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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부 함락과 인민공화국 선포 === 1949년 가을 혁명군은 띠에우리엔을 포위했고, 같은 해 말 도시 안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나 총독부가 함락되었다. 북산 총독은 항복을 선언했고, 20년에 걸친 식민 통치는 끝났다. 1949년 12월 19일 려우 즈카이는 띠에우리엔에 입성해 청평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식민 지배와 봉건 잔재를 함께 타도하고 사회주의적 개혁으로 새로운 청평을 건설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뒤이어 북산의 군인과 관리, 이주민 약 60만 명이 청평을 떠났다. 혁명 정부는 곧바로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북산인과 식민 협력자가 소유하던 토지는 몰수되어 농민에게 분배되었고, 금지되었던 청평어와 전통 문화가 부활했다. 식민 협력자 처벌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옛 총독부 관리와 경찰, 북산 기업과 거래한 상인 수만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인민재판 형식의 공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 일이 많았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토지 분쟁이 협력 혐의로 둔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늦게라도 혁명군에 가담한 군벌과 관료 상당수는 처벌을 피하고 새 정부의 지방 간부가 되었다. 모든 북산인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청평인과 결혼한 북산인과 그 자녀, 식민지에서 태어나 본국에 연고가 없던 이주민 2세, 혁명군에 협력한 일부 기술자 등 수만 명이 청평에 남았다. 이들 북산계 주민은 청평 국적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잠재적 적성 집단으로 감시받았고, 문화대혁명과 청북전쟁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 띠에우리엔 시가전 때 청평 당국이 작성했다는 처형 명부의 첫 번째 범주가 북산계 주민이었다는 조사 결과는, 청평 정부가 명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음에도 이들이 놓였던 처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독립 직후의 청평 사회는 20년 식민 통치의 흔적을 안고 출발했다. 식민지 시기 학교에 다닌 세대는 청평어보다 북산어로 읽고 쓰는 데 익숙했고, 철도와 항만, 광산의 기술 인력 상당수는 북산인이 떠나면서 공백이 되었다. 혁명 정부는 사비에트의 기술 지원과 대규모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 공백을 메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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