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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의 실패 === 개항 이후 청평 조정 안에서도 개혁론이 일어났다. 1870년대부터 일부 총독과 개명 관료들은 서양식 무기 공장과 조선소를 세우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이른바 신정(新政)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은 중앙의 일관된 계획이 아니라 개별 총독의 사업으로 진행되었고, 궁정의 환관과 보수 관료들은 개혁이 황권을 위협한다며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신식 군대는 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이를 양성한 총독의 사병에 가까웠다. 신정을 대표하는 인물은 남창성 총독 쩐 반 호아(陳文和)였다. 그는 1872년 바잉하오 인근에 조선소와 병기창을 세우고 서양 기술자를 초빙했으며, 청년들을 플로렌시아와 빌베른에 유학 보냈다. 그러나 궁정은 그의 사업을 '오랑캐의 기술로 황권을 넘보는 일'이라 의심했고, 1884년 그가 황실 재정 개혁안을 올리자 환관 세력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가 세운 조선소와 병기창은 후임 총독들의 사유 재산처럼 운영되다가, 훗날 남부 군벌의 기반이 되었다. 같은 시기 북산이 국가 전체의 제도를 한꺼번에 바꾼 것과 달리, 청평의 개혁은 끝내 몇몇 총독의 개인 사업을 넘어서지 못했다. 같은 시기 북산은 1861년 개혁정변과 1865년 개항을 거쳐 북산 유신을 추진하고 있었다. 1876년 북산은 청평에 대한 조공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는데, 청평 조정은 항의 사절을 보내는 데 그쳤다. 460년 넘게 이어진 책봉 관계는 이렇게 조용히 끝났다. 이후 청평에 남은 책봉국은 남쪽의 남꽝 왕국 하나뿐이었고, 청평 조정은 이 마지막 책봉국을 붙들기 위해 남꽝 궁정에 대한 간섭을 오히려 늘렸다. 1897년 북산이 불평등 조약을 벗어났을 때, 청평의 항구에는 여전히 열강의 조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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