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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헌정 위기
(r29 RAW)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사건 사고]][[분류:제5공화국(루이나)]] ||<-2><tablealign=right><tablewidth=460><tablebordercolor=#4a0000><tablebgcolor=#ffffff,#1c1d1f><colbgcolor=#4a0000><colcolor=#ffffff><bgcolor=#4a0000><color=#ffffff> '''{{{+1 3.29 헌정위기}}}[br]March 29 Constitutional Crisis in Ruina, 1989''' || ||<-2><nopad> [[파일:1989_베인브리지_내란.webp|width=100%]] || ||<width=110> '''발생 일시''' ||1989년 3월 29일 10시 39분[* 루이나 표준시(RST) 기준.] || || '''종료 일시''' ||1989년 3월 29일 11시 46분 || || '''별칭''' ||베인브리지 내란[br]3.29 사태 || || '''유형''' ||내란, 헌정질서 파괴, 차량 돌진 테러, 의회 점거 || || '''발생 위치''' ||[[루이나]] [[벨포르]] 의회의사당 북문 및 도심 일원 || || '''원인'''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대통령의 3선 강행[br]이를 저지한 [[루이나 의회|의회]]에 대한 극우세력의 무력 공격 || || '''동원 세력''' ||[[조국의 방패]] 무장조직원 41명[br]수도방위사령부 {{{-2 (동원 명령 불응)}}} || || '''사망''' ||25명[* 의회경비·경찰 9명, 하원의원 1명, 의회 직원·보좌진 7명, 민간인 2명, 폭도 6명.] || || '''부상''' ||61명 {{{-2 (중상 19명)}}} || || '''시설 피해''' ||북문 방호체계 및 정문 전면부 파괴[br]의회 차량 3대 전소 || || '''체포''' ||당일 102명, 후속 검거 148명 || || '''결과''' ||진압 실패 및 전원 검거[br]베인브리지 대통령 탄핵 및 파면[br][[제6공화국(루이나)|제6공화국]] 수립 || [목차] [clearfix] == 개요 == '''루이나 헌정 위기''', 통칭 '''3.29 헌정위기'''는 1989년 3월 29일, [[루이나]] 제25·26대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의 위헌적 3선 강행에 반발한 의회를 겨냥해 극우 무장조직 [[조국의 방패]]가 벨포르 의회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이다. 사법·법률 맥락에서는 '''베인브리지 내란'''으로 불린다. 제5공화국 헌법 제70조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하되 한 차례만 연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부칙에서 헌법 시행 이전의 재임 기간까지 임기 산정에 포함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1980년부터 9년간 집권한 베인브리지는 [[마테르 전쟁]] 참전을 계기로 선포한 전시비상령을 휴전 이후에도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1988년 12월 전후 재건을 명분으로 3선 출마를 선언했다.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한 의회는 이를 명백한 위헌으로 규정하고 3선 반대 결의안 처리에 착수했다. 1989년 3월 29일 오전 10시 39분, 3선 반대 결의안 본회의가 진행 중이던 의회의사당 북문에 폭발물을 실은 밴 한 대가 돌진했다. 차량은 방호선을 뚫고 정문 전면부에 충돌한 뒤 폭발했고, 그 혼란을 틈타 하수로를 통해 잠입해 있던 조국의 방패 무장조직원들이 의사당 본관에 난입해 총격을 가했다. 벨포르 시경찰청 특수기동대(SRT)와 [[광역수사국|광역수사국(MIA)]] 전술팀이 약 42분간의 교전 끝에 오전 11시 46분 의사당을 완전히 탈환했으며, 이 과정에서 하원의원 1명을 포함해 25명이 사망하고 61명이 부상했다. 같은 날 오후 베인브리지는 벨포르 일원에 계엄을 선포하고 수도방위사령부에 병력 동원을 지시했으나, 국방참모본부는 이를 위헌 명령으로 판단하고 이행을 거부했다. 의회는 당일 오후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저녁에 가결했고, 헌법재판소는 이튿날인 3월 30일 전원일치로 파면을 결정했다. 베인브리지는 4월 8일 체포되어 내란수괴 등 9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7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2월 형이 집행되었다. 3.29 헌정위기는 루이나 헌정사에서 [[10.10 군사반란]]에 이어 두 번째로 헌정질서가 무력으로 공격당한 사건이자, 현직 국가원수가 내란의 수괴로 처벌된 최초의 사례다. 동시에 군과 경찰, 사법부, 그리고 대통령의 소속 정당까지 모두 헌법 편에 섬으로써 체제가 스스로를 복원한 사건으로 평가되며, [[제6공화국(루이나)|제6공화국]] 헌법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 명칭 == 이 사건은 두 개의 명칭으로 불린다. '''헌정위기'''는 언론과 학계, 일상적 용법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다. 3월 26일의 대규모 시위부터 3월 3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이르는 닷새간의 정치 과정 전체를 하나의 국면으로 묶어 부르는 표현이며, 사건 당시 언론이 실시간으로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다. 날짜를 앞세운 '''3.29 헌정위기''', 혹은 단순히 '''3.29'''라는 표기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베인브리지 내란'''은 사법·법률 맥락에서 사용되는 명칭이다. 1989년 7월 25일 벨포르 대법원이 베인브리지에게 내란수괴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 사건은 법적으로 '내란'으로 확정되었고, 이후 제정된 「베인브리지 내란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관련 법령과 판결문, 공적 기록에서는 이 명칭이 사용된다. 책임 소재를 명칭 자체에 명시한다는 점에서 이 표현을 선호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시민의 저항과 제도의 대응까지 포괄하기에는 지나치게 좁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한편 1982년의 연임 제한 폐지 개헌 강행을 [[제2차 헌정위기]]로 부르는 용례가 있어, 이 사건을 '''제3차 헌정위기'''로 표기하는 문헌도 일부 존재한다. 다만 일반적인 용법은 아니다. == 배경 == 3.29의 직접적 도화선은 베인브리지 대통령의 3선 출마 선언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9년에 걸쳐 축적된 권력의 사유화, 두 차례의 개헌 파동, 전시 비상권력의 상시화, 그리고 준(準)관제 극우조직의 성장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벨포르의 봄]] 이후의 민주적 합의가 단계적으로 잠식되어 온 과정의 최종적인 귀결이었다. === 제4공화국의 출범과 베인브리지 === 1978년 [[10.10 군사반란]]과 뒤이은 [[12.6 사태]]로 군정이 붕괴한 뒤, 1979년 [[벨포르의 봄]]을 거쳐 루이나는 [[제4공화국(루이나)|제4공화국]]을 수립했다. 1980년 실시된 제4공화국 첫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이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였다. 베인브리지는 군정기에 두 차례 투옥되고 1년 반을 국외에서 망명 생활로 보낸 민주화 운동 출신 법률가였다. 취임 당시 그는 헌정 회복의 상징이었고, 첫 임기 초반의 정치범 사면, 계엄 관련 법령 일괄 폐지, 언론검열기구 해체는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 2년 차부터 그의 통치 방식은 빠르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경제 재건과 군정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대통령 직속 기구가 잇달아 신설되었고, 이 기구들이 예산과 인사를 통해 행정 각부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의회와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베인브리지는 타협보다 우회를 택했으며, 긴급재정명령과 안보입법 예외조항이 상시적인 통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 연임 제한 폐지 개헌과 제2차 헌정위기 === 1982년, 베인브리지 진영은 제4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이를 "군정을 무너뜨린 손으로 군정을 복원하는 일"이라며 격렬히 반대했으나, 개헌안은 그해 12월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상태에서 새벽에 기습 처리되었다. 이른바 '''제2차 헌정위기'''다. 날치기 개헌은 정권의 정당성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혔다. 이 시기부터 베인브리지 정부는 반대 세력에 대한 물리적 통제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가 정적 사찰과 언론 통제에 동원되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 4.13 유혈진압과 제5공화국 === 1983년 봄, 물가 폭등과 개헌 파동이 겹치며 벨포르에서 대규모 소요가 발생했다. [[벨포르 폭동]]으로 불리는 이 사태에 정부는 군을 투입했고, 4월 13일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4.13 유혈진압]]은 제4공화국의 정치적 종말을 의미했다. 베인브리지는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헌법 전면 개정을 단행해 1984년 [[제5공화국(루이나)|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새 헌법은 대외적 명분을 위해 제70조에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한 차례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되살렸으나, 대통령 선출 방식을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바꾸어 실질적인 통제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부칙 제3조는 "이 헌법 시행 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제70조의 임기 산정에 포함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베인브리지는 1984년 9월 1일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그의 재임은 1980년 이래 통산 두 번째 임기가 되었고, 헌법상 1989년 8월 31일 임기 만료와 함께 물러나야 했다. === 마테르 전쟁과 비상권력의 상시화 === 1985년,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에 참전하며 국가 전체가 전시체제로 전환되었다. 베인브리지는 의회의 동의를 얻어 전시비상령과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방·외교·치안에 관한 권한 일체를 행정부로 집중시켰다. 의회의 기능은 제한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언론 검열, 공공 집회 금지, 정당 활동 등록제 강화가 뒤따랐다. 4.13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점이었음에도 이 조치들은 전선의 격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민 다수도 일시적인 희생으로 감수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였다. 1987년 가을 루이나의 전략적 개입이 종료되고 휴전 합의가 체결되었음에도, 정부는 계엄을 해제하지 않았다. "완전한 안보 불안정 해소 전까지는 통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 아래 비상조치 조항이 6개월 단위로 갱신되었고, 대통령령에 의한 통치가 사실상 고착화되었다. 전후복구사업과 테러위험은 정부 비판 세력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재활용되었으며, 야당의 대중집회와 매체 출연이 반복적으로 차단되었다. 시민사회는 이를 "[[비상상황의 영속화]]"라 부르며 경고했다. 전쟁은 끝났는데 전시체제만 남았다는 인식은 1987년 말에 이르러 광범위한 분노로 축적되었고, 그해 겨울 폭발하게 된다. === 1.10 민주화 선언과 3선 출마 선언 === 1987년 12월, 휴전 뒤에도 유지되던 계엄의 해제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시작된 [[12.23 민주화운동]]이 3주 넘게 이어지며 국정이 마비 직전에 이르자, 1988년 1월 10일 집권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 대표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정되어 있던 [[토머스 J. 윈필드]]가 [[1.10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계엄의 즉시 해제, 직선제 개헌 수용, 정치범 석방, 언론검열 폐지, 4.13에 대한 진상 조사가 골자였다. 선언은 정권 내부에서도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베인브리지는 공개적으로 선언을 부정하지 않았고 1988년 2월 계엄을 형식적으로 해제했으나, 비상조치 조항의 상당수는 개별 법령으로 이관되어 그대로 존속했다. 직선제 개헌안은 이후 1년 동안 정부 발의도, 국무회의 상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헌 협상은 실무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지연되었고, 1988년 하반기부터는 정부·여당 안에서 "임기 연장이 아니라 개헌 완수를 위한 임기 유지"라는 논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12월 2일, 베인브리지는 대통령궁 기자회견에서 헌법 제70조와 부칙 제3조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3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 "루이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재건도, 개헌도, 질서의 회복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선에서 돌아온 청년들에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저의 헌신이 한 번 더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헌법은 시대와 역사 앞에 유연해야 합니다." 발언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야당은 즉각 출마 자격 부존재 확인과 사퇴를 요구했고, 법조계와 대학가에서 규탄 성명이 잇따랐다. 윈필드는 당 대표직을 사퇴하며 "나는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짧은 성명만을 남겼고, 민주공화당은 사실상 분열 상태에 들어갔다. === 조국의 방패와 정치폭력의 현실화 === 같은 시기, 베인브리지를 지지하는 극우 세력은 급속히 과격화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조직이 '''[[조국의 방패]](Patriot's Shield)'''였다. 조국의 방패는 1979년, [[비달 파브르]] 군정 붕괴 이후 숙청된 퇴역 군인과 군정기 치안조직 출신 인사들이 결성한 반공·권위주의 성향 단체였다. 결성 초기에는 소규모 향우회 성격이었으나, 4.13 이후 정권이 반정부 시위에 대응할 민간 동원 자원을 필요로 하면서 급성장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지방 지부를 통해 사실상 준관제 조직으로 기능했다. 특히 [[마테르 전쟁]] 종전 후 제대한 병력 상당수가 복귀와 동시에 실업 상태에 놓이면서 조직에 대거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조직원의 무장 수준과 실전 경험이 단기간에 급상승했다. 3.29에 사용된 침투 경로 설정과 실내 제압 대형이 정규군 교범과 흡사하다는 점은 뒷날 수사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 1989년 2월, 의회가 3선 반대 결의안을 상정하자 조국의 방패 중앙조직은 이를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내부 지령을 통해 의회에 대한 직접 행동을 독려했다. 베인브리지가 폭력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이 시점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가 이를 단 한 차례도 단죄하거나 자제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 평가였다. == 전개 == === 3월 26일 === 1989년 3월 26일, 루이나 전역에서 사상 초유의 규모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No More King"''', "루이나는 군주제가 아니다", "헌법을 지켜라"는 구호가 하루 만에 전국 도시의 광장을 메웠다. 이 시위는 특정 정당이나 단일 단체가 조직한 것이 아니었다. 벨포르를 포함한 100여 개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집회에는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계, 노동조합, 법조계가 폭넓게 참여했다. 벨포르에서는 약 40만 명이 시청 광장과 리버티 거리 일대에서 평화 행진을 벌였다. 참가자들은 침묵 속에 헌법 낭독문을 들었고, 의사당을 향해 검은 리본과 백합을 던지며 비폭력적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수천 명의 변호사가 법복을 입은 채 "법 위의 권력은 없다"고 외쳤고, 학생들은 "우리는 왕을 뽑은 적이 없다"는 손팻말을 들었다. 콜마르, 오보레, 사보레, 크레테, 롱비치, 나보레, 헬모르 등지에서도 십만 명 단위의 시위가 이어졌다. 오보레에서는 대학 교수단이 성명을 통해 "헌법은 계약이다. 대통령은 계약의 당사자이지 계약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오후, 벨포르 외곽 자치구청 광장에는 약 3천 명의 조국의 방패 지지자들이 모여 별도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대통령을 지켜내자", "의회는 썩었다", "헌법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쳤고, 현장에서 낭독된 성명서의 수위는 매우 높았다. > '''"국민은 대통령을 배신하지 않는다."''' > 루이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거짓 헌법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대통령은 선출된 국민의 대표이며, 국민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다. > 거리로 나선 자들은 조작된 선동에 현혹된 자들일 뿐, 진정한 시민이 아니다. > 의회는 권력을 독점하고 대통령의 헌신을 가로막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쿠데타이며, 우리는 대통령과 국가를 수호할 것이다. > 피를 흘리게 된다면, 그 책임은 국민을 기만한 자들에게 있다. 성명 발표 직후 일부 참가자들이 도심으로 이동하던 'No More King' 시위대와 마주치며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구호 대결로 시작된 다툼은 깃발 뺏기와 몸싸움으로 번졌고, 일부가 쇠막대기와 철제 피켓을 사용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경찰이 개입해 해산시키기까지 최소 17명이 부상했다. === 3월 27일 === 이튿날, 베인브리지는 대통령궁 정원에서 생중계된 짧은 회견을 통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도 루이나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모든 시민에게 감사한다"며 말문을 열었고, 곧바로 전날 충돌의 당사자였던 조직을 직접 언급했다. > "어제 일부 시민들이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충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국의 방패를 포함해 우리 체제를 지키려는 모든 애국적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국가를 지키겠다는 그 용기와 책임감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입니다." 이는 헌법 수호를 외친 시위대보다 자신을 위해 무장 시위를 벌인 극우 집단을 두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회민주당 대변인 마르셀 가르니에는 당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이를 "헌정질서에 대한 정면 공격이자, 폭력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비판했다. > "리처드 베인브리지는 더 이상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 폭력을 승인했고, 헌법을 무력화하고 있다. 어제 조국의 방패가 쇠파이프를 들고 시민을 공격했음에도 대통령은 그들에게 '고귀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독재자의 언어다." 사회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에멧 보숑은 긴급 본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대통령이 폭력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즉각 탄핵 절차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벨포르 타임스》는 사설에서 "만약 대통령이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더 큰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내란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그날 밤, 의사당에서 예정된 비공개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사회민주당 의원 '''에밀 라로슈'''의 차량이 의사당 북측 출입구 인근 골목에서 정체불명의 남성 네다섯 명에게 공격당했다. 이들은 차량에 계란과 돌을 던졌고, 그중 한 명은 쇠파이프로 조수석 유리를 내리치려 했다. 운전기사가 후진으로 현장을 벗어나 라로슈는 다치지 않았으나, 앞유리 일부가 파손되고 뒷문에 둔기 자국이 남았다. 현장에서 체포된 3명 중 2명은 조국의 방패 지부 활동 이력이 확인되었으며, 경찰 조사에서 "의원들을 쏴 죽여야 나라가 산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민주당 대표단은 긴급 성명을 냈다. > "대통령이 법을 부정하고 폭력을 미화한 순간, 그 지지자들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오늘은 의원의 차량이지만, 내일은 본회의장일 수 있다." 이 사건은 정국을 법적·정치적 대립에서 실질적 물리적 위협의 단계로 전환시킨 분기점이 되었다. 훗날 많은 언론은 "3.29를 향한 시계는 이미 이때 돌이킬 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 3월 28일 === 3월 28일, 전날의 담화에 대한 반발이 폭발하며 26일보다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벨포르 도심에는 약 495만 명이 운집해 시청 광장부터 대법원 앞 도로, 의사당 남문까지 전 구간을 메웠다. 콜마르, 롱비치, 오보레, 크레테 등 80여 개 도시에서도 중고등학생부터 퇴역 군인까지 폭넓은 시민이 참여했다. 대통령궁에서는 강경 대응 지시가 내려졌다. 베인브리지는 내부 지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제는 끝장을 볼 때다. 그들이 국가를 거부한다면, 국가는 그들을 멈춰야 한다. 더는 물러서지 말라. 해산시키고, 필요하면 구금하라." 그러나 이 명령은 현장에서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벨포르 시경찰청장과 각 도시 경찰 책임자들은 "현장이 과열될 경우 대규모 충돌과 사망자 발생이 불가피하다"며 진입을 유보했다. 일부 시위대가 의사당 울타리를 넘으려 했을 때도 경찰은 방패벽만 세우고 진압봉과 체포조를 투입하지 않았으며, 시위대 또한 비폭력 수칙을 자발적으로 유지해 대규모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찰 상층부가 강경 진압 시 정권의 정당성이 무너질 것이라 판단해 의도적으로 소극적 대응을 택했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경찰노조는 이날 이후 "우리는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정권과 명백히 거리를 두었다. '''오후 4시 12분''', 벨포르 도심 루테랑 거리에서 루이나 현대사 최초의 자동화기 무차별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집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시민 무리를 향해, 조국의 방패 소속 20대 남성 조직원 한 명이 불법 개조된 AR-15 소총을 들고 루테랑 거리와 페르낭 거리 교차지점의 고가 주차장 출입구 위에 나타났다. 그는 약 60초 동안 200여 발을 난사했다. '''시민 31명이 사망하고 52명이 총상 또는 파편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17세 고등학생 아델린 브루네, 41세 상점 직원 이본 트르농, 63세 퇴직 공무원 레몽 바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 그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 "공화국은 이미 끝났다"는 말을 반복하며 저항했다. 소지품에서는 '의회를 해체하라', '사민당을 숙청하라'는 내용의 유인물, 조국의 방패 중앙조직 명의의 문서, 추가 탄창 3개와 소형 권총 1정이 발견되었다. 시민이 거리에서 정치적 주장 하나로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사실이 전국에 중계되자, 시민사회와 야당, 언론은 거의 동시에 대통령 책임론을 공식화했다. > "대통령은 불과 하루 전, 이 집단을 '고귀하다'고 칭송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시민의 피다. 그는 오늘을 기점으로 더 이상 합법적 통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궁은 사건 이후 18시간 동안 어떤 언급도 내놓지 않았다. === 3월 29일 === ==== 방탄복을 입은 의회 ==== 3월 29일 오전,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신변보호 요청을 공식 제출했다. 전날 총격범의 소지품에서 의원 명단이 적힌 문서가 발견되어 언론에 공개된 직후였다. 당은 시경찰청, 내무부, 대통령 비서실, 의회의장실에 각각 공문을 보내 의사당 출입 통제 강화, 의원 차량 동선 보호, 무장 경호인력 배치, 금속탐지 장비 운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요청을 모두 거부하거나 묵살했다.''' 경찰은 경비 자원 부족을 이유로 현장 배치를 거절했고, 대통령실은 논평을 내지 않았으며, 상원의장실은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의사당 내부 경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이를 행정적 무능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에 따른 조직적 방기로 해석했다. 당일 아침 비공식 총회에서 원내대표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 "정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고, 우릴 포기했다. 아니, 어쩌면 원한 걸지도 모른다." 이날 오전, 사회민주당 의원 대다수는 사복 위에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하고 본회의장에 출석했다. 일부는 민간 경호원을 대동했으며, 경보기와 응급 키트를 소지한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420><tablebordercolor=#4a0000><nopad> [[파일:방탄상원단.png|width=100%]] || ||<bgcolor=#f5f5f5,#2d2f34> {{{-1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하고 의사당에 도착한 사회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맥클레인}}} || 이 장면은 국내외 언론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벨포르 타임스》는 이날 사설에서 이렇게 평했다. > "루이나의 공화국은 오늘, 의원들이 방탄복을 입고 입장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 북문 돌진 ==== 오전 10시에 개의한 '대통령 3선 반대 결의안 본회의'는 대통령의 불출석 속에 무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개의 39분 뒤, 의사당 북쪽 루테랑 교차로의 검문초소에서 긴급 무전이 날아들었다. > "밴 차량 한 대, 회색, 번호판 없음. 정지 요구 불응. 북문 방면으로 고속 진입 중. 의도적 돌진 가능성 있음. 즉시 대응 필요. 반복한다. 의도적 돌진 가능성 있음." > ---- > {{{-1 오전 10시 39분, 순찰차38 발신 무전}}} 당시 북문은 1차 차단봉, 2차 대전차 배리어, 마지막 철제 스파이크 매트로 구성된 3중 방호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배리어는 그날 아침 의원 차량 통과를 위해 일부 구간이 일시 해제된 상태였고, 원격 작동식 스파이크 매트는 초기 반응이 늦어 제때 전개되지 못했다. 현장에 배치되어 있던 의회경비 소속 7명은 차량이 경고 방송과 수신호에 전혀 반응하지 않자 즉시 실탄 사격에 들어갔다. 1차 경고사격 9발 중 3발이 앞바퀴에 명중해 운전석 쪽 타이어가 찢어졌고, 차량은 짧게 중심을 잃고 도로 중앙에서 휘청였다. 그러나 차량은 멈추지 않았다.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고 손은 핸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량은 찢어진 바퀴로 노면을 갈아내며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2차로 운전석 전면유리를 조준한 6발이 발사되어 2발이 명중했으나, 운전자는 고개를 숙인 채 가속페달을 놓지 않았다. 이 시점에 현장 경비 일부는 이것이 단순 침입이 아니라 자폭 공격이라고 판단했다. '''오전 10시 42분''', 차량은 차단봉을 들이받고 경내로 진입한 뒤 돌계단을 타고 올라 정문 정중앙 기둥 아래에 정면 충돌했다. 충돌 직후 차량 하부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몇 초 만에 차량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폭압으로 북측 전면 유리창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인근 복도에 있던 보좌관과 경비 3명이 파편에 부상했다. 회의장 천장 조명 일부가 흔들리며 꺼졌고, 일부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바닥에 엎드리는 장면이 생중계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연기가 본회의장 출입구를 통해 유입되자 비상 대피로를 아는 일부 의원은 지하 계단으로 퇴피했으나, 다수의 의원과 직원은 건물 구조를 숙지하지 못한 채 복도를 서성였다. 3분 후 도착한 소방대가 진화를 시작했지만 차량 내부의 소형 연료통이 2차 폭발을 일으키며 화염이 다시 확산되었다. 차량이 명백한 자폭 수단이었음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 무장 난입 ==== 정문 전면부가 마비되고 경비 병력이 불길과 파편으로 일시 후퇴한 그 틈을 타, 조국의 방패 무장조직원들이 사전에 계획된 경로로 침투를 개시했다. 이들은 이미 의사당 북서쪽 건설자재 보관고 인근 하수로를 통해 건물 기초층까지 진입해 있었다. 무장 폭도들은 불법 개조 AR-15와 M1911 권총, 수제 연막탄을 휴대했고, 일부는 전투복에 탄약 벨트와 방탄조끼까지 갖춘 상태였다. '''10시 44분''', 본회의장 후방 출입구에서 첫 발포가 있었다. 폭도 한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연속 사격을 가했고, 정문 지원을 위해 이동 중이던 경찰 2명이 복부와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어 10시 45분부터 50분 사이 폭도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본관 점거를 시도했다. 한 무리는 기념홀을 통해 본회의장으로, 다른 무리는 언론실과 의원 회의실로, 나머지는 3층 관람석을 통해 상부를 확보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의회는 배신자들의 집합소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본회의장에 있던 사회민주당 의원 83명 중 다수는 방탄복을 착용한 채 대피 중이었으나, 일부는 복도에서 연막탄 연기에 휩싸여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하원의원 '''뤼시앵 도네'''가 기념홀 계단에서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고, 의원 보좌진 1명이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했다. 공보실 직원 1명은 상반신에 3발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 경찰은 외곽에서 진입을 시도했으나 폭도들이 복도 벽면을 엄폐물 삼아 조준 사격을 퍼부어 수차례 저지되었고, 11시가 가까워지도록 실내 완전 진입은 지연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의원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 "우리는 회의장이 아니라 도살장에 앉아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불꽃이 튀고, 복도에서는 사람들이 쓰러졌다. 누가 우리를 구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 진압 ==== 차량 자폭과 무장 난입이 확인되자 법무부 경찰국은 대테러 대응 프로토콜 '''코드 081-F'''를 발동했다. 벨포르 시경찰청 특수기동대(SRT)와 [[광역수사국|광역수사국(MIA)]] 공공안보전술팀이 긴급 출동해 진입 작전에 착수했다. '''오전 11시 04분''', SRT 1·2팀이 남서측 계단과 후방 입구로 동시 진입했고, 동시에 옥상에서 MIA 저격팀이 지원 사격을 개시했다. 특공대는 건물 내부에서 전술적으로 분산해 짧고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폭도 2명이 사살되고 4명이 현장 체포되었으며, 나머지는 잔여 연막 속에 은신하거나 항복 의사를 표명했다. 본회의장 인근에 잠입해 있던 중무장 용의자 3인도 섬광탄과 전기충격기로 제압되었고, 이들이 소지한 연장 탄창과 수류탄이 회수되었다. 약 42분간의 교전 끝에 '''오전 11시 46분''' 의사당은 완전히 제압되었다. 특공대는 건물 전체를 봉쇄한 뒤 폭발물 탐지견을 동원해 2시간에 걸친 정밀 수색을 진행했다. 이 작전으로 특공대원 3명이 부상했고, MIA 대원 1명이 연기 흡입으로 후송되었다. 훗날 조사청문회에서 지휘부는 이렇게 보고했다. >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순간, 루이나 공화국의 생명이 경계선 위에 있었다." ==== 이행되지 않은 계엄 ==== '''오후 12시 20분''', 베인브리지는 국무회의를 소집하지 않은 채 벨포르 특별시 일원에 계엄을 선포하고, 수도방위사령부에 의사당과 방송국, 시청 일대에 대한 병력 전개를 지시했다. 명분은 "무장 세력에 의한 국가기관 마비의 수습"이었으나, 의사당은 이미 34분 전에 완전히 제압된 뒤였다. 국방참모총장은 이 명령을 위헌 명령으로 판단하고 이행을 거부했다. 참모본부는 계엄 선포에 필요한 국무회의 심의와 의회 통고 절차가 전혀 이행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들었고, 수도방위사령관 역시 병력 출동 명령을 접수하지 않았다고 회신했다. 11년 전 [[10.10 군사반란]] 당일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병력 동원 중지를 명령했으나 어느 부대도 응하지 않았던 것과 정확히 대칭되는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이 순간은 이후 루이나 정치사에서 자주 인용된다. '''이 계엄 선포와 병력 동원 시도는 뒷날 재판에서 베인브리지에게 내란수괴 혐의를 적용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극우조직에 대한 방조를 넘어, 국가원수 본인이 헌법 절차를 무시하고 군사력으로 헌정질서를 뒤집으려 한 직접적 실행행위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 탄핵소추 ==== 진압이 끝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회민주당과 일부 중도 성향 무소속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재집결했다. '''오후 12시 58분''', 사회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에멧 보숑이 본회의석에 서서 선언했다. > "우리는 방금, 루이나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려는 시도를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명령하지 않았을지언정, 이 모든 사태의 도화선은 그의 야욕과 침묵, 그리고 방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루이나 공화국의 이름으로, 제25·26대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에 대한 탄핵소추를 이 자리에서 정식 발의합니다." 보수 야당 [[공화연합(루이나)|공화연합]]은 당론 없는 자유투표를 선언하며 초당적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당 대표 오스틴 R. 콜빌은 오후 1시 12분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 "루이나 헌정사에 오늘처럼 어두운 날은 없었습니다. 총성과 연기 속에서 의회가 침탈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정당 이전에 국민의 대의기관임을 절감했습니다. 공화연합은 오늘의 사태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저 역시 찬성표를 던질 것입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민주공화당의 이탈이었다. 1.10 선언 이후 이미 분열 상태였던 민주공화당은 이날 오후 의원총회에서 당론을 정하지 못했고, 결국 재적 47명 중 38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탄핵소추안은 같은 날 저녁 하원 재적 3분의 2를 크게 넘는 찬성으로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에 송부되었다. === 3월 30일 === 대통령 탄핵심판은 통상 수 주에서 수 개월에 걸쳐 진행되나, 이번 사안은 헌정질서 붕괴와 안보 위기가 겹친 이례적 국면이었다. 헌법재판소는 긴급 회의를 통해 특별 심리절차를 가동하고, 사건 접수 12시간 만인 3월 30일 오전 9시 전원 재판관 회의를 소집해 즉시 심리를 개시했다. 심리는 대통령 본인의 불출석과 변호인의 불응으로 통상의 방어권 보장 절차가 일부 생략된 채 진행되었으나, 의회 제출자료, 국정기록, 공공 영상기록, 전날 사태에 대한 경찰과 광역수사국의 공식 보고, 그리고 '''국방참모본부의 명령 거부 회신 사본'''이 증거로 채택되었다. '''오후 5시 42분''', 헌법재판소는 전원일치로 탄핵 인용을 선고했다. 결정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 "피청구인은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음에도, 국가 최고법의 명문조항을 공공연히 위반하고 개인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국가기관 간 대립을 조장하였다. 위헌적 시도를 비판한 의회에 대한 폭력적 공격이 발생한 뒤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관련 극우단체를 두둔하여 반헌법적 행위를 방조하였다. 나아가 헌법이 정한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아니한 채 계엄을 선포하고 병력 동원을 지시하였는바, 이는 법치주의와 권력분립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서 파면은 불가피하다." 헌법재판소장 에드윈 마샬은 선고 직후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정치인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헌법에 따라 공직자의 권한 남용을 단죄한 것입니다. 오늘의 판결은 단호한 메시지입니다. 루이나의 대통령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대통령 권한은 헌법에 따라 하원의장 에밀리아 콘웨이가 대행했으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즉각 조기 대선 절차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루이나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사법부의 직접 파면으로 물러난 전례로 기록되었고, 헌법학계는 이날을 "헌법이 마지막으로 작동한 날"이라 평가하게 되었다. 같은 날, 내무부와 법무부는 공동 명령문을 통해 전국 극우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발동했다. > "조국의 방패를 비롯한 무장 극우조직들은 대통령의 위헌적 3선 시도를 옹호하며 의회와 국민의 대의기관에 직접적 위해를 가하였다. 이들은 민주주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폭력집단으로 간주되며, 이에 관련 조직에 대한 수사·검거·해산 명령을 전국 경찰기관 및 광역수사국에 일제히 하달한다." 벨포르, 오보레, 크레테, 사보레 등에서 동시에 검거작전이 개시되었다. 무장저항 가능성을 고려해 특공대와 폭발물 처리반, 헌병대 예비인력까지 동원되었으며, 조국의 방패 중앙본부와 백색결의단(White Resolve), 루이나진군연대(Ruina March Union) 등의 거점에 야간 급습이 진행되어 이틀간 148명이 추가 체포되었다. == 수사와 재판 == === 베인브리지 재판 === 1989년 4월 8일, 베인브리지는 크레테 외곽의 민간 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 순간까지 "나는 루이나를 지켰을 뿐"이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검찰은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방조, 헌법파괴, 직권남용, 불법 계엄 선포 등 총 9개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전직 국가원수가 내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최초의 사례였다. 재판은 벨포르 대법원 산하 국가형사특별합의부에서 특별공개 재판 형식으로 열렸다. 첫 공판은 4월 21일이었고, 이후 총 23차례에 걸쳐 증언과 자료 제출, 피고인의 진술이 이어졌다. 기소 측은 세 가지를 핵심으로 삼았다. 첫째, 대통령 직권을 이용한 고의적 헌법 위반. 둘째, 3월 27일의 지지 발언과 3월 29일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폭력에 대한 정치적 방조.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3월 29일 오후의 불법 계엄 선포와 병력 동원 시도'''였다. 국방참모총장과 수도방위사령관이 법정에 출석해 명령 수령과 거부 경위를 증언하면서, 사건의 성격은 "폭동의 방조"에서 "국가원수 본인의 내란 실행"으로 확정되었다. 피고인으로 전환된 조국의 방패 조직원 일부는 테러 전날 대통령 측 인사로부터 "의회는 민의를 거스른다",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전 보좌관은 대통령이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내가 한 번 더 하는 것만이 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말하며 시민의 희생도 불가피하다고 언급했다고 진술해 파문을 일으켰다. 1989년 7월 25일, 벨포르 대법원은 베인브리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 "피고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찬탈했고, 국민을 분열시켰으며, 공포에 기반한 통치를 조장하였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과오가 아니라 국민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국가 전복을 시도한 내란행위에 다름 아니다. 헌법은 무력에 무너지지 않는다." {{{#!folding [ 판결문 전문 펼치기 · 접기 ] '''《1989년 7월 25일, 루이나 벨포르 대법원 국가형사특별합의부 판결문》''' 피고인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에 대한 내란, 헌정질서 파괴, 살인 방조 및 직권남용 사건 본 재판부는 오늘, 루이나 헌정사에서 가장 무겁고 참담한 재판의 마지막 장을 마주하고 있다. 이 나라의 헌법은 한 세기 가까이 수많은 위기를 딛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를 다져 왔다. 그 기초 위에 세워진 대통령제는 국가의 수장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절대적인 책임과 준법의무를 요구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선 피고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는, 그 권한을 법의 이름으로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사적 야망에 의해 찬탈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이 재판부가 특히 무겁게 여기는 것은 피고의 이력이다. 피고는 군정에 맞서 두 차례 투옥되고 국외로 쫓겨났던 사람이며, 그 이력으로 국민의 신임을 얻어 헌정 회복의 첫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가 무너뜨린 것은 자신이 세운 것이었다. 이 사실은 정상참작의 사유가 아니라 가중의 사유다. 헌법이 어떻게 죽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피고는 헌법이 정한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에서, 제70조와 부칙 제3조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세 번째 임기를 요구하였다. 이 출마 선언은 선거 전술이 아니라 헌법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공화국 체제를 인격으로 대표하는 자가 그 체제를 부정한 모순적 죄악이었다. 나아가 피고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극우 폭력단체와 결탁하였다. 이들은 1989년 3월 28일 시민을 향해 자동화기를 난사하여 31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튿날 의사당에 차량을 돌진시키고 무기를 들고 난입하여 25명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다수의 증거와 진술은, 피고가 이 사태의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였음을 명확히 입증하였다. 무엇보다 피고의 언어는 총보다 위험한 무기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쇠파이프를 든 자들을 "고귀하다"고 불렀고, 헌법을 지키자는 국민 다수의 목소리를 선동으로 매도하였다. 그 말 한마디가 수십 명의 극단주의자에게 폭력을 정당화시켰고, 야당 의원의 차량을 쇠파이프로 내리치는 행동을 정치의 일부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재판부가 피고의 죄를 방조에 그치지 않고 내란의 수괴로 판단하는 근거는 따로 있다. 1989년 3월 29일 12시 20분, 의사당이 이미 완전히 제압된 뒤, 피고는 국무회의의 심의도 의회에 대한 통고도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수도방위사령부에 병력 전개를 지시하였다. 이 명령은 사태의 수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종료된 사태를 명분 삼아 군을 동원해 의회를 봉쇄하고 파면을 저지하려 한 것이었다. 국방참모총장과 수도방위사령관이 이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실행이 저지되었을 뿐, 피고의 행위는 헌법기관을 군사력으로 무력화하려 한 내란의 실행행위 그 자체다. 그것이 실패한 것은 피고의 자제 때문이 아니라, 명령을 받은 자들이 헌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본 재판부는 피고에게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였고 국선 변호인단도 선임되었으나, 피고는 "나는 조국을 지켰을 뿐"이라며 사실관계를 시인하고도 반성하지 않았으며, 공화국에 대한 모독적 발언을 지속하였다. 이 재판은 한 개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폭력과 권력 찬탈에 대한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역사적 판단이다. 공화국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공화국을 죽이려 한 자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이에 본 재판부는 피고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루이나 공화국은 어떤 권력도 헌법 위에 설 수 없음을 선언한다. 1989년 7월 25일 루이나 공화국 벨포르 대법원 국가형사특별합의부 주심판사 허버트 프레슬러 }}} 베인브리지는 최종 진술에서 "역사는 나를 오해했다. 나는 국민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주장했으며, 항소하지 않았다. 그는 벨포르 고도보안교도소 7호동에 수감된 채 외부 접견을 대부분 거부했고, 1989년 12월 12일 형이 집행되었다. 유언은 "내 조국은 무릎 꿇지 않았다"였다. 정부는 시신을 국가보안상의 이유로 비공개 장소에 매장했고 장례나 추모 행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일부 극우 잔존세력이 그를 "헌법을 거부한 진실의 순교자"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여론 대다수는 그의 죽음을 "민주주의를 배신한 자의 최후"로 평가했다. === 극단주의 단체 === 광역수사국은 조국의 방패를 포함해 루이나 민병대 연합, 공화국 수호 시민회 등 총 12개 극우 무장단체의 핵심 인물에 대한 전면적인 검거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헌법기관에 대한 폭력적 전복을 시도한 내란음모의 주범으로 기소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560><tablebordercolor=#4a0000><rowbgcolor=#4a0000><rowcolor=#ffffff> 피고인 || 소속 || 혐의 || 선고 || || 마커스 엘트리치 || 조국의 방패 총사령관 || 내란수괴, 살인교사 || 종신형 || || 레이첼 바스킨 || 조국의 방패 || 무기 조달, 반란 계획 수립 || 종신형 || || 빈센트 로메로 || 조국의 방패 || 차량테러 현장 지휘 || 징역 45년 || || 조너선 크릴 || 루이나 민병대 연합 설립자 || 무장조직 구성, 납치 기도 || 징역 42년 || || 하비어 르망 || 공화국 수호 시민회 대표 || 폭력 선동, 언론인 협박 || 징역 30년 || 재판부는 이들이 조직한 집단을 정치적 표현의 일환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실질적으로 군사적 지휘 체계를 갖춘 사설 무장조직이었으며, 그 목적이 헌법기관의 물리적 무력화였다는 점에서 내란을 기도한 반헌정 범죄집단이라는 것이다. 일반 조직원 다수는 집행유예 없이 5~2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공공건조물 파괴·무기 소지·방화·경찰관 폭행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었다. {{{#!folding [ 마커스 엘트리치 판결문 펼치기 · 접기 ] 루이나 공화국 특별재판부는 피고 마커스 엘트리치에 대해 단호히 판결한다. 피고는 1989년 3월 29일 루이나 헌정질서를 유린한 무장 반란의 실행 수괴이며, 국민의 생명과 민주주의 자체를 겨냥한 살상 명령의 발신자였다. 피고는 조국의 방패의 총사령관으로서 수개월에 걸쳐 민간인을 무장시키고, 의회를 공격 대상으로 지목하며, 헌법기관에 대한 공격을 공공연히 선동하고 명령하였다. 1989년 3월 29일 의회의사당 북문에 대한 차량 돌진과 뒤이은 무장 난입으로 25명이 사망하고 61명이 부상한 사건은 피고의 직접적 지휘에 따른 것임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는 법정에서조차 반성하기는커녕 "의회는 배신자들의 둥지이며, 진정한 공화국은 총구에서 시작된다"고 진술하였다. 이로써 피고는 어떠한 민주주의적 가치도 공유하지 않으며,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으려 한 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피고의 사상은 자유가 아니라 파괴의 교리였으며, 그의 조직은 운동이 아니라 무장 반란집단이었다. 이 법정은 다음의 이유로 피고에게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첫째, 피고는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생명과 권위를 직접 침해하였고, 입법 기능을 물리적으로 무력화함으로써 국가 기능 전체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다. 둘째, 피고는 다당제와 언론 자유를 체계적으로 공격하고, 언론인을 위해 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사실에 기반한 보도를 반역행위로 규정하였다. 셋째, 피고는 수사와 재판 전 과정에서 어떠한 반성도 표하지 않았으며, 재판정을 선전장으로 삼았다. 이는 법의 권위에 대한 조롱이자 공화국의 정당한 사법절차에 대한 부정이다. 이에 이 법정은 피고 마커스 엘트리치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이 선고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루이나 공화국이 선언하는 헌법적 징벌이다. 공화국은 피를 흘렸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 == 영향 == 3.29 헌정위기는 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헌정 붕괴 사태였으며, 그 여파는 정치·사회 전반과 국제사회에 걸쳐 나타났다. 국내적으로는 헌정 체제의 근본적 재설계가 단행되었다. 1989년 여름부터 진행된 개헌 논의는 그해 가을 국민투표를 거쳐 '''[[제6공화국(루이나)|제6공화국]]''' 헌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개정 헌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직선제 도입 및 임기 4년, 1회에 한한 연임 허용 * 연임 제한 조항을 개정 대상에서 제외하는 영구조항화 * 내란 및 반헌법 행위자는 사면 여부와 관계없이 피선거권을 영구 상실 * 국가원수가 내란에 가담하거나 지시한 경우 자동 탄핵 및 형사처벌 대상임을 명문화 * 계엄 선포 요건 강화 — 국무회의 심의와 의회 즉시 통고를 효력 발생 요건으로 규정 사회 전반에는 반극단주의 흐름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의회는 「정치폭력방지법」, 「무장극단조직 해산법」, 「내란음모 및 폭동가담자의 공직 제한법」을 신속히 통과시켰고, 조국의 방패와 연계된 38개 단체가 일괄 해산되었으며 그중 9개 조직이 테러단체로 공식 지정되었다. 교육과 기록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에 헌정 수호와 시민의 역할을 다루는 단원이 신설되어 전국 의무 수업으로 지정되었고, 루이나 국립기록원은 '3.29 특별기록관'을 개관했다. 매년 3월 29일은 '''헌법수호의 날'''로 지정되어 국가기념일로 정착했다. 의회 경비 체계도 전면 개편되었다. 의사당 경비는 기존 경찰 소관에서 의회 직속 '''의회안전대(CPS)'''로 이관되었고, 외곽 순찰에 드론과 열감지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는 [[토머스 J. 윈필드]]가 당선되어 제2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10 선언의 당사자였으나 개헌을 완수하지 못했던 그가 내란 이후의 재건을 맡게 된 것은, 루이나 정치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된다. 국제적으로도 파장이 컸다. 랜드해협 안보질서의 중추국가에서 벌어진 사태였기에 동맹국들의 충격이 컸고, 동시에 권위주의 진영은 이를 "서방식 민주주의의 파산"으로 규정해 선전에 활용했다. 루이나 외교부는 위기 이후 민주주의 정상화 조치와 헌법 개혁 경과를 국제사회에 설명하는 이른바 '헌정회복 외교'를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3.29 헌정위기는 루이나 정치체제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나, 동시에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고 민주주의적 복원력을 입증한 사건으로 남았다. == 각국 반응 == === 미합중제국 === 국무부는 3월 30일 긴급 성명을 통해 "루이나에서 발생한 의회 폭력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며 "민주적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어떤 시도에도 명백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루이나 주재 대사관은 탄핵 직후 국기를 조기로 내렸으며, 이후 헌정회복 이후의 재건 지원 프로그램을 공식 제안했다. === 플로렌시아 공화국 === 외교부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오늘, 우리는 충격과 분노를 감출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플로렌시아 언론은 베인브리지를 "민주화 운동이 낳은 가장 잔혹한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정부는 루이나와의 고위 외교 접촉을 한 달간 잠정 중단했다. === 빌베른 왕국 === "헌정파괴 시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즉각적인 탄핵을 환영했다. 빌베른 하원의장은 루이나 의회의 탄핵 소추를 "역사적 책임의 실현"이라고 평가하며 인권 감시단 파견을 제안했다. === 사비에트 연방 === 공식적으로는 침묵을 유지했으나, 국영 언론 《노보이스티》는 "루이나식 의회민주주의의 파산"이라며 체제 선전에 활용했다. 외무성 고위 관계자는 비공식 인터뷰에서 "루이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부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조롱했다. === 청평대제국 === 국가방송을 통해 "루이나의 위선적 자유민주주의는 결국 폭력으로 귀결되었다"고 선전했다. 일부 고위 관료는 "서방의 이중적 가치가 루이나를 파괴했다"고 비난했으며, 외교적 비난 성명을 UN 대사 경로로 우회 전달했다. === 마베라 연방 ===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헌법에 반한 권력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고 언급하며 루이나 시민들의 결단을 조심스럽게 지지했다. 마베라 내 종교단체들은 희생자를 위한 대규모 추도예배를 진행했다. === 유고랜드 공화국 === "시민에 대한 총기 난사는 인류의 공적(公敵)"이라며 조국의 방패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자국 내 극우단체에 대한 대대적 수사를 개시하며 "우리 안의 3.29를 경계하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 대한민국 === 외교부는 "루이나의 헌법 질서가 위협받은 상황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의회가 이를 민주적 절차로 수습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여야 합의로 '루이나 민주주의 수호 결의안'을 채택했고, 일부 의원은 의회를 향한 차량 돌진 테러에 대해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언론과 시민사회에서는 방탄복을 입고 의사당에 출석한 사회민주당 의원들에 대해 "진정한 헌법 수호자"라는 평이 이어졌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외무성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서방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라며 "루이나 지배계급 내 모순이 폭발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성명은 베인브리지와 그 지지자들을 "파쑈 반동분자"로 규정하는 한편, 루이나 경찰과 군의 대응을 두고는 "짜고 친 연극"이라 조롱했다. === 일본 === 외무성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협"이라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총리는 성명을 통해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루이나 의회의 책임 있는 대응을 환영하며, 일본은 민주주의의 동반자로서 루이나 국민과 함께한다"고 밝혔다. 일부 보수 언론은 베인브리지의 3선 시도를 "전형적인 권력 연장의 야욕"으로 규정했다. == 대중매체에서 == === 영화 === '''《헌정의 날》(1995)''' : 벤자민 페르드 감독의 정치 스릴러. 사건 당일을 생존자 시점에서 재구성했으며, 폭도들의 난입 속에서 탈출하는 가상의 사회민주당 의원을 통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3월 29일》(2004)''' : 루이나 독립영화계의 대표작. 뉴스 클립, 감시카메라 영상, 허구적 인터뷰를 혼합해 사건 당일을 재구성했다. 일부 장면이 실제 기록물처럼 편집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명령》(2016)''' : 3월 29일 오후, 계엄 명령을 받은 군 수뇌부의 두 시간을 다룬 밀실극.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기까지의 판단 과정을 밀도 있게 묘사해 루이나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수상했다. === 드라마 === '''《비상통로》(2018, RBC)''' : 의원 보좌관을 주인공으로, 사건 하루 전부터 진압 직후까지를 다룬 정치 서스펜스. '''《헌법 제70조》(2023, RBS)''' : 헌법재판소가 하루 만에 탄핵을 결정한 과정을 각색한 법정 드라마. "국가는 언제 독재자에게 침묵했는가"라는 대사가 명대사로 남았다. === 문학 === '''《붉은 수도》(1990, 가브리엘 케인 저)''' : 조국의 방패에 가담한 한 청년의 시선으로 당시 루이나 사회를 해부한 정치 팩션. 검열 논란 끝에 3년 만에 출간되었다. '''《방탄복 위의 민주주의》(2005, 에드워드 샐리번 저)''' : 당시 사회민주당 의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이후 교육용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 게임 === '''《루이나: 디센트》(2021, TRF게임즈)''' : 루이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3.29 헌정위기가 시나리오 중 하나로 등장하며, 플레이어는 대통령 진영, 의회 진영, 중립 시민 세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고증 면에서 호평을 받았으나 폭력 미화 논란도 일었다. === 학술적 인용 === 3.29 헌정위기는 국제 정치학계에서 민주주의 퇴행과 극단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미합중제국의 정치학자 대니얼 R. 오크허스트는 저서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23)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루이나의 1989년 사태는 헌정주의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대통령과 그를 떠받치는 극단적 소수가, 제도적 다수파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물리적 테러로 위협하며 헌정질서를 파괴한 그 전개는, 이후 수많은 국가의 민주주의 위기에서 반복되는 청사진이 되었다." 다만 그는 루이나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된 희귀한 사례"로 분류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 "루이나가 달랐던 점은 세 가지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당리당략을 넘어 탄핵에 협력했고, 경찰이 시민을 향한 진압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군이 대통령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체제를 지킨 것은 영웅이 아니라, 명령을 거부한 평범한 공직자들이었다." == 여담 == * 3.29 헌정위기는 현직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해 3선을 선언하고, 이에 반대한 의회가 물리적 공격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후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은 개정 자체가 금지되는 영구조항이 되었다. * 사건 직후 벨포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의사당 주변을 청소하고 파괴된 바리케이드를 임시 보수했다. 이 시민참여형 회복 캠페인은 '''벨포르의 의지(Belfort Will)'''로 알려져 루이나 시민사회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 테러에 사용된 차량은 트라팔가사의 SUV였으며, 이로 인해 트라팔가는 극우 단체와의 유착 의혹에 휘말렸다. 내부 고발자가 일부 중역의 정치 후원을 증언하면서 임원 3명이 해임되고 회사는 대대적인 윤리감사를 실시했다. * 본회의장에 입장한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정장을 벗고 방탄복 위에 당 패용만 착용한 채 등장했다. 이 장면은 "민주주의는 말보다 먼저 생존해야 한다"는 문장과 함께 루이나 정치의 상징 중 하나로 남았다. * 탄핵 직후 루이나에서는 '#NoMoreKing', '#329NeverForget' 등의 구호가 널리 확산되었고, 매년 3월 29일에는 의사당 정문 앞에서 헌정 수호 추모식이 열린다. * 사건 당시 본회의장에 있던 속기사는 상황을 끝까지 기록했다. 해당 속기록은 국립기록원에 보존되어 일부가 공개되었으며, "의장이 방탄복을 입은 채 의사봉을 두드리며 의결을 강행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 뒷날 영화화되기도 했다. * 재판부가 선고 당시 남긴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하는 순간, 공화국은 무너진다"는 구절은 현재 루이나 사법연수원 대강당 벽면에 새겨져 있다. * 마커스 엘트리치와 함께 검거된 극우 인사 중 일부는 자살, 망명, 신원 은폐를 시도했으나 광역수사국의 광역 수사와 국제 공조로 대부분 체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23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내란죄와 살인죄로 기소된 17명은 무기징역 이상을 선고받았다. * 베인브리지의 유언 "내 조국은 무릎 꿇지 않았다"는 이후 극우 잔존세력의 선동 문구로 사용되어 불법화되었다. * 3월 29일 오후 국방참모총장이 계엄 명령을 거부하며 참모본부에 남긴 "이 명령은 헌법에 근거가 없다"는 한 줄의 회신은, 1978년 [[10.10 군사반란]] 당시 [[리처드 잭슨]] 대통령의 명령이 아무에게도 이행되지 않았던 장면과 대비되어 자주 인용된다. 사회학자 클로에 마이어스는 이를 두고 "루이나 군은 11년 만에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정반대 방향으로 대통령을 배신했다"고 평가했다. * 사건 이후 벨포르 시청 외벽에 새겨진 문구는 현재 리버티 광장의 조형물에도 새겨져 있다. > "우리는 총이 아니라 투표로 나라를 지킨다. 그리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헌법을 수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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