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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계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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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렌시아와 이베리아의 태도 === 두 나라는 왕당파에 대한 '''사실상의 호의'''를 보였으나 공식 승인은 끝내 하지 않았다. '''[[플로렌시아]]'''의 입장은 계산적이었다. 루이나는 1558년 [[카르네 항]] 상실 이래 300년 넘게 경쟁 관계였고, 1871년 [[벵골]]에서 루이나를 밀어낸 것도 플로렌시아였다. 루이나가 내전으로 약화되는 것은 명백한 이익이었으나, 개입해서 얻을 것은 많지 않았다. 왕당파가 이긴다 해도 왕비의 배후에는 하르슈타트가 있었지 플로렌시아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로렌시아가 택한 것은 '''전쟁을 길게 끄는 쪽'''이었다. 자국 항구에서 남부 고지행 화물의 선적을 눈감아 주었고, 왕당파 요원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1883년 가을 이후에는 나포된 선박에 대한 항의를 형식적으로만 제기했다. 그러나 정규군을 보내거나 승인을 부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1884년 1월 왕당파 특사가 필라델피아에서 군사 지원을 요청했을 때 외무성이 내놓은 답은 "루이나의 국내 문제에 관여할 뜻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베리아]]'''의 태도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뮈롱가는 대륙 정착 과정에서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베리아 언론과 성직자들은 이를 근거로 왕당파를 1531년 이래 끊겼던 루이나 가톨릭 왕통의 회복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베리아 정부의 실제 조치는 미미했다. 자금 일부와 소총 3천 정가량이 민간 경로로 전달된 것이 확인될 뿐이며,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었다. 두 나라 모두 승인을 유보한 결정적 이유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없는 진영이 해양 국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은 1883년 여름에 이미 각국 무관들의 보고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승인은 이긴 쪽에 하는 것이 외교의 상식이었고, 왕당파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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