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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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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시작 ==== 이 막장스러운 전후 처리는 곧바로 시민 저항을 낳았다. 도심에 몰려든 저항세력은 루이나군이 퇴각한 구역을 중심으로 무장했고, 특히 수복되지 않은 외곽 지역은 사실상 국경이 무너진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다. 초기 저항의 주축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해산된 인민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결성한 '해협 수호대'로, 혁명군사평의회에 충성했다기보다는 명령 제2호로 모든 것을 잃은 직업 군인들의 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라이티스를 따르던 신보석운동 온건파가 만든 '3월 13일 운동'이었다. 이들은 모라이티스를 죽인 평의회를 증오했지만, 그 평의회를 무너뜨린 루이나의 점령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혁명의 적과 혁명의 배신자가 같은 편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저항세력은 정면 교전 대신 도로변 사제폭탄과 저격, 기지를 향한 박격포 기습에 주력했다. 특히 남항구와 에스테리 곶 공항을 잇는 7번 도로는 루이나군의 보급 차량이 매일같이 폭탄에 당하면서 병사들 사이에서 '과부의 길'이라 불렸다. 1971년 10월 3일에는 폭약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해병대 숙영지로 돌진해 해병 71명이 한꺼번에 숨졌다. 점령 기간을 통틀어 루이나군이 하루에 입은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루이나군은 통행금지와 가택 수색, 대량 검거로 대응했지만, 한 번 수색이 휩쓸고 간 동네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저항세력이 생겨났다. 검거된 사람의 가족과 이웃이 다음 달의 무장대원이 되었다. 1972년에 이르자 루이나군은 병력 부족 탓에 외곽 구역에서의 상시 순찰을 포기했고, 순찰이 끊긴 구역은 그대로 무장세력의 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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