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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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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 이후 == 1977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전장은 조용해졌지만, 그 침묵은 승리의 함성이라기보다 구조의 굳어짐에 가까웠다. 세 나라는 모두 상처를 입은 채 전쟁을 끝냈으나, 유일하게 기회를 쥔 쪽은 루이나였다. 총성은 멈췄지만, 누가 패자이고 누가 설계자인지는 분명했다. 청평대제국은 띠에우리엔의 폐허 위에서 다시 국가를 세워야 했다. 수도는 되찾았지만, 기반시설은 파괴되었고, 행정조직은 사실상 궤멸 상태였다. 정전협정에 따라 루이나는 청평에 대한 직접 통치를 끝냈지만, 동시에 '질서 있는 복구'라는 명분 아래 각종 기술단, 경찰 고문단, 재건 지원국 인사들을 대거 파견했다. 이들은 “도움을 주는 외부인”이라 불렸지만, 실상은 청평 재건의 모든 회의에 좌석을 갖는 실질적 조정자였다. 청평 내부에서는 “해방은 받았으나, 통제는 바뀌지 않았다”는 불만이 퍼졌지만, 청평정부는 루이나의 원조 없이는 기본적인 행정 유지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청평 유격대 출신 지도자들은 이후 '''‘국가부흥위원회’'''를 수립해 임시정부 체제를 유지했지만, 잦은 암살과 파벌 분열로 실질적 리더십이 부재했다. 무엇보다도 대학살의 트라우마는 시민들로 하여금 생존을 우선하게 만들었고, 이는 전후 청평 사회를 지나치게 무뢰한 사회로 만들어버렸다. 경제는 황폐했고, 수도의 병원은 부상자와 고엽제 피해자로 넘쳐났다. 국토 곳곳엔 여전히 지뢰와 불발탄, 파괴된 교량과 무너진 학교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반면 북산공화국은 명분 없는 전쟁의 대가를 정치적 통제로 치환했다. 전쟁 후 지도부는 공식적으로는 ‘정전의 합리성’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루이나의 참전 없이 전면 붕괴가 불가피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군부는 재편을 명분으로 불복종 장교와 병사들을 정리했고, 전후 복구를 위한 조직이 신설되었으나, 이는 실질적으로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지도 하에 운영되었다.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재무장 제한은 루이나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했다. 북산은 전쟁 이후 5년간 사실상 자주적 무력 재건을 포기했고, 대신 루이나 방산업체의 표준 장비체계를 받아들이며 의존적 군사구조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루이나는 북산의 안보를 사실상 자국의 방위권 하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루이나 본토에서는 전쟁의 피로감보다 전후의 외교적 승리에 대한 만족감이 더 컸다. 대통령 리처드 잭슨은 “전쟁은 끝났고, 질서는 우리가 설계했다”는 명언을 남기며 지지율을 반등시켰고, 루이나 언론은 이를 “랜드해협 질서의 재구성”, “루이나 주도의 평화시대 개막”이라며 자화자찬했다. 반전 여론은 줄었고, 오히려 루이나의 외교력과 군사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불균형 위에 세워졌다. 청평 내부의 불안정, 북산 내부의 감시 체계, 루이나의 구조적 개입은 전쟁은 끝났으나, 긴장은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띠에우리엔 광장에서 처형된 이들의 사진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반전 포스터로 사용되었고, “인간 체스”라는 단어는 루이나 군사 개입의 도덕적 한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았다. 정전은 현실이었고, 평화는 정치였다. 그리고 그 평화는 어디까지나 루이나가 설계한, 루이나의 질서 속 평화였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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