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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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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착, 그후의 정전 === 청평의 제2차 반격이 본격화된 1976년 겨울, 북산과 루이나 연합군은 전쟁 개시 이후 처음으로 공세보다 방어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수도 띠에우리엔은 점령되었지만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고, 청평 유격대는 도심 속에서 매일같이 습격, 저격, 화염병 공격, 폭파 및 자살 기습전을 이어갔다. 도시는 불에 타지 않았지만, 조용히 붕괴되고 있었다. 루이나군은 점령지 유지를 위해 병력을 계속 증원해야 했지만, 전선은 넓어지고 인력은 고갈되었다. 북산군은 장기 주둔과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었고, 점령지에서 협조자 네트워크가 붕괴되면서 행정 통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특히 바오람과 띠에우리엔 사이의 고속도로는 '''‘유령의 도로’'''라 불리며, 매복과 지뢰, 민간인 위장 습격으로 매일 수송 피해가 발생했다. 한 북산 장교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 “우리는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어딜 가든 죽음이 먼저 다녀가는 나라였다.” 루이나 내부에서도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루이나 본토에서의 전쟁 반대 여론은 1976년 봄을 기점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리처드 잭슨 대통령은 전쟁 예산 확보에 실패해 군사 보급 계획을 두 차례 축소해야 했다. 군 내부에서는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정의롭지도 않다”'''는 회의가 확산되었고, 일부 루이나군 지휘관은 명령 없는 후퇴를 단행하거나, 작전 회피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언론은 점점 잭슨 정권을 압박했고, 청평에서 유출된 학살 영상은 결국 루이나 국회 청문회를 야기한다. 1977년 3월, 북산 최고인민위원회는 처음으로 루이나에 “정지선 재조정”, 즉 후방방어선 구축 제안을 비공식 통로로 전달했다. 이는 청평에 대한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하다는 내부 판단을 반영한 것이었다. 루이나 정부 역시 전면 철수는 원치 않았으나, “이 상태로 5년을 더 끌 자신도 없었다.” 결국 루이나-북산 연합군은 1977년 4월부터 사실상의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며, 띠에우리엔과 바오람, 몇몇 연안 기지에 병력을 집중하고 그 외 지역은 축소 통제하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과 농촌 대부분은 청평 유격대가 점차 회복하게 되었고, 국경지대는 불안정한 휴전선으로 굳어져 갔다. 1977년 여름, 청북전쟁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청평은 유격전의 불씨를 되살렸지만 국가 기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북산공화국은 정규군의 전열을 유지하지 못한 채 방대한 점령지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나 내부에서조차 전쟁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루이나·북산 연합군이 전략적 거점을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고, 청평은 수도를 포함한 핵심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루이나 외교가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1977년 7월, 스위스 바젤에서 유엔 중재 하에 열린 3자 회담에서 루이나는 탁월한 외교적 기동을 선보였다. 루이나 대표단은 북산과의 공조 하에 사전에 합의된 협상 노선을 기반으로, 자국의 전쟁 개입을 “질서 유지”로 재정의하고, 군사 개입의 정당성과 점령 행정의 합법성을 주장했다. 청평은 띠에우리엔 학살과 무차별 폭격을 거론하며 전범 책임을 요구했지만, 루이나는 “독자적 조사 권한”을 고수하며 국제조사 수용을 유보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나는 협상에서 청평의 주권 회복을 인정하는 대신, ‘질서 있는 통제이양’이라는 표현을 통해 점령지를 자국 방식으로 철수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정전협정은 1977년 7월 27일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전투행위는 즉시 중단되며, 현재 연합군이 통제하는 구역은 정전관리선(Military Standstill Line)으로 규정되어 실질적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청평은 이 선을 넘는 중무장 배치를 금지당했고, 완충지대의 감시권은 루이나 주도의 평화감시단에게 부여되었다. 이로써 루이나는 군사작전 종료 이후에도 지역 안보의 중재자로 남는 데 성공했다. 띠에우리엔을 포함한 주요 점령지의 행정권은 단계적으로 청평 임시정부에 이양되었지만, 이 과정 역시 루이나 기술단과 행정자문단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루이나는 이 과정에서 자국군이 “질서와 생존을 유지한 유일한 외세”였음을 강조했고, 보복과 혼란의 방지라는 명목 아래 통치력을 시연했다. 전쟁범죄 문제는 “향후 외교채널을 통해 논의”라는 표현 아래 사실상 유보되었다. 루이나는 자국 군인의 기소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고, 오히려 청평 내에서 발생한 민간인 보복이나 북산군 포로 학대 사례에 대한 조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국제사회는 루이나의 태도에 우려를 표했지만, 현실적으로 전선을 고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데 주저했다.[* 전쟁 끝내자고 모였는데, 전쟁 계속 하수도 있는 놈을 자극하는건 힘들기 때문] 또한, 루이나는 협정을 통해 청평과 북산 모두의 병력 재편과 무기 도입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다. 청평은 유엔 감시 하에 무기 수입을 사전 통보해야 하며, 북산은 5년간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하에 재편을 진행해야 한다. 이로써 루이나는 전후의 안보구조에서 중심축으로 남게 되었고, 청북 지역은 사실상 루이나가 승인한 틀 속에서만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로 고착되었다. 정전협정은 단순한 군사적 휴전이 아니라, 루이나가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질서 회복자로서의 지위를 고착화한 협정문이었다. 루이나 외무부는 협정 체결 직후 이를 “역사상 가장 조화롭고 책임감 있는 철수”로 묘사했으며, 국내 언론은 대통령 리처드 잭슨이 '''“전쟁의 불을 끄고 평화의 설계를 시작한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단지 멈춘 것뿐이었다. 청평은 폐허 속에서 살아남았고, 북산은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으며, 루이나는 해외 개입의 한계와 대가를 체감한 채 퇴각했다. 정전협정은 총구를 멈추게 했지만, 민족 간, 체제 간, 기억 간의 전쟁은 이후 수십 년간 계속되게 된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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