𝙇𝘼𝙓 𝙒𝙄𝙆𝙄
최근 변경
최근 토론
임의 문서
도구
최근 변경
루이나 계승전쟁
(편집 요청)
[알림]
문서를 편집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편집 요청으로 이동되었습니다.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로그인된 사용자(이)여야 합니다. 해당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1885년 벨포르 추대회의 === '''소집까지''' 전쟁이 끝난 1885년 2월 시점에도 [[벨포르 연합]] 다수는 새 왕을 세울 생각이었다. 3년간 싸운 명분이 "왕비가 아니라 의회가 왕을 세운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제 그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세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2년에 교착을 낳았던 사정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대륙의 [[린데나우 왕조|린데나우가]] 방계들은 3년 사이 루이나와 더 멀어졌으며, 그중 두 명은 전쟁 기간에 왕당파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3월과 4월에 걸쳐 의회는 후보 검토를 재개했으나 6월 이전에 결론을 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 사이에 정치적 조건이 바뀌었다. 첫째, 3년 내전을 겪은 여론이 왕정 자체에 냉담해져 있었다. 둘째, 남부 고지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왕관 하나 때문에 6만 명이 죽었다"는 인식이 퍼졌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델하이트]] 재판의 판결문이 4월부터 인쇄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판결문 제4장 제2절의 논지 — 이 왕국의 왕은 언제나 주어진 왕이었고, 왕을 줄 수 있는 권한은 대표기구에 있다 — 는 왕비를 유죄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읽는 사람들은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줄 수 있는 자는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4월 하순 의회 안에서 '''추대회의 소집'''이 처음 제안되었다. 취지는 명확했다. 왕을 세우는 일은 통상적 입법이 아니라 1372년에 그러했듯 귀족과 성직자, 도시 대표가 함께 모여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절차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제안이었으나, 실제로는 의회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을 넓은 기구에 넘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5월 2일 의회는 「'''추대회의 소집에 관한 법'''」을 가결했다.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하원 의원 전원''' 452명 * '''상원 의원''' 가운데 전쟁 중 왕당파에 가담하지 않은 자 211명 * '''성직자 대표''' 44명 — [[루이나 교회]] 30명, 비국교회 10명, [[남부 고지 장로회]] 4명 * '''도시 대표''' 88명 — 인구 2만 이상 도시에서 각 1~3명 * '''남부 고지 대표''' 24명 — 군정 아래 있던 지역에서 별도로 선출 총 819명이었다. 남부 고지 대표를 포함시킨 것은 논란이 되었으나, 패전 지역을 배제한 채 내린 결정은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는 반론이 우세했다. '''회의''' '''1885년 5월 18일''', 벨포르 의사당 대회의장에서 추대회의가 개회되었다. 1372년 [[알드리크 1세]]를 추대한 이래 '''513년 만'''의 소집이었다. 의장은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맡았다. 개회 선언 직후 그는 회의의 권한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정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 절차가 이후 나흘을 소모했다. 쟁점은 '''추대회의가 왕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는가'''였다. 찬성 측 논리는 이러했다. 1372년 이 회의가 왕관을 준 것이라면 그 회의가 가진 것은 왕을 고를 권한이 아니라 왕관을 처분할 권한이며, 처분에는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반대 측 논리는 이러했다. 추대회의는 왕을 세우기 위한 기구이므로 왕을 세우지 않는 결정은 그 기구의 목적을 벗어난다. 왕정의 폐지는 헌정의 근본을 바꾸는 일이므로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5월 22일''' 표결에서 회의는 자신에게 그 권한이 있음을 확인했다. 찬성 511, 반대 268, 기권 40이었다. 이어 5월 25일부터 사흘간 본안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토론에서 제출된 안은 세 가지였다. * '''제1안 (계승 유지)''' — 린데나우가 방계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즉위시킨다 * '''제2안 (왕위 유보)''' — 왕위를 존치하되 당분간 공석으로 두고 국정은 의회가 대행한다 * '''제3안 (왕위 폐지)''' — 왕위 자체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국가 형태를 정한다 제2안이 예상 밖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결정을 미루자는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 논거가 결정적이었다. 왕위를 비워 둔 채로 두는 것이야말로 1882년의 상황을 재현하는 일이며, 언젠가 누군가 다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한 의원은 "우리는 빈 왕좌 때문에 3년을 싸웠다. 그 왕좌를 그대로 두고 집에 돌아갈 셈인가"라고 발언했고, 이 문장은 이후 자주 인용되었다. '''5월 28일''' 최종 표결이 실시되었다. || '''안''' || '''찬성''' || || 제1안 (계승 유지) || 189 || || 제2안 (왕위 유보) || 137 || || '''제3안 (왕위 폐지)''' || '''471''' || || 기권·불참 || 22 || '''결의''' 같은 날 채택된 「'''왕위에 관한 결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루이나 왕국의 귀족과 성직자, 도시와 지방의 대표들이 벨포르에 모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I. 1372년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선조들은 알드리크에게 왕관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으며, 그 뒤로 다섯 왕가가 바뀌는 동안에도 이 왕국의 왕은 언제나 받은 왕이었다. > >II. 준 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는 준 자뿐이다. 이 회의는 513년 전 왕관을 준 회의와 같은 자격으로 이 자리에 모였음을 확인한다. > >III. 이에 이 회의는 루이나 왕국의 왕위를 소멸시킨다. 이 결의가 있는 날로부터 이 왕국에는 왕이 없으며, 어떠한 절차로도 다시 왕을 세울 수 없다. > >IV. 왕위에 부속된 모든 대권과 칭호, 문장과 의례는 함께 소멸한다. [[루이나 교회]]의 총관직도 이에 포함된다. > >V. 이 결의는 국민의 승인을 얻어 효력을 발한다. 이 회의는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의회에 요청한다. > >VI. 우리는 이 결정이 왕들에 대한 판단이 아님을 밝힌다. 510년 동안 이 왕국을 다스린 이들 가운데 훌륭한 자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 우리가 끝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이며, 그 자리가 비었을 때 이 나라가 무엇을 겪는지를 우리는 지난 3년간 보았다. 제6항은 마지막까지 논쟁이 되었던 조항이다. 왕정에 대한 규탄을 담자는 주장과 담지 말자는 주장이 갈렸고, 결국 담지 않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이 절제가 이후 왕당파 전통이 순교 서사를 만들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회의는 결의 채택 직후 산회했다.''' 다시 소집되지 않았고, 소집될 근거도 남지 않았다. 제3항이 왕을 다시 세울 가능성을 봉쇄한 이상, 이 회의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27.0.0.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닫기
Liberty
|
the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