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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에트와의 동맹과 결별 === 1950년대 청평의 공업화는 [[사비에트]]의 지원에 크게 기대었다. 1949년 공산화된 사비에트는 청평을 동방의 핵심 동맹으로 여겨 차관과 기술자를 보냈다. 다만 청평이 요구한 500개 이상의 공장 건설은 비현실적이라며 규모를 줄여 승인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사비에트식 중공업 우선 노선을 따라 제철소와 발전소, 기계 공장을 북부 평야에 집중적으로 세웠고, 식민지기에 북산으로 반출되던 광물이 처음으로 청평 자신의 공업에 쓰이기 시작했다. 1956년 두 나라는 청소합작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사비에트가 청평에 탄도미사일과 핵 기술을 이전한다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북산은 이 협정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나 약속된 기술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으로 투자가 낭비되고 청평이 차관 상환을 미루자, 사비에트는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1959년부터 원조를 단계적으로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핵과 미사일 기술은 이전되기 전에 원조와 함께 중단되었다. 여기에 대약진을 둘러싼 노선 갈등, 려우 즈카이의 핵전쟁 발언과 사비에트 지도자 인터루쇼프에 대한 공개적인 조롱이 겹치면서, 1960년대 초 두 나라는 사실상 결별했다. 청평은 이후 독자적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시도했으나, 대기근으로 재정이 바닥나고 문화대혁명으로 과학자들이 숙청되면서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오늘날까지 청평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별은 남쪽 국경의 정세도 바꾸었다. 1961년부터 청평은 사비에트에 맞서 산악 항전을 이어 가던 동사랜드 인민적군에 소총과 박격포를 보내기 시작했고, 1949년 합병을 묵인했던 옛 종주국의 이 전환은 1963년 동사랜드 독립의 한 요인이 되었다. 청평은 동사랜드를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조정 일각에서는 옛 책봉 관계를 의례적으로라도 되살리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동사랜드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고, 이후 두 나라는 사비에트와의 갈등을 공유하는 이웃 공산 국가로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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