𝙇𝘼𝙓 𝙒𝙄𝙆𝙄
최근 변경
최근 토론
임의 문서
도구
최근 변경
사비에트/역사
(편집 요청)
[알림]
문서를 편집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편집 요청으로 이동되었습니다.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로그인된 사용자(이)여야 합니다. 해당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역사 인식 == 사비에트의 역사 서술에는 몇 가지 오래된 쟁점이 있다. 첫째는 분수 서사와 고랜드의 기억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기원전 4세기의 분수 전쟁을 억압에 맞선 '최초의 해방'으로, 이후의 모든 혁명을 그 계승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고랜드는 식민 도시의 반란과 본국의 몰락으로 기억한다. 1979년 고랜드 침공 때 고랜드 측이 사비에트를 '물길을 빼앗으러 온 아랫땅'으로 묘사한 것은, 2,000년 넘은 기원 서사가 현대의 전쟁 선전으로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둘째는 두 혁명의 관계다. 공식 역사는 1917년의 장미 혁명을 '미완의 혁명', 1949년의 붉은 혁명을 '혁명의 완성'으로 짝지어 가르친다. 이 틀에서 1920~1949년의 사랜드 공화국은 실패한 과도기로만 다루어지고, 장미 혁명을 이끈 자유주의자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된다. 공화국 초기의 헌법과 의회 정치를 사비에트 민주주의의 한 원천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1990년대 이후 학계 일부에서 나왔으나 공식 교과서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셋째는 추축국 과거와 인민군 신화다. 사비에트는 공화국 군부 정권의 추축국 가담을 '지주와 장군의 반역'으로 규정하고, 인민군의 저항을 민족 전체의 반파시즘 투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추축국 편에서 싸운 병사와 관료의 상당수가 평범한 징집병과 공무원이었다는 점, 내전 기간 소련의 원조가 인민군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다는 점은 공식 서술에서 흐려진다. 연합국이 내전에 개입하지 않은 것도 사비에트 교과서에서는 '인민의 힘만으로 이룬 승리'의 증거로 쓰인다. 넷째는 노스탈린의 평가다. 1956년 안토노프의 연설은 대정리의 무고한 처형과 개인숭배를 인정했지만, 집단화와 1951년 기근은 1990년대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노스탈린은 오늘날에도 '과오가 있었으나 연방을 세운 지도자'로 평가되며, 노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절반의 평가를 상징한다. 대정리 희생자 수를 두고는 공식 기록과 연구자 추정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 다섯째는 동사랜드 문제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49년 합병을 동사랜드의 자발적 가입으로,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을 '연방의 승인에 따른 평화적 분립'으로 서술하며, 1951~1962년의 봉기와 진압은 '동부 소요'라는 짧은 표현으로만 다룬다. 반면 동사랜드는 1949~1963년을 점령기로 보고 독립 연도를 1951년으로 적는다. 미하일 인터루쇼프 체제 이후 사비에트는 동사랜드를 '역사적 오류'라 부르던 표현을 공식 문서에서 쓰지 않게 되었으나, 합병의 성격에 대한 입장은 바꾸지 않았다. 여섯째는 비밀과 공개의 문제다. 사르다 참사는 28년, 크레포스트와 야스트레브는 30년 가까이 감춰졌다가 재편기와 1990년대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1991년 카멘스키의 실각 이후 정보 공개는 다시 좁아졌고, 고랜드 침공의 결정 과정이나 위성국 개입의 기록 상당 부분은 지금도 비공개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 현대사 연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루이나의 기밀 해제 문서에 기대고 있는 까닭이다. 일곱째는 인터루쇼프 가문의 세습이다. 공식 선전은 미하일의 집권을 능력과 당내 합의의 결과로 설명하지만,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에 걸친 권력은 혁명국가 안의 왕조라는 비판을 받는다. 1,206년의 제정을 무너뜨린 혁명의 나라가 다시 한 가문의 이름 아래 통치된다는 역설은 해외의 사비에트 비판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수사가 되었다. 여덟째는 카스탄족의 역사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슬라브인의 이주 이후 평원의 역사를 남슬라브족 중심으로 서술하고, 카스탄족은 연방을 이루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다룬다. 반면 카스탄족 사회는 스스로를 고대 사랜드의 직계 후손으로 여기며, 제정과 공화국, 연방을 거치는 동안 언어와 자치가 번번이 억눌린 역사를 강조한다. 1989~1990년 언어 집회 이후 카스탄어는 공용어 지위를 얻었지만, 카스탄 역사학의 관점은 연방 교과서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아홉째는 해협 남부에 대한 개입의 기억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63~1965년 해협 남부의 공산화를 각국 인민의 자발적인 혁명으로, 이후의 고문단 파견과 개입을 '형제국에 대한 국제주의적 원조'로 서술한다. 그러나 해협 남부 여러 나라의 체제 비판자와 망명자들은 사비에트의 개입을 민주화를 가로막은 외세의 간섭으로 기억하며, 한 번의 큰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작은 개입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그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27.0.0.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닫기
Liberty
|
the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