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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고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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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스워스 정부의 증파 ==== 2009년 9월 사회민주당의 리처드 엘스워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엘스워스는 선거 기간 내내 고랜드 전쟁이 방치되었다고 비판하며 "끝낼 수 있는 방식으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취임 직전인 9월 4일 북부 쿤두즈주에서는 탈레반이 탈취한 연료 트럭 두 대를 노린 ISAF 공습으로 연료를 얻으러 모여든 주민을 포함해 최대 179명이 숨졌고, 같은 달 남부에서는 양귀비 단속 경찰을 태운 트럭이 지뢰에 폭발해 23명이 숨졌다. ISAF 사령관 마커스 L. 벤틀리 대장은 9월 말 대통령에게 제출한 평가 보고서에서 "앞으로 12개월 안에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면 탈레반을 이길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최소 4만 명의 증원을 요구했다. 석 달의 논의 끝에 엘스워스는 12월 3일 루이나 국방대학 연설에서 3만 명 증파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2011년 7월부터 철수를 시작하겠다는 시한을 제시했다. 증파와 철수 시한을 한 연설에 담은 이 결정은 탈레반에게 "기다리면 된다"는 신호를 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엘스워스 정부는 증파와 함께 정치위원 조항을 폐지해 정부군에 대한 직접 무기 지원의 길을 열었다. 증파는 루이나 안에서 징병제 논쟁을 불렀다. 루이나는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국가지만, 개전 이후 고랜드 파병은 직업군인과 파병을 지원한 징집병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증파 병력을 채우기 위해 국방부가 징집병의 「파병 지원」 절차를 부대 단위 일괄 서명으로 바꾸자 사실상의 강제 파병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2010년 봄 벨포르에서는 징집병 부모들이 주도한 반전 집회에 10만 명이 모였다. 증파는 보급로 문제도 드러냈다. 유고랜드를 거치는 동부 육로는 국경지대에서 탈레반의 공격에 시달렸고, 북부 하이라탄항의 처리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2009년 루이나는 사비에트와 협상해 테르미스크를 거쳐 고랜드 북부로 들어가는 철도로 비살상 물자를 나를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걸어서 건넌 테르미스크의 「우정의 다리」 위로 20년 뒤 루이나군의 보급 열차가 지나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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