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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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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입 결정 ==== 10월 19일의 총살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나는 즉시 움직였다. 루이나 국가안보회의는 긴급특별상황팀을 구성했고, 이튿날인 10월 20일 상황팀은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아서 W. 그랜트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이를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10월 22일부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루이나는 공동체 차원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사비에트와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들은 이를 '제국주의 침략의 포장'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11월 4일 아무런 결론 없이 결렬되었다. 실제 침공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몇 가지 사정이 겹쳤다. 첫째, 11월부터 3월까지의 포르틸락해협은 겨울 폭풍과 짙은 해무 때문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둘째, 콘스탄티노폴에는 의과대학 유학생 410명을 포함해 약 2,300명의 루이나인이 체류하고 있었고, 성급한 개입은 이들을 인질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셋째, [[루이나 의회]] 안에서도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선전포고 없는 무력개입에 반대했고, 여당인 공화연합 내부에서도 신중론이 적지 않았다.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1970년 3월 에스테리 곶 공항의 활주로가 부분 개통되자 곧바로 사비에트의 수송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루이나 정부는 이 공항이 공산권의 군사 공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항의 활주로 길이는 대형 여객기 운항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었고, 수송기가 실어 나른 화물의 대부분은 공사 자재였다는 사실이 이후 확인되었다. 다만 루이나 측은 지금도 "공항의 용도는 활주로가 아니라 누가 쓰느냐로 결정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어 4월 17일 평의회가 루이나 국적의 의대 유학생 29명과 해상보험사 직원 7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면서,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게 되었다. 1970년 5월 6일 그랜트 대통령은 최종 작전 명령에 서명했다. 루이나 의회에는 작전 개시 2시간 전에야 통보가 이루어졌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후 공개된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루이나 외무부는 콘스탄티노폴 남항구의 통제권을 '전략적 안보지대'로 명시해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루이나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1959년 혁명정부에 빼앗긴 옛 남항구 조차지였다. 개입의 법적 근거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루이나 정부는 침공 직후, 가택연금 중이던 페드레로 의장이 작전 전날인 5월 7일 자로 루이나에 개입을 요청한 서한을 공개했다. 혁명정부가 헌정의 연속성을 보여 주려고 남겨 둔 명예직이, 역설적으로 그 혁명정부를 무너뜨리는 외국 군대를 부르는 법적 근거가 된 것이다. 페드레로 본인은 서한을 직접 작성했다고 확인했으나, 서한이 실제로 작전 이전에 작성되었는지, 연금 상태에서 어떻게 루이나 측에 전달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해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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