𝙇𝘼𝙓 𝙒𝙄𝙆𝙄
최근 변경
최근 토론
임의 문서
도구
최근 변경
콘스탄티노폴/역사
(편집 요청)
[알림]
문서를 편집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편집 요청으로 이동되었습니다.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로그인된 사용자(이)여야 합니다. 해당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조차지 회수 ==== 혁명정부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과감하게 손댄 것은 조차지였다. 1959년 6월 1일 혁명정부는 「조차지 회수령」을 공포해 모든 조차 계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조차 계약은 이미 이 땅의 주권을 잃은 빌베른과 맺은 것이고, 스타투드라의 연장 협정은 뇌물로 체결된 것이므로 어느 쪽도 인민을 구속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인민민병대와 부두 노조는 사흘 만에 아홉 개 조차지의 경찰서와 세관, 법원을 접수했고, 조차지를 가르던 철책은 시민들의 손으로 뜯겨 나갔다. 조차지가 처음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의 모든 구역이 하나의 법 아래 놓인 순간이었다.[* 이날 뜯겨 나간 철책의 쇠기둥 일부는 녹여서 혁명기념탑의 재료로 쓰였다. 기념탑은 1970년대 구역 전쟁 중 폭파되어 현재는 받침대만 남아 있다.] 조차지 국가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무장 봉기로 들어선 혁명정부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을 거부했으며, 일부는 자국민 철수를 명분으로 군함을 해협에 보냈다. 그러나 혁명정부가 조차지 안의 외국 기업 자산에 대한 보상 교섭에 응하고 외국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조차지가 작았던 나라들부터 차례로 태도를 바꾸었다. 1961년까지 랜드해협 국가 대부분이 혁명정부를 승인했다. 끝까지 승인하지 않은 것은 가장 넓은 조차지를 잃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뿐이었다. 특히 루이나의 적대감은 컸다. 루이나는 이 도시에 가장 먼저, 가장 깊숙이 조차지를 두었던 나라였고, 1945년 양도 협정이 물거품이 된 뒤에도 남항구 조차지와 하트웰 광업의 채굴권만큼은 지켜 왔다. 그런데 1959년 남항구 조차지를 잃은 데 이어 1960년 7월에는 타우로 광산마저 국유화되었다.[* 혁명정부는 1957년의 채굴권 연장이 뇌물로 체결된 무효 계약이라며 하트웰 광업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하트웰 광업과 남항구에 이해관계가 걸린 해운·보험 업계의 로비를 받은 루이나의 페닝턴 행정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 정부의 루이나 내 자산을 동결했고, 196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산 물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었기에 그 타격은 컸다. 혁명정부는 그 빈자리를 [[사비에트]]와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원조로 메웠고, 이 선택은 루이나의 적대감을 더욱 굳혔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27.0.0.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닫기
Liberty
|
the s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