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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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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9일 ==== 1969년 10월 19일, 모라이티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 봉기가 발발했다. 부두 노조의 총파업 선언을 신호로 3만여 명의 군중이 모르나 언덕으로 몰려갔고, 관저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군중에게 총을 겨누지 못한 채 길을 비켜 주었다. 풀려난 모라이티스는 군중과 함께 해안의 올드 파로스 요새로 향했다. 인민군 사령부가 있던 이 요새를 되찾아 군을 장악하고, 방송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계산이었다. 요새의 수비대는 싸우지 않고 무장을 해제했다. 그러나 오후 1시 무렵 북부 병영에서 출동한 장갑차 3대가 요새 앞에 도착했다. 장갑차는 경고 없이 요새 안뜰의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피하려던 사람들이 요새의 성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렸다. 요새를 다시 장악한 병력은 모라이티스와 각료 7명, 부두 노조 지도자 2명을 안뜰 벽 앞에 세워 총살했다. 군이 봉기를 진압하다가 지도자들을 총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도자들을 총살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총살 명령이 사카렐리스에게서 나온 것인지, 현장 지휘관의 독단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카렐리스는 이후 재판에서 "중앙위원회는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지시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모라이티스와 각료들의 시신은 북부 병영에서 소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평의회가 발표한 민간인 사망자는 17명이었으나, 이후의 조사에서는 적게는 40명, 많게는 12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다로 뛰어내린 뒤 실종된 사람이 많아 정확한 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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