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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계승전쟁/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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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적 특징 === '''① 조우전이라는 형태 자체의 문제''' 이 전투의 핵심은 '''양측 모두 상대를 오인한 채 전투에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건 누구의 과실이라기보다 조우전(meeting engagement)이라는 형태 자체의 속성이다. 조우전에서는 정찰 → 전개 → 공격의 순서가 성립하지 않는다. 접촉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판단해야 하는데, 접촉이 시작된 뒤에는 관측이 불가능해진다. 지형에 가리고 연기에 가린다. 로엔필드는 여기에 '''축차 투입'''이 겹쳤다. 상대를 소부대로 알고 1개 연대를 보냈는데 상대도 1개 연대를 보내고, 그러다 보니 서로 병력을 조금씩 더 집어넣게 되고, 정신 차려 보니 사단끼리 붙어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병력의 축차 투입은 어느 시대든 금기지만, 조우전에서는 그걸 알면서도 피하기가 어렵다. '''② 중대 종대의 마지막 사례''' 왕당파가 시도한 중대 종대 돌격은 계승전쟁에서 이 규모로 시행된 마지막 사례다. 이후 왕당파 부대들도 점차 산개 대형으로 이행했고, 1884년 이후로는 밀집 대형 공격이 기록되지 않는다. 다만 이 변화는 '''교리 개정을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왕당파에는 교범을 다시 쓸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부대가 알아서 조정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부대마다 대형 운용이 제각각이 되었다. 이 문제는 1884년 3월 총사령부가 설치될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고, 사실 그때는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③ 방어 우위의 실증''' 로엔필드는 1880년대 화력 조건에서 방어 측이 얼마나 유리한지를 양측 모두에게 확인시켰다. 병력에서 3할 이상 앞선 쪽이 정면 돌격에 실패했고, 그 손실은 방어 측의 두 배 가까웠다. 이 인식이 이후 3년을 규정한다. 손힐은 결전 회피 방침을 더 강하게 밀었고, 왕당파는 이후 대규모 정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1884년 [[테른 고개 전투]]에서 의회군이 열흘에 걸쳐 준비 포격과 갱도 작업을 병행한 것도 결국 이날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④ 반사면 배치의 효과''' 의회군이 사용한 반사면 배치는 이 전쟁 내내 반복해서 등장한다. 능선 뒤쪽에 진지를 두면 적 포병의 직접 조준에서 벗어나는데, 이 시대에는 간접 사격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표적은 때릴 수 없다.''' 왕당파가 이날 포격으로 의회군 진지를 제압하지 못한 데에는 화력 부족만이 아니라 이 배치도 작용했다. 능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없으니 조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⑤ 탄약 규격 문제의 첫 노출''' 왕당파 무장 혼용이 실전에서 처음 문제를 일으킨 것도 이 전투다. 구형 개조 소총과 수입 소총이 한 부대에 섞여 있어 탄약 재분배가 불가능했고, 돌격 실패 후 후퇴 과정에서 일부 부대가 '''탄약이 떨어진 채'''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제는 이후 계속 악화된다. 봉쇄로 수입 소총 탄약이 끊기면서 1884년 봄에는 성능 좋은 총이 탄약이 없어 창고에 쌓이는 상황까지 간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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