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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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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먼드 조이 최루탄 피격 사건 ==== 에드먼드 조이 피격 사건은 1960년 9월 17일, 벨포르 국립대학 주변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18세 대학생 에드먼드 조이(Edmund Joy, 1942~1960)가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에드먼드는 학내 자치단체가 주도한 ‘비상계엄 해제 촉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 발사체가 직사(直射)로 그의 두개골을 강타하면서 중태에 빠졌고, 병원 이송 중 사망하였다. 사건은 벨포르 시내의 평화적 시위가 정오 무렵 과잉진압으로 전환되며 발생했다. 시위는 교내의 정권 비판 낭독 행사로 시작되었으나, 전투경찰 9개 중대가 대학가 주변을 포위하고 살수차 및 최루탄 발사기를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문제의 발사탄은 표준 사격지침인 '''"40도 이상의 발사각을 확보할 것"'''이라는 규정을 어기고, 시위대 상반신을 향해 직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후일 사진과 언론의 슬로모션 영상 기록을 통해 재차 증명되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폭력 시위 진압 과정의 우발적 사고”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현장 책임자에 대한 문책 없이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조이의 죽음은 오히려 전국적인 추모 시위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9월 19일 벨포르 성 루시아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는 추산 12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으며, 같은 날 루이나 전역 36개 도시에서 촛불시위·묵념행진·학생 철야농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에드먼드 조이는 사망 당시 '''“국가는 시민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사진은 이후 혁명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최루탄 직사 사격을 지시한 현장 지휘관이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권의 무책임성과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사건은 시민혁명 직전 대중의 감정이 임계점을 넘는 결정적 도화선으로 기록된다. 이후 벨포르 시민운동본부는 조이의 죽음 직후부터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할 시간”이라며 전면 항쟁을 선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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