 파수 작전 ==== 결국 1970년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다. 작전명은 '새벽 파수 작전(Operation DAWN WATCH)'이었다. 루이나군 가운데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진 해군이 작전 계획을 주도했고, 표적 정보는 해군정보부가 제공했다. 투입 병력은 항공모함 1척을 포함한 함정 42척의 해군 제2함대, 해병대 2개 여단, 육군 제3공정여단, 그리고 서쪽 국경을 넘어 육로로 진격할 육군 제11기계화사단 등 모두 3만 8천여 명이었다. 이에 맞선 혁명군사평의회의 병력은 인민군 정규군 1만 9천여 명과 인민민병대였다. 민병대는 서류상 4만 명이었으나 실제로 동원된 인원은 1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상당수는 소총 한 자루와 탄약 몇 발만 지급받은 상태였다. 이 밖에 사비에트 군사고문단 약 180명과 공항 건설 기술자 600여 명이 콘스탄티노폴에 머물고 있었다. 작전 첫날, 해병 제1여단이 남항구에 상륙해 부두와 세관 구역을 장악했고, 제3공정여단은 에스테리 곶 공항에 강하해 오전 7시 반까지 활주로를 확보했다. 공항에 있던 사비에트 기술자들은 그대로 억류되었다. 같은 시각 제11기계화사단은 서쪽 국경을 넘어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5월 9일에는 에스테리 곶 캠퍼스의 기숙사에서 루이나 유학생 381명이 헬기로 구출되었고, 이튿날 해병 수색대가 인민보안부 청사를 급습해 구금되어 있던 36명을 전원 구출했다. 전투는 예상보다 순조로웠지만 오점도 남았다. 5월 11일 해군 함재기가 인민군 대공 진지로 오인한 북부의 요양병원을 폭격해 환자 21명이 숨졌다. 5월 12일에는 평의회 본부가 있던 올드 파로스 요새가 함락되었는데, 7개월 전 모라이티스가 총살당한 바로 그 요새였다. 루이나 정부는 요새 안뜰에서 희생자 추모식을 열었고, 이 장면은 루이나 국내에 개입의 정당성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북부 병영과 구시가 일대에서 벌어졌다. 인민군 잔존 병력과 민병대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구시가에 틀어박혀 저항했고, 루이나군은 포병과 함포 사격으로 구역을 하나씩 밀어내며 전진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시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5월 17일 평의회 의장 브론다키스가 별궁 유적의 지하 저장고에서 붙잡혔고, 사카렐리스는 5월 20일 북부 해안의 어촌에서 어선을 타고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11년 전 스타투드라가 대통령궁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힌 것과 판박이였다는 점에서, 콘스탄티노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 나라 권력자들은 끝이 오면 다들 바다부터 찾는다"며 비꼬았다.] 5월 29일, 잭슨 대통령은 해협에 정박한 제2함대 기함에 올라 "콘스탄티노폴에서의 주요 전투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3주간의 교전 끝에 루이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기간 루이나군은 406명이 전사하고 1,870명이 부상했으며, 콘스탄티노폴 측은 군인 약 3,100명과 민간인 약 2,4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억류된 사비에트 고문단과 기술자들은 7월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잭슨의 기함 연설은 당시에는 승리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점령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루이나에서는 '5월 29일식 승리'라는 말이 섣부른 승리 선언을 비꼬는 관용구로 쓰인다.] 혁명정부는 해산되었고, 사카렐리스와 브론다키스는 1971년 루이나가 설치한 특별법정에서 모라이티스 살해와 10월 19일 학살의 책임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민정이양위원회'를 설치하여 사실상 보호령 체제를 가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전투의 종료'였을 뿐 '전쟁의 종결'은 아니었다. === 점령과 수렁 === ==== 민정이양위원회 ==== 1970년 6월 2일 출범한 민정이양위원회는 해군 중장 필리프 A. 들로름을 초대 위원장으로 했고, 8월부터는 민간인 위원장 체제로 바뀌었다. 위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혁명정부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6월 9일 공포된 위원회 명령 제1호는 신보석운동 당원의 공직 취임을 금지했고, 6월 14일의 명령 제2호는 인민군과 인민보안부, 인민민병대를 해산했다. 이 두 명령은 점령 초기 최대의 실책으로 꼽힌다. 혁명정부 10년 동안 공무원과 교사, 인민 진료소의 의사가 되려면 사실상 당원이어야 했기 때문에, 명령 제1호로 공직에서 쫓겨난 사람은 4만 3천여 명에 달했다. 하룻밤 사이에 학교와 진료소, 배급소를 운영할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명령 제2호로 해산된 인원은 서류상의 민병대까지 합쳐 12만 명에 이르렀는데, 위원회는 이들의 무기를 회수하는 절차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고, 자진 반납된 무기는 추정 보유량의 11%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루이나는 총을 가진 채 일자리와 연금을 동시에 잃은 수만 명의 남자들을 거리로 내보낸 셈이 되었다. 같은 시기 도시 곳곳에서는 약탈이 벌어졌다. 루이나군은 남항구와 석유 저장소, 에스테리 곶 공항에는 병력을 배치했지만, 국립문서고와 옛 총독부 공문서고에는 경비병 한 명 두지 않았다. 5월 하순 나흘 동안 두 문서고는 약탈당한 뒤 불탔고, 빌베른 통치기부터 공화국 시기까지의 행정 기록 대부분이 이때 소실되었다.[* 오늘날 독립 이전 콘스탄티노폴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1차 사료가 극히 드문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빌베른 본국에 보관된 사본이나 해외로 반출되었던 문서가 대부분이다.] 시민들은 전기와 수도, 식량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방치되었다. 침공 당시의 포격으로 도시 최대의 발전소가 파손되었고, 혁명정부가 운영하던 배급망은 명령 제1호로 그 운영자들이 모두 쫓겨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1970년 여름 콘스탄티노폴에서는 하루 전기 공급이 4시간을 넘는 구역이 거의 없었고, 빵 한 덩이 값이 두 달 만에 여섯 배로 뛰었다. ==== 자치정부의 급조 ==== 기동전 중심의 작전으로 도시의 요충지들을 선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점령 이후의 병력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전후 재건을 위한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루이나 정부의 목표는 처음부터 '빨리 넘기고 빨리 빠지는 것'이었다. 침공에 투입된 3만 8천여 명의 병력은 이듬해 6월까지 1만 4천 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1970년 11월 16일, 루이나는 그 상태를 '자치의 시작'이라며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를 급조해버렸다.[* 해당 정부는 루이나 국무부 외교안보국 직속의 임시통치위원회가 관할했으며, 초대 행정관은 벨포르 출신 전직 외교관 앙드레 P. 르쿠르브였다. 르쿠르브는 콘스탄티노폴의 공용어를 하나도 구사하지 못해 모든 업무를 통역을 거쳐 처리했다.] 자치정부의 각료와 고위 관료는 대부분 루이나에서 돌아온 망명객들로 채워졌다. 1947년 내전에서 패해 루이나로 건너간 왕정파의 후손, 그리고 3월 혁명 이후 추방된 스타투드라 정권의 관료들이었다. 시민들이 보기에 자치정부는 한 번은 내전으로, 한 번은 혁명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돌아온 정부였다. 루이나군과 자치정부는 남항구와 옛 세관 구역 일대를 장벽과 검문소로 둘러싼 '남항구 안전지대'에 틀어박혔다. 루이나 외무부의 비밀 문서가 '전략적 안보지대'로 지목했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안전지대 안에는 24시간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되었고, 시민들은 이곳을 '유리 상자'라고 불렀다. 밖에서는 안이 훤히 보이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 저항의 시작 ==== 이 막장스러운 전후 처리는 곧바로 시민 저항을 낳았다. 도심에 몰려든 저항세력은 루이나군이 퇴각한 구역을 중심으로 무장했고, 특히 수복되지 않은 외곽 지역은 사실상 국경이 무너진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다. 초기 저항의 주축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해산된 인민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결성한 '해협 수호대'로, 혁명군사평의회에 충성했다기보다는 명령 제2호로 모든 것을 잃은 직업 군인들의 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라이티스를 따르던 신보석운동 온건파가 만든 '3월 13일 운동'이었다. 이들은 모라이티스를 죽인 평의회를 증오했지만, 그 평의회를 무너뜨린 루이나의 점령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혁명의 적과 혁명의 배신자가 같은 편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저항세력은 정면 교전 대신 도로변 사제폭탄과 저격, 기지를 향한 박격포 기습에 주력했다. 특히 남항구와 에스테리 곶 공항을 잇는 7번 도로는 루이나군의 보급 차량이 매일같이 폭탄에 당하면서 병사들 사이에서 '과부의 길'이라 불렸다. 1971년 10월 3일에는 폭약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해병대 숙영지로 돌진해 해병 71명이 한꺼번에 숨졌다. 점령 기간을 통틀어 루이나군이 하루에 입은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루이나군은 통행금지와 가택 수색, 대량 검거로 대응했지만, 한 번 수색이 휩쓸고 간 동네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저항세력이 생겨났다. 검거된 사람의 가족과 이웃이 다음 달의 무장대원이 되었다. 1972년에 이르자 루이나군은 병력 부족 탓에 외곽 구역에서의 상시 순찰을 포기했고, 순찰이 끊긴 구역은 그대로 무장세력의 차지가 되었다. ==== 외부 세력의 유입 ==== 순찰이 끊긴 외곽은 곧 국경 그 자체가 무너진 공간이 되었다. 혁명정부 시절의 국경경비대는 명령 제2호로 해산되었고, 자치정부는 국경을 지킬 병력을 끝내 조직하지 못했다. 그 틈으로 온갖 이국의 깡패, 범죄조직, 무장세력들이 국경 없는 콘스탄티노폴로 유입되었다. 무기상은 무기를 팔러, 밀수업자는 새 판로를 찾아, 인신매매 조직은 전쟁이 만들어 낸 고아와 피란민을 찾아 들어왔다. 3월 혁명 때 흩어졌던 서번트 갱의 잔당도 이 무렵 '종복회'라는 이름의 밀수 조직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이 [[유고랜드]] 출신 갱스터 벨미르 카라즈다(1938~1979)가 이끌던 '정화전선'이었다. 카라즈다는 유고랜드의 항구도시에서 밀수와 청부 폭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범죄자로, 1964년 살인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극단적인 순수주의 교리에 빠져들었다. 1970년 출소한 그는 부패한 세계를 '불로 정화'해야 한다는 교리를 내세워 추종자를 모았고, 1972년 초 3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동부 외곽을 통해 콘스탄티노폴에 들어왔다. 정화전선은 콘스탄티노폴을 단순한 전장이 아니라 외국인 전투원을 받아들여 훈련시키는 수용·양성소로 활용했다. 랜드해협 각지와 그 너머에서 온 지원자들이 외곽의 버려진 별궁과 공장 지대에 차려진 캠프에서 폭탄 제조와 시가전을 배웠고, 이들 중 상당수가 곧바로 콘스탄티노폴의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 시기 정화전선의 캠프를 거친 외국인 전투원들이 이후 랜드해협 각지로 흩어져 도시형 무장조직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콘스탄티노폴이 '무장조직의 사관학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정화전선은 외국인 납치에도 손을 댔는데, 1973년 한 해에만 루이나인 기술자와 구호단체 직원 등 외국인 19명을 납치했고, 이 가운데 몸값 협상이 결렬된 7명을 처형한 뒤 그 사진을 외국 통신사에 보냈다. 이들 세력은 단순히 루이나를 적대하는 것을 넘어서, 콘스탄티노폴 내의 각 무장세력들을 교묘히 충돌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카라즈다가 보기에 루이나군은 언젠가 떠날 존재였고, 그가 원한 것은 루이나가 떠난 뒤 서로를 증오하는 세력들로 산산조각 난 도시였다. 정화전선의 폭탄은 루이나군 기지보다 시장과 버스 정류장, 장례 행렬을 더 자주 노렸다. ====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와 구역 전쟁 ==== 정화전선이 파고든 틈은 콘스탄티노폴인과 혼혈계 주민 사이의 오래된 균열이었다. 혼혈계는 도시국가 시절부터 랜드해협 각지에서 흘러든 부두 노동자들의 후손으로, 남항구 인근의 칼라미 구역에 모여 살았다. 루이나는 자치정부의 경찰과 방위대를 모집하면서 구 정권과 연줄이 적은 혼혈계를 우선 채용했는데, 콘스탄티노폴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점령군의 앞잡이'를 따로 기르는 것으로 보였다. 반대로 혼혈계 주민들은 저항세력의 폭탄이 자신들의 구역에 집중되는 것을 콘스탄티노폴인들의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1974년 2월 22일, 장이 서는 금요일 오전의 칼라미 시장 한복판에서 폭약을 실은 트럭이 폭발했다. 211명이 숨지고 400명 이상이 다쳤다. 현장에는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콘스탄티노폴인 무장조직 명의로 "칼라미의 배신자들에게 경고한다"는 전단이 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조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테러가 정화전선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은 1979년 카라즈다가 사망한 뒤 그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문서에는 폭탄 트럭의 경로와 전단 문구의 초안이 적혀 있었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5년이 걸렸지만, 보복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혼혈계 청년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인근의 콘스탄티노폴인 구역을 습격했고, 콘스탄티노폴인 민병대는 혼혈계 주민을 겨냥한 보복으로 응수했다.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이 연쇄 보복을 '구역 전쟁'이라 부른다. 매일 아침 해협에는 손이 묶인 시신이 떠올랐고, 도로 곳곳에 무장세력이 세운 가짜 검문소에서는 신분증에 적힌 이름과 말투 하나로 생사가 갈렸다. 시민들은 검문소를 지나는 구역에 따라 꺼내 보일 신분증을 두 장씩 들고 다녔다. 구역 전쟁은 도시의 인구 지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섞여 살던 동네는 한쪽 주민만 남은 동네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70만 명 이상이 집을 떠나 피란민이 되었다.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1975년 한 해에만 약 1만 9천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나군은 구역과 구역 사이에 콘크리트 장벽을 세워 충돌을 막으려 했고, 1976년 말까지 세워진 장벽의 길이는 42km에 달했다. 장벽은 충돌을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도시의 분열을 콘크리트로 굳혀 버렸다. ==== 특무처와 '더러운 전쟁' ==== 구역 전쟁이 한창이던 1975년, 루이나에게는 콘스탄티노폴에 병력을 늘릴 여력이 없었다. 그해 가을 [[청북전쟁]]에서 회색의 불꽃 작전이 시작되면서 루이나군의 병력과 예산의 우선순위는 그쪽으로 넘어갔고, 콘스탄티노폴은 루이나 언론에서조차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잊힌 전쟁'이 되었다. 증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루이나가 택한 것은 적은 병력으로 판을 흔드는 비밀 공작이었고, 그 일을 맡은 것이 국방부 [[특무처]]였다. 특무처의 공작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는 저항세력과 싸울 '협력 민병대'의 육성이었다. 특무처는 칼라미의 혼혈계 자경단과 저항세력에 원한을 가진 일부 콘스탄티노폴인 민병대에 무기와 자금을 대 주었는데, 이 민병대들은 저항세력뿐 아니라 상대 공동체의 민간인에게도 그 무기를 썼다. 구역 전쟁의 사망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루이나가 무장시킨 민병대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점령이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둘째는 저항세력 지도부에 대한 표적 암살이었다. 셋째는 이 모든 활동의 자금을 의회 예산 밖에서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특무처는 콘스탄티노폴의 암시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아편을 되파는 방식으로 장부에 없는 돈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아편 유통 경로는 점령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976년 이후 [[올덴버그 마피아]]가 루이나 남부의 아편 유통망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산 아편이 주요 공급원 가운데 하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점령 후반부에는 루이나의 민간 경비업체들도 대거 콘스탄티노폴에 들어왔다. 병력이 모자란 루이나군은 보급 호송과 안전지대 경비, 자치정부 요인 경호를 민간 업체에 맡겼는데, 이들 경비원은 콘스탄티노폴의 법도, 루이나의 군법도 적용받지 않는 법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1976년 8월 19일, 자치정부 각료의 차량 행렬을 호위하던 루이나 경비업체 직원들이 세르미 광장에서 접근하던 승용차에 발포한 뒤 광장의 군중을 향해 난사해 어린이 4명을 포함한 민간인 17명이 숨졌다. 업체는 공격을 받아 대응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사에서 공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에 연루된 경비원들은 아무런 처벌 없이 루이나로 귀국했다. 이 '세르미 광장 사건'은 자치정부조차 공개적으로 루이나에 항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았다. 1977년 루이나 본국에서 특무처가 폐지되면서 콘스탄티노폴에서의 공작도 후신 조직으로 넘어갔다. 이관된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기밀로 묶여 있다. ==== 전쟁 피로 ==== 콘스탄티노폴 점령이 이어진 1970년대는 루이나 본국에서도 [[검은 10년]]이라 불리는 혼란기였다. 극좌와 극우의 무장조직이 도심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정치인과 법관이 납치되고, 역에서 폭탄이 터지는 나라에서 해협 너머의 점령지는 국민의 관심에서 점점 밀려났다. 관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피로와 냉소가 남았다. 침공 직후인 1970년 6월 71%에 달했던 개입 지지율은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가 일어난 1974년에 44%로, 세르미 광장 사건 이듬해인 1977년에는 23%로 떨어졌다. 징집병을 교대로 파견하는 구조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콘스탄티노폴에 파견된 루이나군의 대부분은 징집병이었고, 1년 단위로 교대되는 이들은 점령지의 지형과 언어를 익힐 무렵이면 귀국해야 했다. 귀국한 병사들이 전하는 '과부의 길'과 '유리 상자'의 이야기는 정부의 공식 발표와 전혀 달랐다. 청북전쟁 반대 운동이 징병 제도 자체를 겨누기 시작하자, 해협 건너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점령 역시 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현지화 정책 ==== 증원도 철수도 할 수 없게 된 루이나가 1977년부터 내건 구호는 "콘스탄티노폴의 치안은 콘스탄티노폴인에게"였다. 이른바 현지화 정책은 자치정부의 방위대와 경찰을 대폭 늘려 루이나군의 임무를 넘겨받게 한다는 것으로, 방위대의 병력은 1979년 서류상 4만 1천 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서류상의 숫자와 실제 병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980년 루이나 감사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방위대 병력의 약 30%는 급여만 타 가는 '유령 병사'였고, 지휘관들은 유령 병사의 급여와 보급품을 착복했다. 지급된 소총과 탄약 가운데 상당량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저항세력의 손에 들어갔고, 방위대 병사가 낮에는 검문소를 지키고 밤에는 무장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루이나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적의 군대를 우리 돈으로 훈련시키고 있다"는 자조가 돌았다. 자치정부는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1979년 새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국무위원회를 행정부로 두고 그 수장을 국무위원장이라 했다. 같은 해 9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열두 집 가운데 하나인 마니아티스 가문의 당주 테오도로스 마니아티스가 당선되었으나, 투표는 안전지대와 협력 민병대가 장악한 구역에서만 치러졌고 투표율은 23%에 그쳤다. ==== 군정과 정리 작전 ==== 1978년 루이나 본국에서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국가비상위원회]]의 군정이 들어서자, 콘스탄티노폴 정책도 강경 일변도로 바뀌었다. 군정은 1978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이른바 '정리 작전'을 벌여 저항세력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구역을 차례로 봉쇄하고 15세 이상 남성을 일괄 연행했다. 연행자들은 북부 교외의 옛 인민군 병영을 개조한 알티노 구금시설로 보내졌는데, 최대 수용 인원이 9천 명에 달했던 이 시설에서는 구타와 고문, 가혹 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알티노 구금시설의 실상은 1980년 10.24 시민혁명 이후 이 시설에서 복무했던 병사가 촬영한 사진이 루이나 언론에 공개되면서 처음 알려졌다. 이 '알티노 사건'은 군정의 콘스탄티노폴 정책 전반에 대한 조사로 이어졌다.] 1979년 6월 7일에는 정화전선의 카라즈다가 동부 외곽의 은신처를 겨냥한 루이나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은신처에서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의 계획 문서가 발견된 것도 이때였다. 카라즈다의 죽음으로 정화전선은 여러 분파로 쪼개졌지만, 그가 훈련시킨 전투원들과 그가 벌려 놓은 증오는 그대로 남았다. 정리 작전은 수치상으로는 저항세력의 공격 건수를 일시적으로 줄였지만, 알티노에서 풀려난 수천 명의 남자들은 대부분 풀려나자마자 무장세력에 합류했다. ==== 철군 ==== 매년 수백 명의 루이나군 장병과 민간인이 사망하는 상태가 1980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루이나 정부는 철군을 단행한다. 계기는 루이나 본국의 정변이었다.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군정이 무너지고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새 정부는 알티노 사건을 비롯한 군정의 콘스탄티노폴 정책을 전면 재검토했다. 결론은 더 이상 버틸 명분도, 버텨서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1981년 2월 루이나 의회는 양원에서 「콘스탄티노폴 주둔군 철수 결의」를 가결했다. 루이나는 철수에 앞서 자치정부의 국제연합 가입을 서둘렀는데, 주권국으로 인정받은 정부에 권한을 넘기고 떠나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자치정부는 1981년 9월 국제연합에 가입했고, 두 달 뒤인 11월 30일 마지막 루이나군 부대가 남항구에서 수송선에 올랐다.[* 이날 남항구 사령부에서는 루이나 국기 하강식이 열렸다. 하강식에 참석한 자치정부 인사는 20명이 채 되지 않았고, 수송선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3시간 만에 텅 빈 사령부 건물은 약탈당했다.] 루이나는 철수하면서 자치정부 방위대에 넘겨준다는 명목으로 M67 무반동포, FN-FAL 소총, 박격포 등 상당량의 중화기를 남항구와 북부 교외의 임시 보급창고에 남겨 두었다.[* 이 무기들은 루이나군이 "임시 보급창고"에 남기고 간 것이며, 철수 직후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루이나 측 인수인계 문서에 기재된 소총만 2만 6천여 정이었다.] 이 무기들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는 철수 당시에도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1970년 5월 침공부터 1981년 11월 철군까지, 11년 7개월에 걸친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개입의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이 집계된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BA0E09><bgcolor=#BA0E09> {{{#FFBF00 '''구분'''}}} ||<bgcolor=#BA0E09> {{{#FFBF00 '''사망'''}}} || || 루이나군 || 4,318명 || || 루이나 민간 계약자 || 612명 || || 자치정부 보안군 || 약 9,700명 || || 무장세력 || 3만 명 이상 (추정) || || 민간인 || 7만 1천~12만 8천 명 (추정) || 루이나군 사망자에는 침공 당시의 전사자 406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부상자는 약 2만 9천 명에 달했다. 민간인 사망자는 조사 주체와 집계 방식에 따라 차이가 커서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점령 기간 중 집을 떠나 피란민이 된 사람은 1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막대한 인명과 예산을 쏟아붓고도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에 남긴 것은 무너지기 직전의 자치정부와 수만 정의 총, 그리고 서로를 증오하는 수십 개의 무장세력이었다. 이는 명백한 실패였다. === 군벌 시대 === ==== 자치정부의 붕괴 ==== 루이나군이 철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는 급속히 무너졌다. 행정 체계는 유지되지 않았고, 경찰과 군부는 장비를 그대로 들고 탈영하거나 갱단에 합류했다. 1982년 3월에는 방위대 제2사단이 사단장의 지휘 아래 통째로 이탈해 북부 교외의 임시 보급창고를 접수했고, 이를 신호로 다른 부대들도 앞다투어 보급창고를 털었다. 루이나가 두고 간 무기들은 몇 달 사이에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일부 민병대는 중대급 화력을 보유하며 도시의 시가지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1982년 여름에 이르러 자치정부의 통제가 미치는 곳은 남항구와 옛 세관 구역을 포함한 세 개 구역뿐이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북부 중앙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감자 수백 명이 탈옥했다. 이 과정에서 옛 혁명군사평의회 의장 브론다키스는 교도소 안에서 살해되었고, 사카렐리스는 탈옥한 뒤 행방을 감추었다.[* 사카렐리스의 행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980년대 내내 그가 북부의 무장세력을 배후에서 이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983년에는 콘스탄디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었다. 자치정부가 부족한 재정을 화폐 발행으로 메우면서 그해 물가 상승률은 추정치로 2만%를 넘겼고, 시민들은 더 이상 콘스탄디를 받지 않았다. 그 자리를 USD 현금과 담배, 그리고 소총 탄약이 대신했다. 탄약은 어느 구역에서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유일한 통화였다. ==== 대통령의 실종 ==== 1984년 2월 11일, 마니아티스 대통령은 에스테리 곶 공항으로 향하던 중 차량 행렬이 7번 도로에서 매복 공격을 받은 뒤 행방불명되었다. 불탄 차량 네 대와 경호원들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대통령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몸값 요구도, 살해를 주장하는 성명도 나오지 않았다. 자치정부의 기록에는 지금도 그가 '행방불명된 대통령'으로 남아 있으며,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대통령이 사라진 뒤 국무위원회는 헌법에 따라 권한대행 체제에 들어갔으나, 국무위원회 자체가 남항구의 청사 한 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때부터 루이나가 남항구의 연락사무소에 남겨 둔 파견관이 과도정부의 명목상 수반을 대행하는 기묘한 체제가 이어졌다. 국무위원장직은 이후에도 형식적으로 계승되었지만, 그 권한은 청사 경비원을 부리는 데서 끝났다. ==== 해방구의 도시 ==== 이 시기의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으로만 자치정부가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도시 구역이 군벌 체제로 나뉜 무정부 사회였다. 1987년 국제연합의 조사 보고서는 콘스탄티노폴에서 활동하는 무장세력을 147개로 집계했는데, 이 가운데 중대급 이상의 화력을 갖춘 조직은 31개였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구역을 '해방구'라 칭하며 징집, 검문, 납치, 마약 밀매, 인신매매, 무기 거래 등을 일삼았고, 도시는 사실상 암시장과 전투로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세력으로는 옛 해협 수호대와 신보석운동 급진파의 잔존 세력이 북부에 세운 '인민해방구 평의회', 칼라미의 혼혈계 자경단에서 출발해 남항구 인근을 장악한 '칼라미 방위대', 서번트 갱의 후예로서 부두의 밀수와 고리대금을 쥔 '종복회', 동부 외곽에 남은 정화전선의 여러 분파, 그리고 해협 북안의 내륙 고지에서 부족장 체제를 유지하며 도시와 거리를 두어 온 '내륙 부족 연맹' 등이 꼽힌다. 여기에 옛 방위대 사단장들이 각자 세운 군벌과 수십 개의 동네 자경단이 뒤섞였다. 세력 간의 동맹과 배신은 몇 달 단위로 바뀌었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는 일이 예사였다. 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전기와 수도는 끊긴 지 오래였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 치료를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거했다. 혁명정부 시절 구역마다 세워졌던 인민 진료소는 대부분 약탈당하거나 무장조직의 사무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AK-47을 조립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고, 하루 세 끼는커녕 하루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운 좋은 날'로 여겨졌다. 1988년 겨울에는 곡물 밀수로가 세력 간 전투로 끊기면서 기근이 닥쳐 약 3만 명이 굶어 죽거나 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 국제사회의 외면 ==== 국제연합은 1985년부터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했지만, 무장세력의 수가 너무 많고 목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이듬해 개입을 포기했다.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평화에 합의할 상대가 있어야 했는데, 콘스탄티노폴에는 그런 상대가 147개나 있었던 것이다. 루이나도 더 이상 대규모 개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에도 루이나 정보기관들은 콘스탄티노폴 내에 잔류하며 [[프로젝트 KV|비공식 작전]]을 수행했다.] 이 시기 콘스탄티노폴은 환경 재앙까지 겪었다. 1986년 루이나군 침공 이후 방치되어 있던 남부 타우로 광산의 침출수 저수지가 무너져 중금속 폐수가 남부 해안으로 쏟아졌고, 1987년에는 세력 간 전투 중 불이 붙은 남항구 석유 저장소가 11개월 동안 타올랐다. 도시를 뒤덮은 매연과 폐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이 일대의 기후이변을 부추긴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자세한 내용은 자연환경 문단 참고.] === 자치권 회복 선언 이후 === ==== 보안연합 체제 ==== 이러한 내전 상황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전쟁이 멈춘 것은 평화가 찾아와서가 아니라 모두가 지쳐서였다. 10년 가까운 소모전 끝에 1990년대 초에는 싸울 사람도, 빼앗을 것도 바닥났고, 살아남은 세력들은 서로의 구역을 인정하는 편이 싸우는 것보다 이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3년 남항구에서 주요 세력들이 맺은 이른바 '남항구 협정'으로 도시는 열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을 장악한 세력은 '보안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기로 했다.[* 도시를 열두 몫으로 나눈 것이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콘스탄티노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열두 집이 총을 들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보안연합은 겉으로는 구역의 치안을 맡는 민병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통행세와 보호비, 밀수 수수료를 걷는 수익 조직에 가까웠다. 구역 사이의 대규모 시가전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그 대가로 시민들은 구역 경계를 넘을 때마다 통행세를 내고 가게마다 보호비를 바치는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보안연합조차 치안보다는 수익 기반 확장에 주력했고, 협정은 수시로 깨졌다가 다시 맺어졌다. ==== 자치권 회복 선언 ==== 1994년 6월,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자치권 회복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다. 1970년 이래 루이나가 보유해 온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보호 권한을 모두 반환하고, 콘스탄티노폴의 자치권이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남항구 연락사무소의 파견관도 철수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루이나는 결국 '자치권 회복'이라는 형식적 선언을 발표하며 도시에서 손을 떼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자치란 말 그대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권한을 돌려받아야 할 자치정부는 이미 청사 한 동짜리 명목상의 조직에 불과했고, 파견관마저 떠나자 그 청사조차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도시의 통치 기능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각 구역별 보안연합뿐이었다. 선언의 법적 효력을 둘러싼 문제도 남았다. 보호 권한을 반환하려면 이를 넘겨받을 정부가 있어야 했는데, 콘스탄티노폴에는 그런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제법상 루이나의 보호령 지위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콘스탄티노폴이 오늘날까지 '명목상 루이나 보호령'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연합 역시 신임장을 제출할 정부가 사라진 콘스탄티노폴의 대표권을 사실상 정지시켰다. ==== 플라자 그룹의 귀환 ==== 루이나 정부가 떠난 자리에 다시 들어온 것은 루이나의 기업이었다. 1996년 [[플라자 그룹]]은 남부 타우로 산지를 장악한 보안연합과 계약을 맺고 타우로 광산의 채굴을 재개했다. 1960년 혁명정부가 국유화하면서 루이나와 콘스탄티노폴의 적대를 촉발했던 바로 그 광산이, 36년 만에 국가가 아닌 무장세력의 손을 거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플라자 그룹은 광산과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 자체 경비 병력을 두었고, 그 보호 범위를 점차 넓혀 도시에 남아 있던 루이나인 거주 지역까지 경비하게 되었다. 현재 일부 지역의 방어와 치안을 맡고 있는 플라자 그룹의 로고가 이 지역 주민과 관련된 협정서에 상징처럼 쓰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 1997년 이후 ==== 1997년에는 도시국가 시절부터 명맥을 이어 오던 빌베른 제1 라지오-테레비방송국의 콘스탄티노폴 지국이 철수했다. 같은 해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일대에서 대규모 고속 무선통신망 시험 설치 실험을 시행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검열 기술과 관련 법제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콘스탄티노폴 안에서 자생적인 대중매체가 성장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콘스탄티노폴은 랜드해협 인신매매와 불법 약물 밀거래의 중심지로 굳어졌다.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인 .ct는 사기와 불법 거래 사이트에 악용된다는 이유로 2004년 루이나에 의해 차단되었고, 국제 전화는 일부 지역에서만 연결된다. 1968년 이후 인구 조사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인구는 알 수 없으며, 현재 약 520만 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현재는 루이나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플라자 그룹이 보호하고 있는 것 외에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더이상 행정력을 투입하고 있지 않다. 로마가 떠나고, 빌베른이 손을 놓고, 루이나가 철수한 뒤에도 해협의 배들은 여전히 이 도시 앞을 지나간다. 다만 이제 그 배들은 더 이상 이 도시에 기항하지 않는다.
Lib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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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