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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해빙 === 하세가와 쇼이치의 뒤를 이어 1977년 간선으로 선출된 미즈시마 겐지(水島 健二) 대통령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전후 수습과 군 재편을 맡았다. 북산군은 바젤 정전협정에 따라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아래 재편되었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이어진 재편으로 기갑·공수부대의 편제가 바뀌고 장교 교육 과정이 전면 개정되었으며, 개전 결정에 관여한 장성 상당수가 예편되었다. 전쟁의 책임을 진 것은 정치 지도부가 아니라 일부 군 지휘관이었고, 재편은 동시에 군의 무기 체계와 교리를 이전보다 더 깊이 루이나에 묶어 두었다. 전쟁 책임론으로 군부의 권위가 흔들리고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미즈시마 정부는 1979년 긴급조치의 적용을 유예하고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다. 야당 활동이 재개되었고, 대학가에서는 직선제 복원과 하쿠센 조약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해빙의 배경에는 루이나의 변화도 있었다. 1978년 루이나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 군정이 들어서자, 북산 군부는 루이나 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전후 재편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켰다. 그러나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루이나의 군정이 무너지고 문민 정부가 들어서자, 새 정부는 북산 군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인권 문제를 원조 협의의 의제로 올렸다. 이웃 나라에서 시민의 힘으로 군정이 무너진 일은 북산의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고, 북산의 해빙은 이 틈에서 잠시 넓어졌다. 해빙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1년 5월 총선에서 야당이 하원 의석의 40% 가까이를 차지하자, 군정원은 치안 악화를 이유로 긴급조치의 재적용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81년 10월 정부는 긴급조치를 다시 적용하고 야당 지도부 일부를 가택 연금했다. 이를 10월 조치라 부른다. 계엄은 선포되지 않았고 유혈 사태도 크지 않았지만, 첫 번째 해빙은 이로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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