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
최근 토론
임의 문서
도구
최근 변경
대서양-랜드해 전투
(편집 요청)
[알림]
문서를 편집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편집 요청으로 이동되었습니다.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로그인된 사용자(이)여야 합니다. 해당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함대결전 교리와 루이나 해군의 정체 === 아이러니하게도 개전 시점의 루이나 해군은 이 위협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뿌리는 루이나 해군의 성공 경험 그 자체에 있었다. 루이나 해군은 과거 국가의 명운이 걸린 함대 결전에서 승리한 기억을 조직의 정체성으로 삼아 성장한 군대였고, 이 승리의 신화는 세대를 거치며 "해양의 지배권은 단 한 번의 결전으로 결정된다"는 교리적 확신으로 굳어졌다. 여기에 전간기 세계 해군을 풍미한 머핸류 해양력 사상이 수입되면서, 함대결전 교리는 반박 불가능한 정통 교의의 지위를 얻었다. 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은 주력함 포술과 함대 기동에 집중되었고, 도상 훈련은 언제나 '결전 해역으로 향하는 적 주력 함대'를 상정하고 짜였다. 이 교리는 함대의 물리적 구성에 그대로 새겨졌다. 예산의 압도적 비중이 전함과 순양전함의 건조·유지에 투입되었고, 함대의 건제는 전함 전대를 정점으로 한 결전 서열 그 자체였다. 반면 호위함은 '보조함정'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 심의 때마다 가장 먼저 삭감되는 항목이었으며, 대잠 장비와 대공 화기의 개발은 민간 기술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개전 시점에 루이나 해군이 보유한 전문 호위함은 노후 구축함을 개조한 소수에 불과했고, 상선 보호를 전담하는 상설 사령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함대는 훌륭한 창이었지만, 방패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사 구조는 이 편향을 재생산했다. 전함 함장과 함대 참모를 거치는 것이 제독으로 가는 유일한 정통 코스였고, 호위·초계·소해 병과는 '한직'으로 통했다. 자연히 야심 있는 장교들은 통상 보호 임무를 기피했으며, 그 분야에 남은 이들은 승진 심사에서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통상 보호와 호위함 중심의 함대 재편을 주장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순양함 학파'라는, 절반은 조롱이 섞인 이름으로 불리며 주류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로 반박되기보다는 "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넋두리"로 치부되었는데, 함대결전 교리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 한직을 전전하던 [[테오도르 란츠]]가 순양함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무관으로 파견되어 제1차 세계 대전기 대서양의 통상파괴전을 직접 관찰했던 란츠는, 미래의 해전이 함대 간의 결전이 아니라 교통로를 둘러싼 소모전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1937년]] 해군 수뇌부에 제출한 「해상 교통 방호에 관한 의견서」는 이 확신의 집대성으로, 유사시 상선 독립 항행의 전면 금지와 호송선단 의무화, 호위함 200척의 단계적 건조,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의견서는 부속 문서에서 통상파괴전 개시 후 월별 상선 손실을 추산하는 도상 계산까지 첨부하고 있었는데, 전후 검증 결과 이 추산치는 1940년의 실제 손실과 오차 범위 내에서 일치했다. 수뇌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견서는 "함대의 공세 정신을 갉아먹는 패배주의적 발상"이라는 혹평과 함께 기각되었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여백에 "호위함 200척의 예산이면 전함 3척을 만들 수 있다. 전함 3척이면 애초에 적이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라고 적어 넣었다. 이 메모는 함대결전 교리의 사고방식을 압축한 문장으로 후대에 자주 인용된다. 란츠 본인은 이 사건 이후 사실상 좌천되어 예비역 편입설까지 돌았으나,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바다가 증명해 줄 것이므로" 전역 대신 잔류를 택했다. 교리의 관성은 개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39년 9월 유럽 개전 소식에 루이나 해군 수뇌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력 함대를 결전 대비 태세로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시키는 것이었고, 북부 교통로의 초계는 무장상선순양함과 퇴역 직전의 경순양함들에게 맡겨졌다. 훗날 한 전사가는 이 배치를 두고 "금고 문 앞에 전 재산을 쌓아 두고, 금고 안을 지킨 격"이라고 평했다. 결국 1937년의 기각된 의견서가 재발굴되어 란츠 개혁의 청사진이 되기까지, 루이나는 3년의 시간과 수백 척의 상선, 수천 명의 선원을 수업료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수업료의 청구서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0년 4월이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27.0.0.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닫기
Liberty
|
the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