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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노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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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비에트]][[분류:사비에트의 서기장]] [include(틀:사비에트 연방 역대 서기장)] ||<-2><tablealign=right><tablewidth=500><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cd0000><colbgcolor=#cd0000,#000000><colcolor=#ffffff,#e0e0e0> '''{{{+1 이오시프 노스탈린}}}[br]Iosif Nostalin| Иосиф Носталин''' || ||<-2><nopad> [[파일:이오시프노스탈린.png|width=100%]] || || '''본명'''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노스탈린[br]Iosif Vissarionovich Nostalin[br]{{{-2 사랜드어: Јосиф Носталин}}} || || '''출생''' ||1878년 12월 18일[br][[제정 사랜드]] 크라슬리스크현 보로베츠 || ||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74세)[br][[사비에트]] 크라슬리스크 교외 흐라스티 관저 || || '''국적''' ||[[제정 사랜드]] → [[사랜드 공화국]] → [[사비에트]] || || '''신체''' ||169cm, 70kg, 혈액형 O형 || || '''종교''' ||무신론 ([[사랜드 정교회|정교회]] 가정 출신) || || '''직업''' ||정치인, 혁명가 || || '''소속 정당''' ||[[볼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2 (1903~1917)}}}[br][[사랜드 사회당]] {{{-2 (1917~1921)}}}[br][[사랜드 공산당]] {{{-2 (1921~1949)}}}[br][[사비에트 노동인민당]] {{{-2 (1949~1953)}}} || || '''학력''' ||인터그라드 정교회 신학교 {{{-2 (중퇴)}}} || || '''병역''' ||[[인민군(사랜드)|인민군]] 최고사령관 {{{-2 (1941~1950)}}} || || '''서기장 재임''' ||제1대 사랜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br](1922년 4월 3일 ~ 1949년 10월 7일)[br]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서기장[br](1949년 10월 7일 ~ 1953년 3월 5일) || || '''전임자''' ||신설 직위 || || '''후임자''' ||[[레프 화크로츠키]] (대행) ||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노스탈린_서명.png|width=150]]}}} || || '''정치 성향'''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스탈린주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 || || '''대표 저서''' ||《토지 문제와 공산당》(1924)[br]《미완의 혁명》(1927)[br]《산에서 보낸 편지》(1943) || || '''주요 정책 성과''' ||- [[붉은 혁명]] 승리와 [[사비에트]] 연방 수립[br]- 제1차 5개년 계획 추진[br]- 농업 집단화와 중공업 우선 공업화[br]- 소련과의 동맹, [[청평]] 공산 정권 후원 || || '''주요 경력'''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활동가(1903~1917)[br]- 사랜드 공산당 창당 참여(1921)[br]- 제1대 서기장(1922~1953)[br]- 인민군 최고사령관(1941~1950) || || '''기타 이력''' ||- [[대정리]](1950~1952) 주도[br]- [[동사랜드]] 합병(1949)과 1951년 봉기 진압[br]- 1956년 탈노스탈린화로 격하, 1998년 이후 재평가·복권[br]- 사인을 둘러싼 독살 의혹 || [목차] [clearfix] == 개요 == > 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30년은 너무 길었다. 우리는 더 기다리지 않는다. > ---- > 1946년 4월 12일, 인민군 총공세 명령서에서 [[사비에트]]의 초대 서기장이자 [[붉은 혁명]]의 지도자. [[제정 사랜드]]의 농노 집안에서 태어나 정교회 신학교를 중퇴하고 청년기를 [[러시아 제국]]의 혁명 운동 속에서 보냈다. 1917년 [[장미 혁명]] 직후 귀국해 1921년 [[사랜드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서기장에 올라 죽을 때까지 3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1934년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페트코비치]]의 군부 쿠데타로 소련에 망명했다가, 1941년 [[사랜드 공화국]]이 [[추축국]] 편으로 참전하자 비밀리에 귀국해 동남부 카스탄 산지의 해방구에서 [[인민군(사랜드)|인민군]]을 직접 이끌었다. 종전 뒤에는 과도정부의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1946년 4월 내전을 일으켜 3년 반 만에 승리했으며, 1949년 10월 7일 크라슬리스크에서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했다. 집권한 뒤에는 내전기에 농민들에게 나눠 준 땅을 몇 년 만에 집단농장으로 다시 묶고, 중공업 우선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밀어붙였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의 [[대정리]]로 수십만 명이 노동교화소에 보내지고 공식 기록으로만 약 2만 명이 처형되었으며, 1949년 띠엔화 협정을 깨고 [[동사랜드]]를 무력으로 합병했다. 1951년 초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이전의 장악력을 끝내 되찾지 못했고,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뇌출혈이지만 독살 의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후 1956년 [[니키타 인터루쇼프]] 총리가 주도한 탈노스탈린화로 개인숭배와 대정리가 비판받으며 격하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공식 담론에서 사실상 지워졌다. 그러나 1998년 니키타의 손자 [[미하일 인터루쇼프]]가 집권한 뒤로는 '연방을 세운 사람'으로 다시 복권되고 있어, 할아버지가 무너뜨린 노스탈린을 손자가 다시 세운다는 말이 나온다. == 생애 == === 유년기 (1878~1894) === 1878년 12월 18일 제정 사랜드 크라슬리스크현의 농촌 마을 보로베츠에서 농노 비사리온 노스탈린과 밀레바 노스탈린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형은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다. 보로베츠는 평원 중부의 대지주 브라니코비치 백작가의 영지에 속한 마을로, 노스탈린 일가는 대대로 이 영지에 묶인 농노였다. 제정 사랜드에서는 1918년까지 농노제가 이어졌으므로, 노스탈린은 태어날 때부터 법적으로 영주의 재산이었다. 아버지 비사리온은 영지의 밀밭에서 부역하는 틈틈이 크라슬리스크의 제분소에 품을 팔러 다녔는데, 술을 마시면 아내와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이 잦았다. 노스탈린은 훗날 측근들에게 "내가 처음 배운 정치는 아버지의 주먹을 피하는 법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밀레바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아들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다. 제정 사랜드에서 농노의 아들이 영지를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성직자 신분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교회 부속 학교에서 글을 깨친 노스탈린은 기억력이 비상해 성경 구절과 성가를 통째로 외웠고, 이를 눈여겨본 마을 사제가 영주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브라니코비치 백작가는 1891년 소년을 신학교에 보내도록 허락했는데, 졸업해 사제가 되면 영지 교회로 돌아온다는 조건이었다. === 신학교와 노동 운동 (1894~1903) === 1894년 노스탈린은 장학생으로 인터그라드 정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제정 말기의 인터그라드 신학교는 엄격한 규율로 이름났지만, 동시에 금서가 가장 활발하게 돌던 곳이기도 했다. 노스탈린은 2학년 때부터 몰래 들여온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 소책자와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의 《[[자본론]]》 러시아어판을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는 이 무렵 금서를 읽기 위해 익힌 것으로, 그는 평생 평원 방언의 억양이 섞인 러시아어를 썼다. 1898년 기숙사 수색에서 금서가 발견되자 노스탈린은 졸업을 1년 앞두고 퇴학당했다. 신학교 학적을 잃으면서 농노 신분에서 벗어날 길도 함께 막혔고, 영지로 돌아가는 대신 인터그라드의 철도 공작창에 잡역부로 숨어들었다. 이 시기 그는 장례와 파업 때 붉은 장미를 다는 것으로 유명했던 인터그라드 노동자 공제회에 들어가 야학을 열고 파업 전단을 썼다. 훗날 장미 혁명의 표식이 될 붉은 장미를 처음 가슴에 단 것도 이때였다. 같은 공제회의 방직공장 여공 밀리차 그로즈다노바와 만나 1902년 결혼했다. 1902년 가을 공작창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이듬해 봄 노스탈린은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어 러시아 제국으로 달아났다. 도망 농노이자 수배자였던 그는 이후 14년 동안 사랜드 땅을 밟지 못했다. === 러시아 혁명 운동 (1903~1917) === 러시아로 건너간 노스탈린은 흑해 연안의 [[오데사]]에 정착해 항만 노동자로 일하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1903년 당이 갈라지자 [[볼셰비키]] 편에 섰다. 1904년 오데사에서 장남 다닐로가 태어났다. 그는 오데사와 [[바쿠]]의 지하 인쇄소를 오가며 전단과 신문을 찍었고, 러시아 남부에 흩어진 사랜드인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때는 오데사 항만 파업에 가담했다가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1917년까지 노스탈린은 세 번 체포되어 두 번 [[시베리아]] 유형을 갔고, 한 번은 유형지에서 탈출했다. 유형과 탈출을 되풀이하는 동안 그는 볼셰비키 안에서 '사랜드 문제'의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1913년 당 기관지에 실린 〈사랜드의 농노제와 러시아 혁명〉은 농노제를 끌어안은 채 20세기를 맞은 제정 사랜드를 "유럽에서 가장 늦게 무너질, 그러나 가장 크게 무너질 전제정"으로 규정한 글로, 그의 이름을 처음 당 지도부에 알렸다. 1917년 3월 러시아의 [[2월 혁명]]과 사랜드의 장미 혁명이 같은 달에 일어났을 때, 노스탈린은 시베리아의 유형지에 있었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정치범 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에게서 사랜드로 돌아가 혁명을 이어 가라는 권고를 받고 1917년 5월 귀국했다. === 귀국과 공산당 창당 (1917~1922) === 귀국한 노스탈린은 장미 혁명 이후 합법화된 [[사랜드 사회당]]에 들어가 당내 좌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밀란 S. 보이노비치|보이노비치]]의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고, 1918~1920년 영지를 점거한 농민들을 군대로 해산하며 토지 개혁을 제헌의회로 미루는 것을 "혁명의 배신"이라 공격했다. 1918년 임시정부가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노스탈린도 비로소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 일을 두고 "나를 해방한 법은 내 아버지의 밭은 해방하지 않았다"고 썼다. 1920년 헌법이 토지 개혁 없이 공포되고 사회당 지도부가 지주 정당과의 연립에 참여하자, 당내 급진파는 분당을 결의했다. 1921년 사회당 급진파는 [[사랜드 공산당]]을 창당했고, 노스탈린은 창당 대회에서 조직 담당 위원으로 뽑혔다. 1922년 4월 3일 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 서기장 (1922~1934) === 서기장이 된 노스탈린은 사랜드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규율 있는 간부 정당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러시아 혁명 운동 시절의 동료와 모스크바 레닌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간부들을 당 기구의 요직에 앉혔고, 그 결과 러시아어가 당 문서와 간부 교육의 사실상 공용어가 되었다. 사랜드어로 연설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던 노스탈린 자신의 성향도 여기에 한몫했다. 1920년대의 공산당은 합법 정당으로 국민의회 선거에 나섰지만 의석은 적었다. 노스탈린은 의회 활동을 부차적인 일로 보고, 대신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공장 지대 노동조합과 토지 개혁에서 소외된 평원의 소작농 조직을 장악하는 데 집중했다. 1924년 출간한 《토지 문제와 공산당》에서 그는 "의회가 줄 수 없는 땅은 소작농 스스로 가져갈 것"이라고 썼다. 그가 1920년대에 촘촘히 짜 놓은 노동조합·농민 조직망은 훗날 인민군의 모체가 되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당 안에서는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당의 원로 [[레프 화크로츠키]]가 이끈 '의회파'는 사회당과의 연대와 의회를 통한 토지 개혁을 주장했고, 노스탈린의 '조직파'는 의회 노선을 버리고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을 통한 대중 투쟁을 주장했다. 1927년 노스탈린은 장미 혁명을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소작농의 두 번째 혁명만이 이를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미완의 혁명》을 펴내 논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1928년 당대회에서 의회파는 패했지만, 노스탈린은 화크로츠키를 당에서 내쫓지 않고 실권 없는 원로로 남겨 두었다. 화크로츠키는 노스탈린이 끝내 제거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옛 정적이었고, 1953년 노스탈린이 죽자 정치국 최고령 위원으로서 서기장 대행을 맡게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공산당의 세력은 눈에 띄게 불어났다. 1932년 평원 곳곳에서 소작 폭동과 공장 점거가 잇따랐는데, 공화국 정부는 이 가운데 상당수의 배후에 노스탈린의 조직망이 있다고 보았다. === 망명 (1934~1941) === 1934년 5월 페트코비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불법화하자, 노스탈린은 체포 직전 크라슬리스크를 빠져나가 소련으로 망명했다. 공산당은 지하 조직으로 명맥을 이었고, 노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사랜드 대표로 지하 조직을 원격 지휘했다. 모스크바 시절은 노스탈린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꼽힌다. 1936년 아내 밀리차가 망명지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의 [[대숙청]]이 모스크바의 외국인 공산주의자 사회를 덮쳤을 때, 망명한 사랜드 공산당 간부 수십 명이 [[NKVD]]에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노스탈린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코민테른 안에서 입지를 굳혔는데, 체포된 간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1920년대 노선 투쟁에서 그와 맞섰던 인물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가 동료들을 고발했다는 의혹이 지금도 따라다닌다. 사비에트 정부는 이 시기 노스탈린의 코민테른 문서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 파르티잔 전쟁 (1941~1945) === 1941년 페트코비치 정권이 추축국과 조약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공산당은 곧바로 무장 조직인 인민군을 결성했다. 노스탈린은 같은 해 가을 소련 군사고문단 몇 명과 함께 비밀리에 귀국해 동남부 카스탄 산지로 들어갔고,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았다. 망명한 서기장이 직접 산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흩어져 있던 지하 조직을 단숨에 다시 묶었다. 노스탈린이 산지에 자리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남부 산지는 군부 정권이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하고 저항을 군대로 진압한 곳으로, 공산당 활동가들과 [[카스탄족]] 저항 세력이 이미 손을 잡고 있었다. 노스탈린은 1942년 카스탄 저항 세력의 지도자들과 이른바 '산지 선언'을 발표해, 해방 뒤 카스탄족에게 언어·교육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카스탄족 청년들을 대거 인민군으로 끌어들였지만, 8년 뒤 대정리 때 노스탈린 자신의 손으로 깨지게 된다. 인민군은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산지에 해방구를 세우고 추축국의 철도와 보급로를 공격했다. 해방구에서는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눠 주었는데, 노스탈린은 1943년 산지에서 각 지역 지휘관들에게 보낸 지침을 묶은 《산에서 보낸 편지》에서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장미 혁명 이후 30년 가까이 땅을 기다려 온 소작농들에게 이 구호는 어떤 선전보다 강력했다. 산지 시절 병사와 농민들은 그를 '산의 노인(Старац с планине)'이라 불렀는데, 이 별명은 훗날 개인숭배 속에서 '평원의 아버지'라는 공식 칭호로 바뀌었다. 소련은 노획한 추축국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보냈고, 연합국도 추축국 후방을 교란하는 인민군을 사실상 동맹 세력으로 대우했다. 1943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인민군의 해방구는 평원 쪽으로 넓어졌고, 1944년 가을 군부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 교섭에 나섰을 때 인민군은 이미 수십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 붉은 혁명 (1945~1949)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붉은 혁명]] 문서 참고.}}} 1945년 5월 휴전 뒤 연합국 관리위원회의 감독 아래 [[스테판 R. 일리치]] 총리의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과도정부는 인민군의 무장 해제와 해방구에서 분배한 땅의 반환을 요구했고, 노스탈린은 둘 다 거부했다. 그는 과도정부의 요직을 군부 정권 출신 관료와 장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페트코비치의 옷을 갈아입힌 정권"이라 불렀다. 1946년 3월 총선이 부정 선거로 끝나자, 노스탈린은 4월 12일 과도정부를 '파시스트 잔당의 정권'으로 규정하는 총공세 명령에 서명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날을 붉은 혁명의 기점으로 삼는다. 1946년 여름 과도정부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은 다시 산지와 고원 가장자리로 밀려났지만, 노스탈린은 도시를 정면으로 치지 말고 도시 사이의 철도와 교량을 끊어 수비대를 하나씩 고립시키라고 지시했다. 1947년 4월 노스탈린은 동쪽 롱 강 너머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의 동사랜드 노동당 지도자 [[쩐 반 럼]]과 띠엔화 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혁명이 승리한 뒤 양측이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고 규정했고, 동사랜드의 쌀과 보급로, 인민적군 부대가 인민군을 도왔다. 같은 해 장남 다닐로가 과도정부 헌병대에 붙잡혔다. 과도정부는 그를 포로로 잡힌 장군과 맞바꾸자고 제안했으나 노스탈린은 "인민군에는 서기장의 아들이라는 계급이 없다"며 거절했고, 다닐로는 그해 겨울 인터그라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47년 가을부터 전세는 인민군 쪽으로 기울었다. 1949년 봄 수도 크라슬리스크가, 8월에는 3주의 포위 끝에 옛 제정의 수도 인터그라드가 함락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은 크라슬리스크 혁명 광장에서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했고, 사랜드 공산당은 [[사비에트 노동인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3년 반의 내전 동안 양측 모두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했지만, 노스탈린 시대의 공식 역사는 과도정부 쪽의 학살만을 '백색 테러'로 기록했다. === 연방 수립과 집권 (1949~1951) === 연방을 선포한 지 두 달 만에 노스탈린은 동사랜드에 '혁명 성과의 통합'을 요구했다. 1949년 12월 동사랜드 노동당 친사비에트파의 '형제적 원조 요청'을 명분으로 사비에트군 3개 사단이 롱 강을 넘었고, 포위 속에서 소집된 동사랜드 인민회의가 연방 가입 청원을 의결했다. 동사랜드는 탈퇴권 없는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되었고, 노스탈린이 직접 서명한 띠엔화 협정의 주권 조항은 2년 만에 휴지가 되었다. 동사랜드에서 띠엔화 협정은 오늘날 사비에트의 배신을 증명하는 문서로, 노스탈린은 그 배신의 장본인으로 기억된다. 1950년 노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과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소련은 공업화에 필요한 설비와 기술자, 차관을 보냈고, 사비에트의 5개년 계획과 군 편제, 보안기관은 대부분 소련의 모델을 따랐다. 같은 해 인민군은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었고, 노스탈린은 최고사령관직을 내려놓았다. 해협 동쪽에서는 갓 들어선 [[청평]]의 공산 정권을 후원해 차관과 기술자를 보냈지만, 500개가 넘는 공장을 지어 달라는 청평의 요구는 대폭 깎아 승인했다. 1950년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과 군수 산업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를 위해 노스탈린은 내전기에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라며 나눠 준 땅을 불과 몇 년 만에 집단농장으로 다시 묶었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평원 곳곳에서 농민 소요가 일어났고, 1951년 흉작이 겹치면서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만 수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사비에트 정부는 1990년대까지 이 기근을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 노스탈린은 문맹 퇴치 운동과 초등 의무교육을 도입하고 여성을 공장과 집단농장에 대거 동원하는 사회 개조를 밀어붙였다. 종교는 철저히 억압되어 성직자들이 대정리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상당수의 교회가 창고와 공회당으로 바뀌었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농노의 아들이 반세기 뒤 사랜드 정교회를 무너뜨린 셈이었다. === 대정리 (1950~1952)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대정리]] 문서 참고.}}} 1950년부터 노스탈린은 옛 공화국의 관료와 장교, 지주와 성직자, 그리고 당 안에서 '민족주의 편향'이나 '과도정부와의 내통' 혐의를 받은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사비에트 역사에서 '대정리'로 불리는 이 숙청으로 수십만 명이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공식 기록으로 약 2만 명이 처형되었다. 연구자들은 실제 처형자가 그 몇 배에 이른다고 본다. 수감자들은 5개년 계획의 값싼 노동력이 되어 운하와 철도, 댐 같은 대형 토목공사에 투입되었다. 대정리는 동사랜드와 카스탄 자치지역에서 특히 가혹했다.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는 카스탄어 학교와 신문이 모두 폐쇄되고, 산지 선언에 서명했던 카스탄 저항 세력 지도자들 대부분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노동교화소로 보내졌다. 1942년 산지에서 언어·교육 자치를 약속했던 사람이 바로 노스탈린이었다는 점에서, 카스탄족에게 대정리는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배신으로 기억된다. === 뇌졸중과 동부 소요 (1951~1952) === 1951년 초 노스탈린은 크라슬리스크의 집무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몸에 마비가 남아 1년 넘게 공식 석상에 나서지 못했고, 정치국은 누가 서기장의 권한을 대행할지를 두고 몇 달 동안 사실상 마비되었다. 이 기간 노스탈린은 흐라스티 관저에 머물며 왼손으로 쓴 쪽지로 지시를 내렸다고 하는데, 쪽지 가운데 얼마가 실제로 그가 쓴 것인지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다. 권력의 공백은 곧 동쪽에서 터져 나왔다. 1951년 10월 9일 동사랜드 자치공화국 인민평의회는 연방 탈퇴를 의결했고, 옛 인민적군 출신 부대가 봉기했다. 봉기는 1952년 봄까지 진압되었으나 인민적군은 산악으로 물러나 10년 넘는 항전을 이어 갔고, 이는 결국 1963년 동사랜드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진압 명령에 노스탈린이 직접 서명했는지, 아니면 정치국이 병상의 서기장 이름을 빌렸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동부 소요'로만 짧게 기록한다. === 사망 (1953) === 노스탈린은 1952년 말 업무에 복귀했으나 이전의 장악력을 되찾지 못했다. 정치국원들은 그의 앞에서는 복종했지만 실무는 이미 각자의 손에 나뉘어 있었고, 노스탈린은 이를 의식한 듯 1953년 초 '정치국의 갱신'을 언급하며 새로운 숙청을 예고하는 발언을 몇 차례 했다. 1953년 3월 3일 밤 노스탈린은 흐라스티 관저의 침실에서 쓰러졌다. 경호원들은 다음 날 정오가 지나도록 방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서기장이 부르기 전에는 침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평소 명령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의사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고, 이틀 뒤인 3월 5일 숨을 거두었다. 1922년 당 서기장에 오른 지 31년, 연방을 세운 지 3년 반 만이었다. 공식 사인은 두 번째 뇌출혈이었지만, 독살설은 그의 죽음 직후부터 떠돌았다. 의혹의 근거로는 1952년 말 오랫동안 그를 돌본 주치의가 갑자기 교체된 일, 쓰러진 뒤 반나절 가까이 아무도 의사를 부르지 않은 일, 그리고 1990년대 재편기에 일부 공개된 부검 기록에서 혈액 검사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었던 일이 꼽힌다. 숙청을 예고하던 서기장이 죽어 가장 덕을 본 사람이 정치국원 전원이었다는 점 때문에, 독살설은 특정인보다는 정치국 전체를 용의자로 지목해 왔다. 사비에트 정부는 독살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한다. 장례는 1953년 3월 9일 크라슬리스크 혁명 광장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방부 처리된 시신은 혁명 광장의 붉은 혁명 기념 영묘에 안치되었다. == 사후 == === 후계 === 노스탈린이 죽자 정치국은 최고령 위원인 [[레프 화크로츠키]]를 서기장 대행으로 세웠다. 1920년대 노선 투쟁에서 노스탈린에게 패한 뒤 실권 없는 원로로 살아남은 화크로츠키는, 어느 파벌에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도기의 얼굴로 선택되었다. 1953년 9월 당 중앙위원회는 농업 담당 서기였던 [[세르게이 안토노프]]를 새 서기장으로 선출했고, 같은 해 인민위원회 의장, 곧 총리에는 대외 경제를 맡아 온 [[니키타 인터루쇼프]]가 임명되었다. === 탈노스탈린화 (1956) === 1956년 2월 노동인민당 대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니키타 인터루쇼프 총리는 〈개인숭배와 대정리의 과오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읽었다. 보고는 노스탈린이 당과 국가 위에 자신을 올려놓았고, 대정리에서 무고한 당원과 인민 수십만 명을 처벌했으며, 카스탄 자치지역의 기근을 숨겼다고 비판했다. 안토노프 서기장은 보고를 막지 않았고, 대회 뒤 그 결론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받아들였다. 탈노스탈린화의 결과로 대정리 피해자의 명예 회복이 시작되었고, 노동교화소는 대폭 축소되었다. 노스탈린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장, 집단농장은 원래 이름이나 새 이름으로 바뀌었고, 혁명 광장의 거대한 동상은 1956년 가을 철거되었다. 1957년에는 시신이 붉은 혁명 기념 영묘에서 옮겨져 고향 보로베츠의 마을 묘지에 묻혔다. 카스탄어 초등학교도 일부 다시 문을 열었다. 다만 탈노스탈린화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인터루쇼프의 보고는 노스탈린 개인의 과오를 비판했을 뿐 붉은 혁명과 집단화, 동사랜드 합병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다. 정치범 수용 시설도 없어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1980년대까지 남았다. === 침묵의 시대 (1964~1998) === 1964년 [[레오니트 브레자코프|브레자코프]]가 서기장에 오른 뒤로 노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멈추었지만, 찬양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공식 역사서는 연방 수립을 다루면서도 노스탈린의 이름을 되도록 적게 썼고, 교과서에서 그는 '초대 서기장'이라는 직함으로만 짧게 등장했다. 이 시기 사비에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건국자'로 불렸다. 1990년대 재편기에 일부 기록 보관소가 열리면서 대정리의 규모와 1951년 카스탄 기근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1993년에는 노스탈린의 부검 기록 일부가 공개되어 독살설에 다시 불을 지폈다. === 재평가와 복권 (1998~) === 1998년 서기장에 오른 [[미하일 인터루쇼프]]는 노스탈린을 '연방을 세운 사람'으로 다시 불러냈다. 2003년 사망 50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연방을 세운 사람의 공과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연설했고, 2009년 연방 수립 60주년에는 크라슬리스크 혁명 광장에 노스탈린 동상이 다시 세워졌다. 2012년 개정된 역사 교과서는 노스탈린을 "가혹했으나 필요했던 근대화의 지도자"로 서술하고, 1956년의 탈노스탈린화를 "필요했으나 지나쳤던 교정"으로 규정했다. 미하일 인터루쇼프가 할아버지 니키타의 보고를 사실상 뒤집었다는 점에서, 사비에트 안팎에서는 "할아버지가 무너뜨린 노스탈린을 손자가 다시 세운다"는 말이 나왔다. 미하일 정권은 이를 부인하며 1956년의 보고와 오늘날의 재평가가 모두 당의 '역사적 균형'이라고 설명한다. 노스탈린은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 역대 사비에트 지도자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복권에는 반발도 거세다. 대정리 피해자 유족 단체와 카스탄족 단체는 동상 재건립에 항의하다 여러 차례 당국에 연행되었고, [[동사랜드]] 정부는 띠엔화 협정을 깬 노스탈린의 복권을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루이나]] 정부도 2009년 동상 재건립 때 대정리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라는 성명을 냈다. == 사상 == === 미완의 혁명론 === 노스탈린 사상의 뼈대는 1927년 《미완의 혁명》에서 내놓은 '미완의 혁명'론이다. 그는 1917년 장미 혁명이 차르를 몰아냈지만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부르주아 혁명에 그쳤다고 보았다. 공화국의 지주와 자본가들은 혁명을 가로채 땅을 내주지 않았으므로, 노동자와 소작농이 두 번째 혁명을 일으켜야만 장미 혁명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1949년 이후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관이 되어, 장미 혁명은 '미완의 혁명', 붉은 혁명은 '그 완성'으로 규정되었다. 장미 혁명의 붉은 장미가 사비에트의 국화가 된 것도 이 역사관에 따른 것이다. === 토지와 집단화 === 노스탈린의 토지 정책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모순으로 꼽힌다. 1920년대 그는 "의회가 줄 수 없는 땅은 소작농 스스로 가져갈 것"이라 했고, 파르티잔 시절에는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를 내걸어 소작농을 인민군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집권한 뒤에는 공업화에 필요한 곡물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눠 준 땅을 몇 년 만에 집단농장으로 다시 묶었다. 노스탈린 자신은 이를 "개인에게 준 땅을 인민 전체에게 돌려준 것"이라 설명했지만, 많은 농민에게 그것은 30년을 기다려 받은 땅을 다시 빼앗긴 일이었다. === 민족과 언어 === 노스탈린은 사랜드 공산당을 처음부터 러시아어로 움직이는 당으로 만들었고, 1949년 연방 수립과 함께 러시아어를 연방 공용어로 지정했다. 그는 이를 소련과 하나의 사회주의 진영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지만, 비판자들은 신학교 시절부터 금서를 읽던 언어로 정치를 해 온 그가 사랜드어를 지주와 사제의 언어로 여겼다고 본다.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필요할 때 약속하고 권력을 쥐면 거두어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1942년 카스탄족에게 언어·교육 자치를 약속한 산지 선언과 1947년 동사랜드의 주권을 약속한 띠엔화 협정이 모두 그의 서명으로 맺어졌고, 둘 다 그의 집권 아래에서 깨졌다. === 대외 노선 === 대외적으로 노스탈린은 소련과의 동맹을 연방의 생명선으로 여겼다. 1934~1941년의 망명, 파르티잔 전쟁과 내전기의 무기·고문단 지원, 1950년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까지, 그의 정치 경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의 후원 위에 서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해협의 혁명을 이끄는 맹주를 자처해 청평의 공산 정권을 후원하고 동사랜드를 합병했다. 소련에는 충실한 동맹이면서 해협 안에서는 작은 소련처럼 군림하려 한 이 노선은, 그가 죽은 뒤 청평과의 결별과 동사랜드의 이탈로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 저서 == * 〈사랜드의 농노제와 러시아 혁명〉(1913, 논문) * 《토지 문제와 공산당》(1924) * 《미완의 혁명》(1927) * 《간부와 조직에 관하여》(1930) * 《산에서 보낸 편지》(1943) *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문제》(1950) == 개인숭배 == 노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는 내전기에 시작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절정에 달했다. 파르티잔 시절의 별명 '산의 노인'은 공식 칭호 '평원의 아버지(Отец равнины)'로 바뀌었고, 신문과 방송은 그를 '위대한 서기장 동지'로 불렀다. 그의 생일인 12월 18일은 국가 기념일이 되었으며, 1951년 크라슬리스크 혁명 광장에는 높이 20m가 넘는 동상이 세워졌다. 평원 곳곳의 거리와 공장, 집단농장에 그의 이름이 붙었고, 고향 보로베츠의 생가는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초등학교에서는 《노스탈린 동지의 어린 시절》이 필독서였는데, 이 책에서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아니라 영주에게 맞서다 매질을 당한 의로운 농노로 그려졌다. 1951년 노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 넘게 모습을 감춘 동안에도 신문에는 그의 사진과 '지시'가 매일같이 실렸다. 이 숭배는 1956년 탈노스탈린화로 무너졌다가, 1998년 이후 복권과 함께 일부 되살아나고 있다. 다만 오늘날의 노스탈린 이미지는 1950년대의 '평원의 아버지'보다는 강한 국가를 세운 '건국자'에 가깝다. == 인물 == 말수가 적고 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편이었다. 회의에서는 마지막에 짧게 결론만 말했는데, 측근들은 그가 회의 내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서류에 집착해 모든 보고서의 여백에 직접 메모를 남겼고, 대정리 때 처형 명단에도 이런 메모가 남아 있다. 생활은 검소했다. 산지 시절부터 입던 군복식 외투를 즐겨 입었고, 손으로 만 거친 마호르카 담배를 평생 피웠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잠드는 습관 때문에 정치국 회의는 자정이 넘어 열리는 일이 많았다. 공식 연설은 언제나 러시아어로 했지만, 가까운 사람들과는 보로베츠의 평원 방언으로 이야기했다. 러시아어에 섞인 사랜드 억양은 모스크바 망명 시절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무신론자였지만 신학교 시절 익힌 성가를 노년까지 외우고 있어, 술자리에서 가끔 불렀다고 한다. 의심이 많았다. 1930년대 모스크바에서 동료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로 그는 누구도 완전히 믿지 않았고, 말년에는 주치의와 경호원까지 수시로 바꾸었다. 이 의심은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 가족 == * '''아버지''' 비사리온 노스탈린 (1850~1909): 보로베츠의 농노. 아들이 러시아로 달아난 뒤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 '''어머니''' 밀레바 노스탈린 (1856~1931): 아들이 서기장이 된 뒤에도 크라슬리스크로 오기를 거부하고 보로베츠에서 살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아직도 사제가 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 '''아내''' 밀리차 그로즈다노바 (1884~1936):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 출신으로 노동자 공제회에서 노스탈린을 만나 1902년 결혼했다. 남편을 따라 러시아와 시베리아 유형지, 모스크바 망명지를 오갔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노스탈린은 재혼하지 않았다. * '''장남''' 다닐로 노스탈린 (1904~1947):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인민군 대대장으로 내전에 참전했다가 1947년 과도정부 헌병대에 붙잡혔고, 노스탈린이 포로 교환을 거절하자 그해 겨울 인터그라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 '''딸''' [[나다 노스탈리나]] (1925~2011): 크라슬리스크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자랐다. 1949년부터 크라슬리스크에서 번역가로 일하다 1967년 [[루이나]]로 망명했다. 사비에트는 이 망명에 끝까지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녀를 기록에서 지웠다. 1969년 벨포르에서 펴낸 회고록 《아버지의 방》은 아버지의 가정생활과 말년, 1953년 3월의 마지막 며칠을 증언한 책으로, 독살설의 주요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11년 벨포르에서 죽었다. == 평가 == 노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사비에트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고, 지금도 그를 보는 자리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평가는 그가 30년 동안 풀리지 않던 토지 문제를 혁명으로 끝장내고, 반파시즘 저항을 이끌었으며, 내전으로 무너진 평원에 공업화의 기초를 놓았다는 데 모인다. 문맹 퇴치와 초등 의무교육, 여성의 사회 진출도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비에트의 공식 평가는 이 쪽에 무게를 두고, 대정리는 '시대의 비극'으로 짧게 언급한다. 부정적인 평가는 그가 약속을 무기로 권력을 쥐고 권력을 쥔 뒤 약속을 버렸다는 데 집중된다. 소작농에게 준 땅은 집단농장으로 다시 묶였고, 카스탄족에게 한 자치 약속은 대정리로, 동사랜드와 맺은 띠엔화 협정은 무력 합병으로 깨졌다. 대정리의 처형과 노동교화소, 1951년 카스탄 기근의 은폐, 모스크바 망명 시절 동료들을 고발했다는 의혹도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다. 카스탄족과 동사랜드에서 노스탈린은 배신자이자 가해자로 기억된다. 해협 북부와 루이나에서는 해협 남부를 공산화한 장본인으로 여겨지며, 인터그라드 포위 때 빠져나간 사비에트 망명자 사회는 그를 공화국을 무너뜨린 찬탈자로 불렀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를 소련 모델을 충실히 옮긴 대리인으로 볼 것인지, 사랜드의 토지 문제가 낳은 독자적인 혁명가로 볼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 여담 == * 모스크바 망명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름이 같고 성까지 비슷한 탓에 코민테른 안에서는 '작은 이오시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노스탈린은 이 별명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 1920년 공화국 국가가 된 〈붉은 장미의 행진〉은 사비에트 수립 뒤 공화국의 노래라는 이유로 공식 행사에서 사라졌지만, 노스탈린은 사석에서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동자 공제회 시절 처음 가슴에 붉은 장미를 달았던 기억 때문이었다고 딸 나다는 회고했다. * 키가 작은 것을 의식해, 공식 사진과 연단에서는 낮은 받침대를 썼다. * 영지를 벗어나려고 들어간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탓에, 그는 1918년 농노제가 폐지될 때까지 서류상 브라니코비치 백작가의 도망 농노였다. 1949년 혁명 뒤 브라니코비치 가문의 영지 문서는 노스탈린의 지시로 크라슬리스크 혁명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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