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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공화국 ==== 제4공화국은 벨포르의 봄이 낳은 민주적 열망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새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와 의회의 독립, 언론 자유와 기본권의 보장을 명시했고, 첫 번째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는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적 질서를 뿌리내리겠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시민들은 새 정부에 경제 회복과 사회 안정, 과거 청산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맡겼고, 제4공화국 초기에는 적어도 그 과제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합의가 존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제4공화국의 민주적 합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균열을 드러냈다.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는 군사정권 시기 투옥과 망명을 경험한 민주화 운동 출신의 정치인이었으나, 집권 이후 그의 행보는 점차 지지자들의 기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베인브리지와 그 주변 세력은 경제 위기의 수습과 사회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행정부의 권한을 확대해 갔고, 의회와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타협보다 우회를 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임기가 절반을 넘기면서 정권의 성격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베인브리지 세력은 제4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을 폐지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개헌 시도는 곧 루이나 사회를 둘로 갈라놓았다. 야당과 시민 단체, 학계와 법조계는 이를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벨포르의 봄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시민들에게 영구 집권의 시도는 참을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러나 집권 세력은 의회 다수파와 관제 언론, 행정력을 동원해 개헌 절차를 밀어붙였다. 반대파 의원들은 의사당에서 물리적으로 봉쇄당했고, 항의 시위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결국 개헌안은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날치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제2차 헌정위기"라 부른다. 연임 제한이 철폐되자 대통령은 사실상 무기한 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고, 제4공화국은 이름만 민주공화국일 뿐 실질적으로는 선거를 통해 정당화된 1인 장기 집권 체제로 변질되어 갔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허무는 이 역설은 루이나 사회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많은 시민들은 벨포르의 봄이 결국 헛된 것이었느냐는 절망에 빠졌고,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가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체념한 것은 아니었다. 헌정위기 직후부터 벨포르의 대학가와 노동 지대, 종교 시설과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저항이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시위와 파업, 서명 운동과 국제 사회에 대한 호소가 이어졌고, 이 저항은 점차 체제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확대되어 갔다. 1983년 봄, 벨포르 시내에서 개헌 무효화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민 폭동이 발생했다. 벨포르 폭동으로 불리게 되는 이 사건에서 시위대는 정부 청사와 관영 방송국을 포위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 병력과의 격렬한 충돌이 수일간 이어졌다. 정권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투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1983년 4월 13일, 계엄이 다시 선포되었고, 특수 부대와 기갑 병력이 벨포르 시내로 진입했다. 뒤이은 진압 작전은 잔혹했다. 시위대에 대한 실탄 발포와 무차별적 체포, 인근 주거 지역으로의 수색과 연행이 수일에 걸쳐 자행되었다. 공식 발표는 사상자 수를 극도로 축소했으나, 실제로는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후대에 확인되었다. 이 유혈 진압은 4.13이라는 날짜로 기억되며, 루이나 현대사에서 국가 폭력의 가장 참혹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4.13 유혈 진압 이후 제4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정권은 벨포르 폭동의 혼란을 빌미로 헌법을 다시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고, 의회의 기능을 형해화하며, 군의 정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체제를 선포했다. 이것이 제5공화국이었다.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의 민주적 외피마저 벗어던진 노골적인 권위주의 체제였다. 언론은 사전 검열 아래 놓였고, 야당 활동은 사실상 불법화되었으며, 4.13의 진상을 추궁하려는 시도는 가혹하게 탄압되었다. 벨포르의 봄이 낳은 민주주의의 꿈은 두 번의 헌정위기와 한 차례의 유혈 진압을 거쳐 다시 독재의 어둠 속으로 밀려났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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