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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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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사랜드 공화국/역사]] 문서 참고.}}}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A9F3><rowbgcolor=#00A9F3><rowcolor=#fff> '''시기''' || '''기간''' || '''국가원수·지도자''' || || 임시정부 || 1917~1920 || 밀란 S. 보이노비치 || || 의회 공화정 || 1920~1934 || 보이노비치 → 스타노예비치 || || 군부 정권 || 1934~1944 || 페트코비치 || || 과도정부 || 1944~1949 || 일리치 || 1917년 3월 16일 [[장미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자 공화파 정치인 [[밀란 S. 보이노비치]]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계속하는 한편, 1918년 4월 해방 포고로 1,200년 가까이 이어진 농노제를 폐지하고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땅은 옛 영주의 것으로 남았다. 물은 마을이, 땅은 지주가 쥐는 '반쪽 해방'은 이후 30년 동안 공화국을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1920년 헌법으로 공화국이 정식 출범한 뒤에도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다. 의회는 지주 정당·도시 자유주의 정당·농민당·사회주의 정당으로 쪼개졌고,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4년 동안 내각이 23차례 바뀌었다. 물을 쥔 마을과 땅을 쥔 지주는 평원 곳곳에서 물 파업과 소작 분쟁을 벌였으며, 토지 개혁 법안은 번번이 원로원에서 막혔다.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농촌은 파산했고, 1932년 소작 폭동과 공장 점거가 잇따르는 가운데 [[사랜드 공산당]]이 크게 세를 불렸다. 1934년 5월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위원회]]를 세웠다. 군부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불법화하고 이탈리아식 조합주의를 도입했으며, 1941년 [[추축국]]에 가담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사랜드군은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와 [[루이나]] 원정군에 맞섰고, 후방에서는 [[이오시프 노스탈린]]이 이끄는 [[인민군(사랜드)|인민군]]의 파르티잔 투쟁이 벌어졌다. 1944년 10월 군부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휴전 교섭에 나섰으며,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전쟁 사망자는 약 300만 명에 이르렀다. 종전 뒤 [[스테판 R. 일리치]]의 과도정부가 1920년 헌법을 되살렸지만, 해방구에서 땅을 나눠 준 인민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1946년 3월 총선이 부정 선거로 끝나자 4월 12일 인민군이 총공세에 나서면서 [[붉은 혁명]]이 시작되었고, 1949년 8월 인터그라드 함락으로 과도정부가 무너졌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이 [[사비에트]]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사랜드 공화국은 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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