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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해협 우주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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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속의 궤도 (1970~1980) === 1970년 제22대 대통령 [[아서 W. 그랜트]] 정부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루이나가 정찰위성의 지원을 받으며 치른 첫 전쟁이었다. 그러나 필름 회수 방식의 KESTREL은 촬영부터 분석까지 5~9일이 걸렸고, 사진이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전술 표적은 이미 이동한 뒤였다. 이 경험은 루이나 군부에 '느린 눈은 전쟁에서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1971년 광역 촬영 위성 「GYRFALCON」과 이후 전자식 영상 전송 위성 개발로 이어졌다. 1974~1977년의 [[청북전쟁]]에서 궤도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장 지원 수단이 되었다. 루이나는 공식 참전 이전인 1974년부터 [[북산]]에 정보위성 자료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했고, 1975년 9월 직접 참전한 뒤에는 WATCHFIRE와 해군의 해양감시위성 「PICKET」이 사비에트 함대의 움직임을 상시 추적했다. 사비에트는 1975년 한 해에만 소바 정찰위성 41기를 발사해 해협과 청평 인근 해역의 루이나 함대를 감시했는데, 이는 사비에트의 연간 정찰위성 발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가 이 영상을 [[청평]]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전쟁 기간 내내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976년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GYRFALCON 위성 1기가 사비에트 내륙의 타르칸 고원 상공을 세 차례 지나는 동안, 위성에 실린 광량 감지기에 포화 기록이 남았고 이후 회수된 필름의 해당 구간도 강한 빛에 과다 노출되어 있었다. 루이나 정보당국 안에서는 사비에트가 지상 레이저로 위성의 눈을 멀게 하는 시험을 했다는 견해와, 인근 가스전의 대형 화재가 원인이라는 견해가 맞섰다. 1977년 국방부는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6년 부분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분석관 5명 가운데 3명이 레이저 쪽에 무게를 두었다. 사비에트는 이 [[타르칸 섬광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루이나는 정찰위성의 센서에 강한 빛을 차단하는 자동 셔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1978년 군정이 성립하면서 궤도는 국내로도 향할 뻔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국가비상위원회]]가 1979년 3월과 1980년 10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정찰국에 국내 시위 지역의 촬영을 요구한 문서를 확인했다. 국가정찰국은 두 건을 거부했고, 한 건은 해상도가 낮은 기상위성 영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조사위원회는 정찰위성이 국내 사찰에 직접 쓰였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요구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군정은 또한 우주예산을 18% 삭감했는데, CROW'S NEST 종료는 이 삭감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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