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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약진과 대기근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대약진 운동]] 문서 참고.}}} 1958년 려우 즈카이는 15년 안에 플로렌시아를 따라잡고 옛 식민 본국 북산을 앞지르겠다며 제2차 5개년 계획을 대약진 운동으로 선포했다. 농촌은 인민합작사로 재편되어 공동식당이 들어섰고, 마을마다 흙으로 쌓은 제련로에서 식민지기의 철도와 광산 설비까지 녹여 강철을 만들었다. 3기작 강행과 휴경 명령, 흑강 물길 돌리기 공사가 잇따랐으며, 산악의 토착민 마을은 평야의 합작사로 강제로 옮겨졌다. 곡물 징발은 식민지기의 공출을 되살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혁명 정부는 총독부가 남긴 토지 대장과 공출 할당 장부를 그대로 써서 부풀려진 수확량을 기준으로 곡물을 거두었고, 사비에트에서 들여온 무기와 약속된 핵 기술의 대금을 치르기 위해 1959년 한 해에만 약 280만 톤의 곡물을 수출했다. 농민들이 이 시기를 '제2 총독부 시대'라 부른 까닭이다. 징발 실무를 밀어붙인 것은 총리 팜 반 롱이었는데, 그의 역할은 2000년대 이후 당 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결과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이어진 대기근이었다. 청평 정부는 1981년 비정상 사망자를 약 380만 명으로 발표했으나, 연구자들은 700만~1,1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식민지기의 대기근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혁명 정부 아래에서 되풀이된 기근은 깊은 배신감으로 남았다. 대약진은 1960년 말 사실상 철회되었고, 혁명의 지도자였던 려우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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