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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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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평 민간인 대학살 === 1975년 10월 22일, 루이나군 제13기계화여단이 청평대제국의 수도 띠에우리엔(Tieurien) 시청 광장에 루이나 국기를 게양한 순간, 도시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유격대의 조직적 저항은 대부분 와해되었고, 시민들은 방공호 속이나 불탄 골목 어귀에 흩어져 있었다. 도시는 멈췄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점령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파괴의 시작이었다. 띠에우리엔은 청북전쟁의 심장부였고, 루이나와 북산에게는 반복된 저항과 치욕의 상징이었다. 특히 수도 점령 직전, 청평 유격대는 루이나군의 수송대에 자살공격을 감행해 고위 장교 2명이 전사했고, 루이나군 내부에서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북산군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점령지 내에서 “협조자 사냥”과 보복 처형을 반복하고 있었고, 이 두 힘이 띠에우리엔이라는 폐허 위에서 만나며, 현대전사에 남을 최악의 민간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대학살은 명령 없이 시작되었다. 혹은, 명령 없이도 가능한 일이었다. 점령 직후, 루이나군 헌병대는 띠에우리엔 내의 모든 성인 남성들을 시청 광장으로 소집시켰고, ‘신원 미상’, ‘도주 흔적’, ‘무기 소지’ 등의 이유로 약 400여 명이 현장에서 즉결 총살당했다. 북산군 제5보병연대는 수도 북부 라미엔 구역에서 집단총살형을 위해 주민들을 한 곳에 모은 뒤 수로변에 세워놓고 한 줄씩 칼로 목을 절단했으며, 이 장면은 이후 생존자의 손에 의해 유출된 흑백 사진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는다. 가장 심각한 폭력은 시가지를 구획별로 분할한 루이나 특수부대의 진입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유격대 소탕을 명분으로 가정집을 수색하며 가족 단위의 민간인을 붙잡아 구타·고문했고, 협조 혐의를 받은 사람은 개조된 M113 장갑차에 묶어 끌고 다니거나, 포로 열차 칸에 쑤셔 넣은 뒤 방치했다. 일련의 행위들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자의적이고 오락적인 폭력이었다. 일부 병사들은 포로의 귀를 자르고 전리품처럼 사진을 찍었고, 강간 후 자살을 강요하거나 생중계하듯 고문하는 행태도 확인되었다. 특히 띠에우리엔 제2공립학교에서 벌어진 학살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학교 건물에 유격대가 은신했다는 제보 이후, 루이나군은 이곳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운동장에 집결시켜 M60 경기관총으로 일제 사살했다. 그중 다수는 학생과 교사였으며, 피투성이가 된 교복이 이후 청평 전역의 반루이나 저항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북산군 또한 군의 규율을 유지하지 못했다. 일부 부대는 술에 취한 채 마을을 약탈하고, 여성을 연행해 '''“점령 축하 파티”'''라는 명목의 집단 성폭행을 자행했다. 띠에우리엔 구시장 구역의 한 건물 지하에서는 민간인 여성과 소녀 수십 명이 감금된 흔적이 이후 재점령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소이탄으로 고의적으로 전소된 병원, 사찰 역시 의도된 민간인 말살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공식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산은 대학살을 전면 부인했고, 루이나는 “작전 중 우발적 충돌”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비공식 추산에 따르면, 띠에우리엔 대학살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18,000명 이상, 이 중 상당수가 노인, 여성, 아동이었다. 시신은 강변이나 하수구,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고, 불태워지거나 훼손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청평의 2차 반겨 === 1975년 10월 말, 루이나군과 북산군의 합동작전으로 청평의 수도 띠에우리엔이 점령된 이후, 청평대제국은 사실상 붕괴 직전까지 몰린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수도 함락과 대학살은 청평에게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저항의 총궐기 신호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집을 잃었지만, 투쟁의 뿌리를 되찾았다.” 대학살 직후, 청평 전역에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조직적 유격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곧 청평의 제2차 반격이었다. 이 반격은 더 이상 ‘게릴라’라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정밀하게 이루어졌다. '''청평 인민유격사령부(당시 명칭: 국토해방인민전선)'''는 띠에우리엔 함락 직후 전국 저항망을 재통합했으며, 생존 장교들 중심으로 지역별 전구사령부 체계를 재정립했다. 도시조직, 산악유격대, 해안첩보대, 그리고 ‘복수연대’로 불리는 학생·시민 기반 무장조직까지 연계된 유례없는 전민 저항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루이나군이 점령한 띠에우리엔 시내 중심부에서, 대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청년들 일부는 루이나군의 군복을 수집해 위장한 뒤, 연합군의 검문소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복수는 머리 위가 아니라, 발밑에서 온다.” 그들은 하수구를 통해 이동하고, 군용 차량에 폭약을 실은 뒤 일부러 들이받았으며, 심지어 연합군 장교 숙소에 위장 가정부를 침투시켜 암살을 시도했다. 이른바 '''‘고요한 폭풍 작전’'''은 도시 내부의 전선을 다시 유동화시켰고, 루이나군은 점령군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평균 15건 이상의 습격과 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산악지대 전선에서는 대규모 매복과 역습이 전개되었다. 동남부 짜로 고개 전투에서는 청평 유격대가 루이나 제6보병중대를 고지대에서 포위한 뒤, 통신선을 절단하고 야간 포격으로 궤멸시켰다. 이 전투는 “루이나의 육군은 산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냉소적 별명을 남겼고, 루이나 고위 지휘부 내부에서도 “출구 없는 전장에 갇혔다”는 자각이 시작되었다. 해안에서도 청평의 반격은 예외가 아니었다. '''민병 해상조직인 ‘흑조함대’'''는 소형 보트를 개조해 북산군 해상 보급선에 대한 자폭 공격을 감행했고, 청평 남부의 꽁룩 항구 전투에서는 수상 가옥을 기지로 삼아 북산군의 해상기지를 기습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루이나 해군은 기뢰에 걸린 고속정 1척이 침몰했고, 실종자 수는 30여 명에 달했다. 이 반격은 단순히 전술적 성공이 아니었다. 국제사회가 마침내 주목하기 시작한 청평의 생존 신호였다. 띠에우리엔 대학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확산되던 시점에, 청평이 살아있음을 증명하자 여러 비동맹국과 반루이나 성향 국가들이 청평에 인도적 원조와 비공식 정보 지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부 국가는 명시적으로 루이나의 개입을 ‘전범적 행위’로 규정했고, 세계 여론은 점차 루이나와 북산을 향한 회의로 기울어졌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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