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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탈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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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벨포르로 이주한 루스탈지아는 벨포르 시립 제7중학교에 진학하며, 도시와 학교 모두에게서 조용한 충격을 안긴 존재였다. 학업 성취는 매우 뛰어났지만,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자주 졸았고, 과제를 마지막 날 새벽에 제출하는 일이 많았지만, 성적은 항상 전교 최상위권이었다. 이른바 ‘불성실한 천재’라는 모순적인 별명이 붙은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단지 학교 성적이 아니었다. 루스탈지아는 15세였던 2007년, 첫 번째 저서 《평균의 종말》을 집필·출간하며 루이나 지성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책은 교육과 사회 제도 전반에 내재된 ‘평균 중심 사고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한 철학적 에세이로, 출간 당시 “고등학생이 쓴 글이 맞느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논리 구조와 문체가 정제되어 있었다. 루스탈지아가 《평균의 종말》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봄방학 무렵이었다. 학교 독서토론 수업에서 ‘평균의 오류’에 대한 철학 세미나를 접한 그녀는, 수업이 끝난 뒤 곧바로 “우리는 평균이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다”는 말을 일기장에 적었고, 그 문장이 훗날 책의 서문이 되었다. 그 뒤로 그녀는 매일 저녁 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이 겪은 교육과 행정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 철학자들의 인용, 통계 비판 등을 빼곡히 적어나갔다. 원고는 약 3개월 만에 완성됐고, 그녀는 지역 출판사인 [[벨포르 라버티 프레스]]에 직접 손으로 쓴 초고와 기획서를 보냈다. 당시 출판사 대표는 “투고자의 나이가 만 15세라 믿기 어려웠지만, 원고를 읽고 출간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루이나 교육협회 인터뷰, 2012년]. 《평균의 종말》에서 루스탈지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40년대 말, 미국 공군은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 제트엔진 장착으로 비행 속도가 높아지면서 전투기 사고가 빈발했기 때문이다. 수차례 조사에 나섰지만 기체 자체나 조종술 등에서 뚜렷한 결함이나 과실을 찾지 못했다. 담당자들은 20여 년 전인 1926년 남성 조종사들의 평균 신체 치수에 맞춰 설계된 조종석에 주목했다. 그사이 조종사들의 체격이 커지지 않았을까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 >공군은 즉시 4000여 명의 현역 조종사를 대상으로 항목별 평균 신체 치수를 산출했다. 다들 새로 산출된 평균 치수를 바탕으로 조종석이 설계되면 사고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측정 업무를 담당한 길버트 대니얼스 중위는 이런 가설을 의심했다. 그는 키, 가슴둘레, 팔 길이 등 조종과 연관성이 높은 10개 항목의 평균치(평균값의 편차 30% 이내)를 낸 뒤 조종사 개개인의 수치를 ‘평균적 조종사’의 수치와 일일이 대조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전 항목에서 평균치에 드는 조종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평균적 조종사’ 같은 것은 없었다. 평균을 기준으로 조종석을 설계해봐야 어느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조종석을 만드는 셈이었다. > >이는 비단 조종석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다. '평균’은 아무도 되지 못하는 숫자다. 우리는 평균을 기준으로 교육하고, 정책을 만들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실제로 평균이라는 존재는 통계적 허상일 뿐이다. 한 아이가 수학은 98점이지만 언어는 42점이라면, 그는 평균적으로 70점이 아니다. 그는 ‘모순된 곡선’이며, 우리는 그 곡선을 존중해야 한다. ‘평균’은 누구도 되지 못하는 존재다. 우리는 평균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그 평균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교육은 평균적인 아이를 위해 설계되지만, 실제 교실에는 단 한 명의 ‘평균적인 아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벨포르 철학회와 루이나 청소년학술상 심사위원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루스탈지아는 단숨에 ‘청소년 작가’가 아닌, ‘청년 철학자’라는 수식어로 언론에 소개되었다. 출판사 측은 초판을 2,000부만 찍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며, 수개월 만에 4쇄를 돌파하였다[* 『루이나 출판문화연감』 2008년판, 평균의 종말 초판 계약 및 인세 기록]. 이후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꾸준히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왜 도덕인가?》(2009.09.30) – 도덕적 판단의 기원과 타자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 {{{#!folding [ 책제목 서문 펼치기 · 접기 ]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어떤 날은 자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지나치고, 어떤 날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어떤 날은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고, 어떤 날은 침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선택의 끝에서,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착한 사람인가?” 혹은 “이건 옳은 일이었을까?” > >그 질문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넘긴다. 언젠가부터 ‘옳음’이란 정해진 문장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선’은 교과서와 교회의 강론과, 부모의 훈계 속에서 주입된 말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도덕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단어지만, 어쩌면 그만큼 가장 의심하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내가 그 의심을 처음 마주했던 어느 오후의 질문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도덕적인 인간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믿는 도덕은 정말 도덕적인가?”였다. > >도덕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인가, 아니면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규칙인가. 그리고 그 규칙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권력의 의도 속에서 만들어졌는가. >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며 ‘정화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 주장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을 “법과 질서에 충실한 시민”이라 여겼고, 재판에서 그는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악’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성실한 사무관이었으며, 시계를 차고 퇴근길에 장을 보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 >이처럼 ‘도덕’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선한 마음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고, 순수한 신념으로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량한 사람들’ 속에도 광기의 가능성은 잔잔한 호수처럼 잠들어 있다. 도덕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 >그리고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그 지점이다. ‘왜 도덕인가?’라는 질문은 단지 철학적 개념의 탐색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흔히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조용히 억압한다. > >“그건 비도덕적이야.” >“그건 예의가 없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래?” > >이런 말들 속에 숨겨진 수많은 억압의 구조. 그 말이 지키고자 하는 세계는 누구의 세계인가. 내가 순응하고 있는 도덕은 정말로 ‘인간적’인가, 아니면 나를 관리하고 규율하기 위한 도구인가. > >나는 이 책에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허구성,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발생하는 폭력과 침묵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나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도덕을 너무 쉽게 믿는다. 우리는 옳다고 믿는 것이 진짜 옳은지 묻지 않는다. > >나는 도덕이라는 말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도덕을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로 낙인찍히며 소외되고, 침묵하고, 사라진다. 특히 집단이 도덕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 도덕은 점점 더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 되기 쉽다. > >도덕은 폭력과 결탁할 수 있다. 역사 속 수많은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 불렸고, 수많은 처형은 ‘질서와 도덕의 회복’이라 불렸다. ‘정의’라는 이름이 붙은 폭력은 더욱 강력하다. 사람들은 악이라 규정된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도덕은 칼이 되고, 신념은 방패가 된다. > >어쩌면 전쟁사에서 창과 칼, 화약, 핵무기, 극초음속 미사일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는 ‘악이라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들은 악이야’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 순간, 우리는 죄책감 없이, 더 정교하고 더 효율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위안의 최후 문장을 읊조린다. >“나는 옳은 일을 했을 뿐이다.” > >나는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한 번쯤은 그 익숙한 문장에 균열을 내보았으면 한다. “왜 나는 이것이 옳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품어보았으면 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편한 질문일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오래된 신념의 지반을 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도덕’의 시작이다. > >이 책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교사가 아니고, 설교자도 아니다. 나는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오래 믿어왔던 ‘도덕’이라는 개념을 낯설게 들여다보는 공동의 탐구자일 뿐이다. 이 책이 어떤 철학적 진리를 선언하기보다, 하나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란다. > >그리고, 당신이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고민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다시 보기를 바란다. > >이 원고는 이제 나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이 책은 독자 여러분의 것이다. >여기 적혀 있는 몇 줄의 짧은 서문에 구애받지 마시길. >여러분 스스로 온전히 읽고, 질문하고, 배우고, 나아가는 독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루스탈지아 그래이 >2009년 봄,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에서 }}} 《공정하다는 착각》(2010.01.03) – ‘공정’이라는 단어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기능한다는 비판. {{{#!folding [ 공정하다는 착각 서문 펼치기 · 접기 ] >나는 그날도 또 한 번 시험에서 1등을 했다. 교실 뒤 게시판에 붙은 성적표는 낡은 타카핀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아이들 틈을 피해 지나가려 했지만 누군가가 소리쳤다. >“역시 루스탈지아야. 또 1등이네.” > >그 순간 나는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그냥 ‘또 그렇구나’ 하고 지나갔다. 나는 시험을 못 보면 창피해했고, 잘 보면 당연하게 여겼다. 그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조용히 병들게 만들었다는 걸, 그땐 아직 몰랐다. > >내 친구 마리나는 반에서 중간보다 조금 아래였다. 성격이 밝고 말이 많고, 시험 전날에도 나에게 계속 농담을 던지던 아이였다. 시험지를 받고 나면 그녀는 나보다 훨씬 긴 시간을 들여 꼼꼼히 문제를 읽었다. 채점이 끝난 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진짜 노력했는데도 74점이야. 너는 졸다가도 1등이고.” 그러곤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건 ‘너 잘났다’는 웃음이 아니라, ‘나는 도대체 왜일까’라는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 >나는 그 말을 한동안 잊지 못했다. 그녀가 노력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게을렀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늘 나와 달랐다. 그건 정말, 단순히 노력의 차이일까? > >나는 부모님께 잘 자라는 아이였고, 공부에 필요한 것은 항상 갖춰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조용한 식사 시간이 있었고,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는 늘 정시에 퇴근했다. 새벽 3시에 잔다고 해도, 아침이면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마리나는 달랐다. 혼자 남동생을 돌봐야 했고, 시험 기간에도 밥을 차려야 했다. 그녀의 집에는 책상보다 작은 식탁이 먼저 있었고, 시험 전날에도 거실엔 TV가 켜져 있었다. > >우리는 같은 시험지를 받았고, 같은 시간에 시작했고, 같은 답안지를 냈다. 하지만 우리는 같지 않았다. > >사람들은 말했다. >“노력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어.” >“할 수 없었다면, 그건 너의 노력 부족일 뿐이야.” >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노력’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걸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노력이라는 단어가 공정의 척도로 쓰이는 현실이 두려워졌다. 그 말은, 실패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도구가 되곤 했다. > >우리는 성적표만으로, 결과만으로, 이 아이는 성실하고 저 아이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 과정 속에는 잠들기 어려운 밤, 집중할 수 없는 낮, 이해받지 못한 눈빛, 배고픔, 불안, 소음, 외로움, 혹은 아무 이유도 없는 슬픔이 있었다. > >나는 항상 전교 1등이었다. 하지만 그 1등이라는 숫자가 정말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꼴찌라는 숫자가 그 사람의 전부인지, 그 모든 판단이 과연 ‘공정한가’라고 질문할 용기를 내보려 한다. >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배경, 언어, 경험, 두려움, 기대와 함께 살아간다. 그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결과만을 들이밀며 “공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아주 불공정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내가 마리나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건네는 사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우린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을까?” >“그게 정말 네 탓이야?” >“정말, 그게 공정한 거야?” > >어쩌면 나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도 던져야 했는지 모른다. 왜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을까? 왜 나는 누군가의 낙오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왔을까? 나는 지금, 늦게나마 그 물음 앞에 서 있다. > >이 원고는 이제 나의 손을 떠났다. 이제는 당신의 것이다. 여기에 적힌 몇 줄의 서문에 구애받지 마시길. 당신만의 질문으로, 당신만의 속도로 이 책을 읽어주시길. 읽고, 흔들리고, 생각하고, 때로는 반박해주시길. 그것이 나의 글이 진심으로 살아 있는 방식이라 믿는다. >---- >루스탈지아 그래이 >2009년 겨울, 벨포르 시립제3고등학교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 《어떻게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11.06.15) – 엘리트주의 비판과 대의제 구조의 권력 집중 문제. {{{#!folding [ 어소다지 서문 펼치기 · 접기 ] > 서문 — 권력은 왜 늘 '소수의 손'에 남는가 > >우리는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교과서는 그것을 ‘민주주의’라 말하고, 정치는 그것을 ‘대의제’로 운용하며, 사회는 그것을 ‘공정’이라 호명합니다. > >그러나 나는, 그리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질문을 한 번쯤은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 >“정말로 다수가 지배하고 있는가?” > >정치 뉴스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언제나 낯이 익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사람은 바뀌었지만, 결정하는 구조는 거의 같습니다. 대기업 회장은 평생 회장을 하고, 언론은 다른 이름의 얼굴을 내보내지만, 말의 방식은 그대로입니다. 교실에서 대표를 뽑아도, 대부분의 친구들은 자기가 투표한 대표가 무엇을 결정하는지도 모릅니다. > >그러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수가 지배한다고 배웠지만, 실제로는 소수가 다수를 조직하고 설득하고, 결국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 탐구입니다. > >나는 이 책에서 ‘권력의 왜곡된 대칭성’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을 단순한 착취나 음모론의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제도적 관성, 인식의 비대칭, 대의제의 구조적 결함, 그리고 사람이 갖는 ‘위임의 편리함’을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치 합리적이고 정교합니다. 그것은 억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합의된 무관심 속에서 작동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표자’가 자신을 대신해 더 잘 결정해줄 거라고 믿고, 그 신뢰는 점차 무관심으로 바뀌며, 어느 순간 그 위임은 ‘면제’로 굳어집니다. > >그렇게 ‘대표’는 ‘지배자’가 되고, ‘선출된 권력’은 ‘영속된 권력’으로 변합니다. >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습니다. > >> “대의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구조’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만 살아남는 구조’가 된다.” >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루이나의 정치 구조, 고등학교 학생회 제도, 도시 자치조직, 노동조합 내부의 의사결정 방식,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의 투표 구조까지 분석했습니다. > >또한 이 책에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 정치이론가 로버트 달, 이탈리아 엘리트 이론가 파레토, 철학자 미셸 푸코 등의 사상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와 전통에 속해 있지만,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된다”'''는 명제를 각기 다른 언어로 관찰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나침반 삼아, 우리 사회 속 ‘보이지 않는 집중’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나는 ‘소수의 지배’를 문제 삼기 이전에, ‘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당연함을 깨뜨릴 수 있는 작은 의심,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구조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 >책의 후반부에서는 ‘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한 탐색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대답이 아니라, 열려 있는 제안입니다. 우리가 바꾸려면 먼저 정확히 보아야 한다는 것, 보고도 말하지 않으면 침묵이고, 말해도 듣지 않으면 독백이라는 것. 그 모든 고민의 끝에서 이 책이 쓰였습니다. > >나는 여전히 고등학생이고, 이 세상에 대해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 >권력은 기울어진 구조가 아니라, 무관심의 축적 위에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모든 구조는 질문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다면, 한 가지는 꼭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나의 목소리를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이 책은 그 질문의 서문입니다. >끝은 여러분의 책장 속에 있습니다. >---- >루스탈지아 그래이 >2011년 6월, 벨포르 시립제3고등학교 자율학습실에서 }}} 《집단 착각: 우리는 소수인가?》(2012.08.06) – 집단 내 ‘침묵의 다수’ 개념을 해체하며, 집단사고의 취약성과 허구를 분석. {{{#!folding [ 잡단착각 서문 펼치기 · 접기 ] > 글쓴이의 말 – 모두가 말하지 않을 때, 나는 왜 쓰려고 했는가 > >이 책은 그리 크지 않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걸까?" > >처음엔 나만 이상한 줄 알았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말, 강단에서 하는 말, 교실에서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 전부 어디 하나는 삐걱거리고 어딘가는 비어 있었는데도, 그 누구도 그 틈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틈을 느끼는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 자신을 되돌아보곤 했습니다. > >그러나 곧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느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 >이 책은 침묵의 구조, 그리고 그 침묵 속에 감춰진 집단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목소리 큰 사람, 더 자주 말하는 사람,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수의 이야기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그건 거짓입니다. > >누군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합니다. 말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믿거나, 혹은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침묵도 의견입니다. 침묵도 존재입니다. 그리고 침묵은, 무해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대개 의견을 낼 권리를 이야기하지만, 침묵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선 자주 잊습니다. 이 책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책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침묵 속에 잠든 ‘의심’을 깨우는 책이 되기를 바라는 기록입니다. > >나의 아버지는 벨포르 주택공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직함은 지역 주택정비과 과장.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겨울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돌아오셔서 말하셨습니다. > >>“다 알면서도 아무도 말을 안 해. 나도 그래.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 >특정 업체에 돌아가는 수상한 낙찰, 늘 같은 인맥 안에서만 도는 업무, 수년째 개선되지 않는 도시 구조. 그는 그것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었습니다. > >>“말하면 달라질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바보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 >나는 그 말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아버지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에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사회라는 것을 단순히 제도와 구조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수한 ‘말하지 않은 선택들’ 위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탑이었습니다. > >학교에서도, 뉴스에서도, 거리의 대화에서도, 나는 수많은 ‘조용한 다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의 착각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그 현상을 사회심리학의 렌즈로 분석하고, 실제 우리가 사는 공간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추적해갑니다. > >때로 이 책은 통계적 분석을 뒤로 하고, 직관과 기억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의미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착각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 >나는 고등학생 시절, 교실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모두가 그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는 걸까? 왜 그 ‘몇 명’의 농담과 손가락질이 ‘모두의 의견’처럼 작동하는 걸까? 그 아이는 정말로 이상했던 걸까, 아니면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이 먼저였던 걸까? > >그렇게 쌓인 질문들이 지금 당신 손에 들린 이 책이 되었습니다. >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이 주제가 과연 독자들에게 ‘유효한 문제의식’일 수 있을까? 혹시 나만 겪었던 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러나 놀랍게도, 책이 세상에 나온 후 나는 수백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저도 그랬어요.” >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인 줄 알고 삽니다. > >이 책이 팔리며 생긴 인세의 상당 부분은 루이나 청소년정신건강연합과 학교폭력피해자단체, 표현의 자유를 위한 청년네트워크 등에 전달되었습니다. 정확한 액수는기재하지 않갰지만 약 2만 루이나 달러 정도가 기부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자랑이 아니라, 작은 연대의 증표로 남기고 싶습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첫 번째 수익은, 나와 같은 의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제 이 책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성장했고, 그 성장은 이 글의 행간 속에 머무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어떻게 읽고, 어떤 부분에서 멈추고, 어디서 다시 시작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입니다. 이 책이 당신을 설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의심하고, 질문하고, 바라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 >이 원고는 이제 나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원고는 독자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 >부디 여기 적혀 있는 몇 줄의 짧은 서문에 구애받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책은 일종의 지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여정을 어떻게 걸을지는 당신의 몫입니다. > >당신만의 속도로, 당신만의 관점으로, 당신만의 언어로. >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책이 당신에게 읽히는 독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유가 되기를. >---- >루스탈지아 그래이 >2012년 8월, 벨포르 시립도서관 창가에서 }}} 이 책들 모두는 고등학생이 썼다는 점에서 이미 놀라웠지만, 각 책이 한 권의 에세이를 넘어서 사회 담론을 구성하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예컨대 《공정하다는 착각》은 이후 루이나 교육개혁 시민단체들이 공정성 담론을 비판할 때 인용한 대표적 문헌이 되었으며, 《어떻게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이후 루스탈지아가 정치에 입문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루스탈지아 그래이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발표한 저서들을 통해 상당한 인세 수입을 올렸지만, 그 대부분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익명으로 기부했다. 그녀는 첫 저서 《평균의 종말》이 예상 외의 반향을 일으켜 초판 인세가 들어오자, “이 책은 내가 자라온 사회를 비판한 것이므로, 그 사회로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며 수익을 전액 지역 교육재단에 전달했다[* 벨포르 시교육기금 2008년 결산자료]. 이후로도 루스탈지아는 매년 책을 출간할 때마다, 인세의 일정 비율 이상을 청소년 인권 단체, 공립 도서관 증설 프로젝트, 지역 장학금 기금 등에 꾸준히 기탁했다. 일부 기부는 책의 인세가 아니라 강연 요청이나 저작권료로 발생한 수익이었고, 이마저도 “내 글로 누군가의 삶을 움직였다면, 그 대가는 다시 누군가의 삶에 쓰여야 한다”는 철학 아래 처리되었다. 당시 출판사 관계자는 “오히려 우리가 재정 문제를 걱정할 정도로, 루스탈지아는 인세를 남기려 하지 않았다. 학생이었던 그녀는 필요한 노트북이나 책 몇 권 외에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철학하는 작가’라는 평과 함께 ‘기부하는 작가’라는 별칭도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정확히 얼마의 기부가 이루어졌는지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출판사 및 인세 기록, 재판 수 기준으로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총 약 146만 루이나 달러 이상이 각종 사회단체와 공공기관에 기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루이나 청소년문화재단, 벨포르시 교육청, 전역 도서관 조합 등에서는 ‘익명의 고등학생 기부자’ 명의로 등록된 기탁금 항목이 당시 여러 차례 보고서에 등장하기도 했다[* 루이나 출판문화연감, 2010·2011년도판]. 그녀는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책은 지식이 아니라 신뢰로 쓰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과거의 기부가 자신의 명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민의 윤리’에 따른 선택이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학교 측은 그녀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명성을 얻자, 언론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자율학습 시간을 배려하는 특례 조치를 도입했다. 하지만 루스탈지아는 이에 대해 “나는 작가이기 전에 학생이며, 같은 시민이자 학생으로서 함께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특별대우를 거절했다[* 벨포르 시립고등학교 기록문서 2010년 교무일지 중]. 고등학교 4학년 말, 그녀는 교지 편집장으로부터 졸업생 대표 작문을 부탁받았지만, 끝내 고사했다. 대신 자신의 책 한 권을 도서관에 기증하며, 이렇게 메모를 남겼다: >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읽을 것이고, 읽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안 읽을 것이다. 모든 책이 그런 식이다.” 친구 관계는 좁고 조용한 편이었다. 그녀는 여러 무리 속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 도서관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곤 했다. 친구들 중 몇 명은 “루스탈지아는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군중의 리듬에 맞추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고 회고했다[* 동급생 인터뷰, 『벨포르 청춘잡지』 2023년 9월호]. 반면 그녀와 가까웠던 소수의 친구들은 “정말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말이 많고, 농담도 잘하는 아이였다”며, 대중의 이미지와 실제의 괴리를 지적하기도 했다. 동아리 활동이나 자율 봉사 같은 학교 생활 참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학생회는 물론, 체육대회에도 최소한의 참가만 했으며, 학교 행사 사진첩에도 그녀는 자주 빠져 있었다. 그에 대해 한 교사는 “자신의 에너지를 어설픈 사회화에 소모하고 싶지 않아하는 아이였다. 그 대신 확실히, 자기 안의 질서와 논리에 충실했다”고 평가했다[* 2025년 루이나 교육사연구회 구술기록 중]. 루스탈지아는 훗날 대통령이 된 이후, 당시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학교는 늘 정답을 요구했고, 나는 늘 다음 질문이 궁금했다. 그러니까 나는 학교가 아니라, 세상을 더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루이나 중앙방송 인터뷰, 2023년 10월 23일]. 이 말은 한동안 루이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학생 포스터나 명언 카드에 실리기도 했다. 재임 중 그녀가 SNS에 공개한 고등학교 시절 사진 한 장은 특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구겨진 교복 상의, 세일러 리본이 흐트러진 채 매어져 있고,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 사진 속 그녀는 피곤한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치 “이제 그만 찍어도 돼?”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팬들은 이 사진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대통령의 기원”이라는 밈을 만들었고, 많은 일러스트와 2차 창작물이 이 한 장면을 토대로 탄생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bgcolor=#808080><tablebordercolor=#000000><tablealign=center><tablewidth=300> 11대 루이나 대통령 [[루스탈지아|루스탈지아 그래이]]의 학창시절 사진[* 트위터] || ||<-2> [[파일:루스탈지아학생카외이.png|width=100%]] || ||<-2><bgcolor=#808080><tablebordercolor=#000000><tablealign=center><tablewidth=300> 11대 루이나 대통령 [[루스탈지아|루스탈지아 그래이]]의 학창시절 사진2[* 트위터] || ||<-2> [[파일:또바꾸면죽임.png|width=100%]] || ||<-2><bgcolor=#808080><tablebordercolor=#000000><tablealign=center><tablewidth=300> 11대 루이나 대통령 [[루스탈지아|루스탈지아 그래이]]의 학창시절 사진[* 트위터] || ||<-2> [[파일:루스탈지아고교학생카와이.png|width=100%]] ||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사진은 그냥 한 시기의 나일 뿐이다. 다만, 그때도 지금처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몸에 너무 많은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루스탈지아 X(구 트위터) 게시물, 2023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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