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r2 vs r3
1[[분류:콘스탄티노폴]]
21== 역사 ==
32=== 개관 ===
4콘스탄티노폴의 역사는 크게 로마 시대, [[빌베른]] 통치기, 도시국가 시대, 공화국 시대(1945~1970), 루이나 점령기(1970~1981), 군벌 시대(1981~1994), 그리고 루이나의 자치권 회복 선언 이후 현재까지로 나뉜다. 포르틸락해협 양안에 걸쳐 랜드해협 서부의 남북을 잇는 자리에 앉아 있는 탓에, 해협을 건너는 육로와 해협을 지나는 해상로가 모두 이 도시를 거쳐야 했고, 그 때문에 콘스탄티노폴은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가 탐내는 도시였다.
5
6다만 이 도시의 역사를 관통하는 특징은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점보다, 그 누구도 이 도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로마는 철수했고, 빌베른은 손을 놓았며, 공화국은 독재자에게 넘어갔고, 혁명정부는 스스로를 잡아먹었으며, 루이나는 점령만 하고 떠났다.[* 루이나의 역사학자 마르셀 D. 오브리는 이를 두고 "콘스탄티노폴은 정복하기 어려운 도시가 아니다. 정복하기는 쉽고, 책임지기는 불가능한 도시다"라고 평했다.] 현재의 무정부 상태는 이 반복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3콘스탄티노폴의 역사는 크게 로마 시대, [[빌베른]] 통치기, 조차지 시대(19세기 후반~1945), 공화국 시대(1945~1970), 루이나 점령기(1970~1981), 군벌 시대(1981~1994), 그리고 루이나의 자치권 회복 선언 이후 현재까지로 나뉜다. 포르틸락해협 양안에 걸쳐 랜드해협 서부의 남북을 잇는 자리에 앉아 있는 탓에, 해협을 건너는 육로와 해협을 지나는 해상로가 모두 이 도시를 거쳐야 했고, 그 때문에 콘스탄티노폴은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가 탐내는 도시였다.
4
5이 도시의 역사를 관통하는 특징은 그 누구도 이 도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다. 로마는 철수했고, 빌베른은 조차지를 내주다가 끝내 도시를 빚값로 넘겼으며, 공화국은 독재자에게 넘어갔고, 혁명정부는 스스로를 잡아먹었으며, 루이나는 점령만 하고 떠났다.[* 루이나의 역사학자 마르셀 D. 오브리는 이를 두고 "콘스탄티노폴은 정복하기 어려운 도시가 아니다. 정복하기는 쉽고, 책임지기는 불가능한 도시다"라고 평했다.] 현재의 무정부 상태는 이 반복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6
7또 하나의 특징은 '콘스탄티노폴인'이라는 정체성이 끝내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도시는 천 년 넘게 빌베른의 한 지방이었고, 빌베른의 통제가 느슨해진 뒤에는 여러 나라의 조차지로 쪼개졌으며, 온전한 독립국으로 존재한 기간은 1945년부터 1970년까지 25년에 불과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도시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콘스탄티노폴인이 아니라 빌베른계, 혼혈계, 혹은 어느 옛 조차지 구역 출신으로 인식하며, 이 분열은 1970년대 이후의 내전에서 그대로 전선이 되었다.
78
89=== 고대와 로마 시대 ===
9도시의 기원은 기원전 7세기 무렵 그리스계 항해민이 해협 남안의 곶에 세운 교역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콘스탄티노폴의 공용어 가운데 그리스어가 남아 있고, 구시가의 오래된 지명 상당수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은 이 시기의 흔적이다. 초기의 거점은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물과 식량을 대고 통행료를 받는 소규모 항구에 불과했으나, 해협 북안의 내륙 부족들과 소금·곡물·가죽을 교환하는 중계무역이 자리 잡으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10도시의 기원은 기원전 7세기 무렵 그리스계 항해민이 해협 남안의 곶에 세운 교역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구시가의 오래된 지명 상당수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은 이 시기의 흔적이다. 초기의 거점은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물과 식량을 대고 통행료를 받는 소규모 항구에 불과했으나, 해협 북안의 내륙 부족들과 소금·곡물·가죽을 교환하는 중계무역이 자리 잡으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1011
1112로마가 랜드해협에 진출한 뒤 이 도시는 속주 체제에 편입되었고, 해협 방어를 위한 함대 기지와 세관이 설치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로마의 랜드해협 속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꼽혔으며, 4세기 초 황제의 행차를 기념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이름이 이후 빌베른어식 '콘스탄티니예'와 현대의 '콘스탄티노폴'로 이어진다.[* 개칭 이전의 이름은 기록마다 표기가 달라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지에서는 흔히 '곶'을 뜻하는 옛말로 불렸다고 한다.]
1213
13그러나 5세기 들어 로마 본국의 사정이 악화되자 랜드해협의 군단은 차례로 본토로 소환되었고, 로마는 해협에서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다. 주둔군과 총독이 떠난 콘스탄티노폴은 순식간에 무주공산이 되었다. 한동안은 도시 원로원을 자처한 대지주와 선주들이 과두 자치이어갔으나, 성벽을 지킬 병력도, 해협을 지킬 함대도 없는 도시가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이 짧은 자치기는 이후 콘스탄티노폴 역사에서 되풀이될 '주인 없는 번영'의 첫 사례로 평가된다.
14그러나 5세기 들어 로마 본국의 사정이 악화되자 랜드해협의 군단은 차례로 본토로 소환되었고, 로마는 해협에서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다. 주둔군과 총독이 떠난 콘스탄티노폴은 순식간에 무주공산이 되었다. 대지주와 선주들이 한동안 도시꾸려 갔으나, 성벽을 지킬 병력도, 해협을 지킬 함대도 없는 도시가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1415
1516=== 빌베른 통치기 ===
1617==== 병합 ====
17무주공산이 된 랜드해협 제2의 대도시를 차지한 것은 [[빌베른]]이었다. 빌베른 제1제국은 해협 동부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을 병합했고, 도시 원로원은 저항 대신 자치 특권의 일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었다. 빌베른은 도시를 '콘스탄티니예'로 개칭하고 총독부를 두었으며, 로마 시대의 함대 기지를 해협 요새로 개축해 포르틸락해협의 통행을 통제했다.
18
19병합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유럽과 랜드해협을 잇는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 들어오는 모직물·금속 제품·포도주와 랜드해협 내륙에서 나오는 곡물·목재·광물이 이 도시의 부두에서 교환되었고, 빌베른은 해협 통행세와 관세만으로 해외 영토 전체의 행정 비용 있었고 한다. 이 역할은 빌베른 제1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끊기지 않았고, 이후의 공화정 체제, 이른바 식민공화제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18무주공산이 된 랜드해협 제2의 대도시를 차지한 것은 [[빌베른]]이었다. 빌베른 제1제국은 해협 동부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을 병합했고, 도시 유력자들은 저항 대신 재산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었다. 빌베른은 도시를 '콘스탄티니예'로 개칭하고 총독부를 두었으며, 로마 시대의 함대 기지를 해협 요새로 개축해 포르틸락해협의 통행을 통제했다.
19
20병합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유럽과 랜드해협을 잇는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 들어오는 모직물·금속 제품·포도주와 랜드해협 내륙에서 나오는 곡물·목재·광물이 이 도시의 부두에서 교환되었고, 빌베른은 해협 통행세와 관세로 해외 영토 경영 비용 부분을 충당했. 이 역할은 제1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끊기지 않았고, 제2제국을 거쳐 19세기의 공화정 시기까지 이어졌다.
2021
2122==== 바다 위의 궁정 ====
2223빌베른 통치기의 콘스탄티노폴은 상업 도시인 동시에 빌베른 고위 귀족층의 휴양지였다. 해협을 내려다보는 언덕마다 왕족과 대귀족의 별궁과 정원이 들어섰고, 여름이면 본국의 궁정이 통째로 옮겨 온 듯하다 하여 '바다 위의 궁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현재도 도심 외곽에는 당시의 별궁과 정원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공화국 시기와 인민혁명정부 시기에는 관광 명소로 쓰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무장세력의 거점이나 피란민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2324
24별궁이 늘어나면서 아예 콘스탄티노폴에 눌러앉은 왕족도 생겨났다. 이들은 본국 왕가의 방계로서 도시의 언덕 지구에 영지를 두고 대대로 거주했는데, 현지에서는 이들을 '해협 분가(分家)'라고 불렀다. 해협 분가는 본국 정치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도시 안에서는 해상 귀족 및 대선주 가문과 혼인으로 얽히며 상당한 사회적 권위를 누렸다. 이들의 존재는 수백 년 뒤 독립 직후의 왕정복고 운동으로 이어진다.
25
26==== 제국멸망과 식민공화제국 ====
......
6061그러나 독립은 곧바로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낳았다. 연맹은 기존 체제를 그대로 국가 체제로 격상하려 했지만, 몰락한 중소 가문과 부두 노동자, 전쟁 중 급증한 도시 빈민, 그리고 호송선단에서 출발해 어엿한 군대로 성장한 도시 수비대는 열두 집의 과두정을 더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해협 분가를 중심으로 한 옛 왕족 세력이 가세하면서, 신생국의 정체(政體)를 둘러싼 대립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6162
6263==== 왕정복고 내전 ====
25별궁이 늘어나면서 아예 콘스탄티노폴에 눌러앉은 왕족도 생겨났다. 이들은 본국 왕가의 방계로서 도시의 언덕 지구에 영지를 두고 대대로 거주했는데, 현지에서는 이들을 '해협 분가(分家)'라고 불렀다. 해협 분가는 본국 정치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도시 안에서는 해상 귀족 및 대선주 가문과 혼인으로 얽히며 상당한 사회적 권위를 누렸다. 이들의 존재는 훗날 독립 직후의 왕정복고 운동으로 이어진다.
26
27==== 빌베른 지방 ====
6264==== 왕정복고 내전 ====
63장 먼저 움직인 것은 왕정파였다. 해협 분가의 방계 후손인 아달베르트 포르틸락 공을 옹립한 왕정파는 옛 왕가의 정통성을 내세워 콘스탄티노폴 국의 복고를 주장했고, 해협 분가와 혼인으로 얽혀 있던 해상 귀족 및 일부 도시 귀족이 이들을 지지했다. 연맹 일부도 과두정 유지가 어렵다면 차라리 왕정 아래서 기득권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뒤에서 자금을 댔다.
64
651946년 3월, 왕정파는 언덕의 옛 별궁 지구에서 포르틸락 공의 즉위를 선포했다. 이에 맞서 도시 수비대 지휘관 니키포로스 벨라스 대령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파는 '공화수호위원회'를 결성했고, 수비대 병력의 대다수가 공화주의파를 따랐다. 이후 14개월 동안 이어진 내전은 언덕의 별궁 지구와 부두 사이의 시가전으로 전개되었는데, 병력과 화력 앞선 공화주의파 점차 언덕포위해 들어갔다.
66
671947년 5월 별궁 지구가 함락되면서 내전은 공화주의파의 승리로 끝났다. 왕정파는 사실상 전멸했고, 포르틸락 공을 비롯한 일부만이 [[루이나]][[체르드]]로 망명했다.[* 사실상 전멸했고 일부는 루이나나 체르드로 망명했다. 루이나로 건너간 망명 왕정파는 이후 벨포르의 보수 정계와 연을 맺으며 콘스탄티노폴 역대 정권에 대한 루이나의 적대 여론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 내전으로 '바다 위의 궁정'의 별궁 상당수가 불타거나 무너졌고, 옛 왕족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었다.
65독립은 곧바로 '누 이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낳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왕정파였다. 해협 분가의 방계 후손인 아우렐리아누스 포르틸락 공을 옹립한 왕정파는 옛 왕가의 정통성을 내세워 복고를 주장했고, 해협 분가와 혼인으로 얽혀 있던 해상 귀족 및 일부 도시 귀족이 이들을 지지했다. 열두 운데 일부도 왕정 아래서 기득권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뒤에서 자금을 댔다.
66
671946년 3월, 왕정파는 언덕의 옛 별궁 지구에서 포르틸락 공의 즉위를 선포했다. 이에 맞서 벨라스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파는 '공화수호위원회'를 결성했고, 수비대 병력의 대다수가 공화주의파를 따랐다. 이후 14개월 동안 이어진 내전은 별궁 지구와 구시가 사이의 시가전으로 전개되었는데, 전선이 조차지 경계와 맞닿아 있었던 탓 전투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왕정파는 불리해질 때마다 조차지 안으로 몸을 피했고, 조차지 경찰은 공화주의파 병력의 추격막았다.
68
69그럼에도 병력과 화력에서 앞선 공화주의파가 점차 언덕을 포위해 들어갔고, 1947년 5월 별궁 지구가 함락되면서 내전은 공화주의파의 승리로 끝났다. 왕정파는 사실상 전멸했고, 포르틸락 공을 비롯한 일부만이 루이나체르드로 망명했다.[* 사실상 전멸했고 일부는 루이나나 체르드로 망명했다. 루이나로 건너간 망명 왕정파는 이후 벨포르의 보수 정계와 연을 맺으며 콘스탄티노폴 역대 정권에 대한 루이나의 적대 여론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 내전으로 '바다 위의 궁정'의 별궁 상당수가 불타거나 무너졌고, 옛 왕족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었다.
6870
6971==== 제1공화국의 출범 ====
701947년 7월 공화수호위원회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콘스탄티노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헌법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해 의회가 수상을 선출하고 수상이 실권을 갖도록 했으며, 대통령은 의회가 간선하는 의례적 국가원수로 두었다. 이듬해에는 독자 화폐인 콘스탄디가 발행되었다. 초대 수상에는 내전을 승리로 이끈 벨라스가 추대되었다.
71
72그러나 이 공화정은 처음부터 불안했다. 내전에서 이긴 것은 수비대였지 공화이념이 아니었고, 회의 다수는 여전히 선주 가문의 돈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차지했다. 벨라스 정부는 전후 복구 항만 재건에 힘썼으나, 복구 사업의 이권 대부분 살아남은 대가문들에게 돌아갔고 부두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공화국'의 체계를 확립했지만, 그 실질은 과두정에 군복을 입힌 것에 가까웠다.
721947년 7월 공화수호위원회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콘스탄티노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헌법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해 의회가 수상을 선출하고 수상이 실권을 갖도록 했으며, 대통령은 의회가 간선하는 의례적 국가원수로 두었다. 이듬해에는 독자 화폐인 콘스탄디가 발행되었다. 초대 수상에는 독립과 내전을 이끈 벨라스가 추대되었다.
73
74그러나 이 공화정은 처음부터 절름발이였다. 헌법은 조차지 문제를 부칙에서 '추후 교섭한다'고만 규정했고, 공화국의 권은 사실상 구시가와 북부에만 미쳤다. 부두거의 전부가 조차지였기 때문에, 공화국 정부는 자기 나라 항구를 외국에서 빌려 써야 하는 처지였다. 의회의 다수는 조차지 상사와 거래하는 열두 집의 돈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차지했고, 전후 복구 사업의 이권 역시 대부분 들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공화국'의 체계를 확립했지만, 그 실질은 조차지 경제에 기생하는 과두정에 군복을 입힌 것에 가까웠다.
7375
7476=== 스타투드라 정권 ===
7577==== 집권 과정 ====
......
8688
87891957년에는 의례적 국가원수였던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스타투드라는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은 채 수상이 대통령 직무를 겸임하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곧 수상 관저를 대통령궁으로 옮겼다. 1958년 11월 총선에서는 여당인 국민질서당이 의석 100석 가운데 94석을 차지했는데, 선거 당일 투표소마다 서번트 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가 되었다.
8890
89==== 외자 유치플라그룹 ====
90스타투드라 정권은 외국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단기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정권은 법인세를 사실상 면제하고 도시국가 시절의 무기명 예금 제도를 콘스탄티노폴랜드협의 피난처 었으며, 항만과 광산개발권을 기업에 헐값으넘겼. 대표적인 사례가 1957년 루이나의 산회사 [[플라자 그룹]]이 따낸 남부 타우로 희귀광물 채굴권이었다. 계약 기간은 60년, 정부가 받는 채굴료는 생산액의 3%에 불과했다.
91
92외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1957년과 1958년의 성장률은 수치상으로 두 자릿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윤은 정권 핵심부와 대가문, 외국 기업에 집중되었고, 광산과 항만의 일자리는 서번트 갱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선 배정되었다. 실업률과 빈곤율은 오히려 점차 상승했으며, 1958년 겨울에는 빵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부두 지와 북부 빈민가를 중심으로 번졌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은행과 기업들은 이 시기 스타투드라 정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고, 이 관계는 훗날 루이가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를 끝까지 적대하는 배경이 된다.
91==== 조차지====
92스타투드라 정권은 조차지 열강 및 외국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단기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1957년 스타투드라는 아홉 조차지 국가 차례로 「조차 연장 협정」을 맺어, 1960년 초부터 차례로 만료될 예정이던 조차 계약일괄 50년 연장 주었다. 그 대가로 정권은 차지 국가들부터 차관을 여왔는데, 차관상당 부분이 민질서당과 스타투드라 개인의 계좌흘러들어갔 사실은 혁명 이후에야 밝혀졌다. 같은 해 루이나의 하트웰 업은 타우로 채굴권 60년 연장받았고, 정부가 받는 채굴료는 생산액의 3%에 불과했다. 정권은 여기에 법인세를 사실상 면제하고 조차지 은행들의 무기명 예금을 공화국 구역에까지 허용해, 콘스탄티노폴을 랜드해협의 조세 피난처로 만들었다.
93
94외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1957년과 1958년의 성장률은 수치상으로 두 자릿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윤은 정권 핵심부와 열두 집, 조차지의 외국 상사에 집중되었고, 부두와 광산의 일자리는 서번트 갱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선 배정되었다. 실업률과 빈곤율은 오히려 점차 상승했으며, 1958년 겨울에는 빵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가와 북부 빈민가를 중심으로 번졌다. 조차지 국가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넓은 조차지를 가진 루이나와 플로렌시아 이 시기 스타투드라 정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고, 이 관계는 훗날 가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를 끝까지 적대하는 배경이 된다.
9395
9496==== 몰락 ====
9597빵값 시위를 서번트 갱과 경찰로 진압하면서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정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겼다. 외자 이권의 배분을 두고 대가문과 정권 핵심부가 대립했고, 서번트 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수비대 출신 장교들은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스타투드라는 경쟁자로 떠오른 군 장성 두 명을 1958년 말 반역 혐의로 체포했는데, 이 조치는 오히려 군 내부의 이반을 결정적으로 부추겼다. 1959년 초에 이르러 정권을 지키는 것은 서번트 갱과 회색 창고뿐이었다.
9698
9799=== 신보석운동과 인민혁명정부 ===
98100==== 신보석운동 ====
99스타투드라 정권에 맞선 세력의 구심점은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었다. 신보석운동은 1954년 변호사 레안드로스 모라이티스(1921~1969)가 부두 노조 활동가, 내륙 농업협동조합 운동가, 교사들과 함께 결성한 조직으로, 이름은 도시국가 시절 콘스탄티노폴을 부르던 별칭인 '해협의 보석'에서 따왔다. "이 도시의 보석은 열두 집의 금고니라 이 도시람들"이라는 창립 선언문의 문구처럼, 해협의 부를 소수의 손에서 되찾아 오자는 것이 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101스타투드라 정권에 맞선 세력의 구심점은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었다. 신보석운동은 1954년 변호사 레안드로스 모라이티스(1921~1969)가 부두 노조 활동가, 내륙 농업협동조합 운동가, 교사들과 함께 결성한 조직으로, 이름은 빌베른 통치 시절 콘스탄티노폴을 부르던 별칭인 '해협의 보석'에서 따왔다. 빌베른의 보석이던 도시가 이제는 조차지 은행과 열두 집의 금고 속 보석이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의식이었고, "이 도시의 보석은 조차지의 은행도, 열두 집의 금고 이 도시는 사람들"이라는 창립 선언문의 문구처럼 조차지를 되찾고 해협의 부를 소수의 손에서 되찾아 오자는 것이 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100102
101103모라이티스는 빌베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인물로, 1952년 대부두 파업 재판에서 노동자들의 변론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신보석운동은 처음에는 합법적인 사회운동 단체로 활동했으나, 1956년 「국가안정특별법」으로 해산 명령을 받은 뒤 지하로 들어갔다. 이후 3년간 신보석운동은 부두 노조와 내륙 협동조합을 거점으로 조직을 넓혔고, 1958년부터는 정권에 등을 돌린 수비대 출신 청년 장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102104
......
110112
111113다만 혁명정부는 헌정의 연속성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해산된 의회의 의장직만은 남겨 두고, 스타투드라 정권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원로 공화주의자 안셀모 페드레로에게 이를 맡겼다. 페드레로는 실권이 전혀 없는 명예직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혁명정부가 헌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정지했을 뿐"임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다. 이 어정쩡한 자리는 10년 뒤 루이나 개입의 명분 논쟁에서 뜻밖의 역할을 하게 된다.
112114
113혁명정부는 중심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우선 인민상공의소를 설립해 열두 집이 쥐고 있던 항만 사용권과 출입 허가를 한데 모았고, 중소 상인과 협동조합에도 허가를 개방했다. 1960년에는 「국민의료법」으로 무상의료를 도입해 구역마다 인민 진료소를 세웠으며, 교사와 대학생을 빈민가와 내륙으로 보내는 문맹 퇴치 운동을 벌여 문맹률을 1959년 38%에서 1968년 9%까지 끌어내렸다. 관광산업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방치되었던 별궁 유적을 정비해 관광지로 개방했고, 1965년에는 남부 에스테리 곶에 대형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 건설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덕분에 혁명정부는 초기에 높은 지지를 받았다.
114
115==== 승인 문제와 광산 국유화 ====
116그러나 주변들은 무장 봉기로 들어선 혁명정부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 난색다. 태도는 오래가지 않아, 혁명정부가 채무를 승계하고 외국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1961년까지 랜드해협 국가 대부분이 차례로 승인했다. 끝까지 승인하지 않은 것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뿐이었다.
117
118특히 루이나 스타투드라 시기부터 어져 자본 투자 관계 때문에 혁명정부에 적대적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07월의 타우로 광산 국유화였다.[* 루나의 광산회사인 플라자 그룹은 콘스탄티노폴 남부의 희귀 채굴권 확보하고 있었으며, 해당 광산 국유화 대상이 되었다. 혁명정부는 1957년 계약이 뇌물로 체결된 무효 계약이라며 보상을 거부했다.] 플라자 그룹의 로비를 받은 루이나 정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 정부의 루이나 내 자산을 동결했고, 196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산 물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었기에 그 타격은 컸다. 혁명정부는 그 빈자리를 [[사비에트]]와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원조로 메웠고, 이 선택은 루이나의 적대감을 더욱 굳혔다.
115==== 조차 ====
116혁명정부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과감하게 손댄 것은 조차지였다. 1959년 6월 1일 혁명정부는 「조차지 회수령」을 공포해 모든 조차 계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조차 계약은 이미 이 땅의 주권을 잃은 빌베른과 맺은 것이고, 스타투드라의 연장 협정은 뇌물로 체결된 것이므로 어느 쪽도 인민을 구속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인민민병대와 부두 노조는 사흘 만에 아홉 개 조차지의 경찰서와 세관, 법원을 접수했고, 조차지를 가르던 철책은 시민들의 손으로 뜯겨 나갔다. 조차지가 처음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의 모든 구역이 하나의 법 아래 놓인 순간이었다.[* 이날 뜯겨 나간 철책의 쇠기둥 일부는 녹여서 혁명기념탑의 재료로 쓰였다. 기념탑은 1970년대 구역 전쟁 중 폭파되어 현재는 받침대만 남아 있다.]
117
118조차지 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무장 봉기로 들어선 혁명정부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 거부했으며, 일부는 자국민 철수를 명분으로 군함해협에 다. 그러나 혁명정부가 조차지 안의 기업 자산에 대한 보상 교섭에 응하고 외국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조차지가 작았던 나라들부터 차례로 태도를 바꾸었다. 1961년까지 랜드해협 국가 대부분이 혁명정부를 승인했다. 끝까지 승인하지 않은 것은 가장 넓은 조차지를 잃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뿐이었다.
119
120특히 루이나 적대감은 컸다. 나는 도시에 가장 먼저, 가장 깊숙 조차지를 두었던 나라였고, 1945양도 협정이 물거품 뒤에도 남항구 조차지와 하트웰 업의 채굴권만큼은 지켜 왔다. 그런데 1959년 남항구 조차지를 잃 이어 1960년 7월에는 타우로 광산마저 국유화되었다.[* 혁명정부는 1957년 채굴권 연장이 뇌물로 체결된 무효 계약이라며 하트웰 광업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하트웰 광업과 남항구에 이해관계가 걸린 해운·보험 업계의 로비를 받은 루이나 페닝턴 행정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 정부의 루이나 내 자산을 동결했고, 196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산 물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었기에 그 타격은 컸다. 혁명정부는 그 빈자리를 [[사비에트]]와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원조로 메웠고, 이 선택은 루이나의 적대감을 더욱 굳혔다.
121
122==== 개혁 ====
123혁명정부는 복지 중심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회수한 조차지의 부두와 창고는 새로 설립된 인민상공회의소가 넘겨받아, 조차지 상사와 열두 집이 나눠 쥐고 있던 항만 사용권과 수출입 허가를 한데 모았고 중소 상인과 협동조합에도 허가를 개방했다. 1960년에는 「국민의료법」으로 무상의료를 도입해 구역마다 인민 진료소를 세웠으며, 교사와 대학생을 빈민가와 내륙으로 보내는 문맹 퇴치 운동을 벌여 문맹률을 1959년 38%에서 1968년 9%까지 끌어내렸다. 관광산업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방치되었던 별궁 유적을 정비해 관광지로 개방했고, 1965년에는 남부 에스테리 곶에 대형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 건설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덕분에 혁명정부는 초기에 높은 지지를 받았다.
119124
120125==== 고립과 내부 분열 ====
1211261960년대 중반, 혁명정부는 주변국인 [[체르드]] 공화국의 좌파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이를 계기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1966년에는 혁명정부의 몇 안 되는 우방이던 라 마베라 지역의 좌파 정권이 붕괴하면서 콘스탄티노폴은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루이나의 금수 조치로 관광객은 발길을 끊었고, 건설 중인 에스테리 곶 공항은 공산권의 자재와 기술자 없이는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67년부터는 설탕과 식용유, 연료가 배급제로 바뀌었다.
......
146151
147152=== 루이나의 침공 ===
148153==== 개입 결정 ====
14910월 19일의 총살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나는 즉시 움직였다. 루이나 국가안보회의는 긴급특별상황팀을 구성했고, 이튿날인 10월 20일 상황팀은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잭슨 대통령은 이를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 준비에 들어갔다.
15410월 19일의 총살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나는 즉시 움직였다. 루이나 국가안보회의는 긴급특별상황팀을 구성했고, 이튿날인 10월 20일 상황팀은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아서 W. 그랜트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이를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 준비에 들어갔다.
150155
151156한편 10월 22일부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루이나는 공동체 차원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사비에트와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들은 이를 '제국주의 침략의 포장'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11월 4일 아무런 결론 없이 결렬되었다.
152157
153158실제 침공은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몇 가지 사정이 겹쳤다. 첫째, 11월부터 3월까지의 포르틸락해협은 겨울 폭풍과 짙은 해무 때문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둘째, 콘스탄티노폴에는 의과대학 유학생 410명을 포함해 약 2,300명의 루이나인이 체류하고 있었고, 성급한 개입은 이들을 인질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셋째, [[루이나 의회]] 안에서도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선전포고 없는 무력개입에 반대했고, 여당인 공화연합 내부에서도 신중론이 적지 않았다.
154159
155160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1970년 3월 에스테리 곶 공항의 활주로가 부분 개통되자 곧바로 사비에트의 수송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루이나 정부는 이 공항이 공산권의 군사 공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항의 활주로 길이는 대형 여객기 운항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었고, 수송기가 실어 나른 화물의 대부분은 공사 자재였다는 사실이 이후 확인되었다. 다만 루이나 측은 지금도 "공항의 용도는 활주로가 아니라 누가 쓰느냐로 결정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어 4월 17일 평의회가 루이나 국적의 의대 유학생 29명과 해상보험사 직원 7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면서,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게 되었다.
156161
1571970년 5월 6일 잭슨 대통령은 최종 작전 명령에 서명했다. 루이나 의회에는 작전 개시 2시간 전에야 통보가 이루어졌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후 공개된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루이나 외무부는 콘스탄티노폴 남항구의 통제권을 '전략적 안보지대'로 명시해놓고 있었다.]
1621970년 5월 6일 그랜트 대통령은 최종 작전 명령에 서명했다. 루이나 의회에는 작전 개시 2시간 전에야 통보가 이루어졌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후 공개된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루이나 외무부는 콘스탄티노폴 남항구의 통제권을 '전략적 안보지대'로 명시해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루이나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1959년 혁명정부에 빼앗긴 옛 남항구 조차지였다.
158163
159164개입의 법적 근거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루이나 정부는 침공 직후, 가택연금 중이던 페드레로 의장이 작전 전날인 5월 7일 자로 루이나에 개입을 요청한 서한을 공개했다. 혁명정부가 헌정의 연속성을 보여 주려고 남겨 둔 명예직이, 역설적으로 그 혁명정부를 무너뜨리는 외국 군대를 부르는 법적 근거가 된 것이다. 페드레로 본인은 서한을 직접 작성했다고 확인했으나, 서한이 실제로 작전 이전에 작성되었는지, 연금 상태에서 어떻게 루이나 측에 전달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해명되지 않았다.
160165
......
167172
168173전투는 예상보다 순조로웠지만 오점도 남았다. 5월 11일 해군 함재기가 인민군 대공 진지로 오인한 북부의 요양병원을 폭격해 환자 21명이 숨졌다. 5월 12일에는 평의회 본부가 있던 올드 파로스 요새가 함락되었는데, 7개월 전 모라이티스가 총살당한 바로 그 요새였다. 루이나 정부는 요새 안뜰에서 희생자 추모식을 열었고, 이 장면은 루이나 국내에 개입의 정당성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69174
170가장 치열한 전투는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북부 병영과 구시가 일대에서 벌어졌다. 인민군 잔존 병력과 민병대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구시가에 틀어박혀 저항했고, 루이나군은 포병과 함포 사격으로 구역을 하나씩 밀어내며 전진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시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5월 17일 평의회 의장 브론다키스가 별궁 유적의 지하 저장고에서 붙잡혔고, 사카렐리스는 5월 20일 북부 해안의 어촌에서 어선을 타고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11년 전 스타투드라가 대통령궁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힌 것과 판박이였다는 점에서, 콘스탄티노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 나라 권력자들은 끝이 오면 다들 바다부터 찾는다"며 비꼬았다.]
171
1725월 29일, 잭슨 대통령은 해협에 정박한 제2함대 기함에 올라 "콘스탄티노폴에서의 주요 전투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3주간의 교전 끝에 루이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기간 루이나군은 406명이 전사하고 1,870명이 부상했으며, 콘스탄티노폴 측은 군인 약 3,100명과 민간인 약 2,4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억류된 사비에트 고문단과 기술자들은 7월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잭슨의 기함 연설은 당시에는 승리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점령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루이나에서는 '5월 29일식 승리'라는 말이 섣부른 승리 선언을 비꼬는 관용구로 쓰인다.]
175가장 치열한 전투는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북부 병영과 구시가 일대에서 벌어졌다. 인민군 잔존 병력과 민병대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구시가에 틀어박혀 저항했고, 루이나군은 포병과 함포 사격으로 구역을 하나씩 밀어내며 전진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시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5월 17일 평의회 의장 브론다키스가 별궁 유적의 지하 저장고에서 붙잡혔고, 사카렐리스는 5월 20일 북부 해안의 어촌에서 어선을 타고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11년 전 스타투드라가 대통령궁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힌 것과 판박이였다는 점에서, 시민들은 이를 두고 "이 나라 권력자들은 끝이 오면 다들 바다부터 찾는다"며 비꼬았다.]
176
1775월 29일, 그랜트 대통령은 해협에 정박한 제2함대 기함에 올라 "콘스탄티노폴에서의 주요 전투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3주간의 교전 끝에 루이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기간 루이나군은 406명이 전사하고 1,870명이 부상했으며, 콘스탄티노폴 측은 군인 약 3,100명과 민간인 약 2,4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억류된 사비에트 고문단과 기술자들은 7월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한편 침공 과정에서 루이나군에 붙잡힌 민간인 가운데 일부는 포로 신분으로 루이나 본토에 이송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프로젝트 KV]]의 오라클 작전 피험자로 쓰였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드러났다.[* 그랜트의 기함 연설은 당시에는 승리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점령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루이나에서는 '5월 29일식 승리'라는 말이 섣부른 승리 선언을 비꼬는 관용구로 쓰인다.]
173178
174179혁명정부는 해산되었고, 사카렐리스와 브론다키스는 1971년 루이나가 설치한 특별법정에서 모라이티스 살해와 10월 19일 학살의 책임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민정이양위원회'를 설치하여 사실상 보호령 체제를 가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전투의 종료'였을 뿐 '전쟁의 종결'은 아니었다.
175180
......
179184
180185이 두 명령은 점령 초기 최대의 실책으로 꼽힌다. 혁명정부 10년 동안 공무원과 교사, 인민 진료소의 의사가 되려면 사실상 당원이어야 했기 때문에, 명령 제1호로 공직에서 쫓겨난 사람은 4만 3천여 명에 달했다. 하룻밤 사이에 학교와 진료소, 배급소를 운영할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명령 제2호로 해산된 인원은 서류상의 민병대까지 합쳐 12만 명에 이르렀는데, 위원회는 이들의 무기를 회수하는 절차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고, 자진 반납된 무기는 추정 보유량의 11%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루이나는 총을 가진 채 일자리와 연금을 동시에 잃은 수만 명의 남자들을 거리로 내보낸 셈이 되었다.
181186
182같은 시기 도시 곳곳에서는 약탈이 벌어졌다. 루이나군은 남항구와 석유 저장소, 에스테리 곶 공항에는 병력을 배치했지만, 국립문서고와 옛 총독부 공문서고에는 경비병 한 명 두지 않았다. 5월 하순 나흘 동안 두 문서고는 약탈당한 뒤 불탔고, 빌베른 통치기부터 공화국 시기까지의 행정 기록 대부분이 이때 소실되었다.[* 오늘날 독립 이전 콘스탄티노폴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1차 사료가 극히 드문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빌베른 본국에 보관된 사본이나 해외로 반출되었던 문서가 대부분이다.]
187같은 시기 도시 곳곳에서는 약탈이 벌어졌다. 루이나군은 남항구와 석유 저장소, 에스테리 곶 공항에는 병력을 배치했지만, 국립문서고와 옛 총독부 공문서고에는 경비병 한 명 두지 않았다. 5월 하순 나흘 동안 두 문서고는 약탈당한 뒤 불탔고, 빌베른 통치기부터 공화국 시기까지의 행정 기록 대부분이 이때 소실되었다.[* 오늘날 독립 이전 콘스탄티노폴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1차 사료가 극히 드문 것은 대부분 이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빌베른 본국에 보관된 사본이나 해외로 반출되었던 문서가 대부분이다.]
183188
184189시민들은 전기와 수도, 식량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방치되었다. 침공 당시의 포격으로 도시 최대의 발전소가 파손되었고, 혁명정부가 운영하던 배급망은 명령 제1호로 그 운영자들이 모두 쫓겨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1970년 여름 콘스탄티노폴에서는 하루 전기 공급이 4시간을 넘는 구역이 거의 없었고, 빵 한 덩이 값이 두 달 만에 여섯 배로 뛰었다.
185190
186191==== 자치정부의 급조 ====
187192기동전 중심의 작전으로 도시의 요충지들을 선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점령 이후의 병력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전후 재건을 위한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루이나 정부의 목표는 처음부터 '빨리 넘기고 빨리 빠지는 것'이었다. 침공에 투입된 3만 8천여 명의 병력은 이듬해 6월까지 1만 4천 명으로 줄었다.
188193
189그리고 1970년 11월 16일, 루이나는 그 상태를 '자치의 시작'이라며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를 급조해버렸다.[* 해당 정부는 루이나 국무부 외교안보국 직속의 임시통치위원회가 관할했으며, 초대 행정관은 벨포르 출신 전직 외교관 앙드레 P. 르쿠르브였다. 르쿠르브는 콘스탄티노폴의 공용어를 하나도 구사하지 못해 모든 업무를 통역을 거쳐 처리했다.] 자치정부의 각료와 고위 관료는 대부분 루이나에서 돌아온 망명객들로 채워졌다. 1947년 내전에서 패해 루이나로 건너간 왕정파의 후손, 그리고 3월 혁명 이후 추방된 스타투드라 정권의 관료들었다. 시민들이 보기에 자치정부는 한 번은 내전으로, 한 번은 혁명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돌아온 정부였다.
190
191루이나군과 자치정부는 남항구와 옛 세관 구역 일대를 장벽과 검문소로 둘러싼 '남항구 안전지대'에 틀어박혔다. 루이나 외무부의 비밀 문서가 '전략적 안보지대'로 지목했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안전지대 안에는 24시간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되었고, 시민들은 이곳을 '유리 상자'라고 불렀다. 밖에서는 안이 훤히 보이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194그리고 1970년 11월 16일, 루이나는 그 상태를 '자치의 시작'이라며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를 급조해버렸다.[* 해당 정부는 루이나 국무부 외교안보국 직속의 임시통치위원회가 관할했으며, 초대 행정관은 벨포르 출신 전직 외교관 앙드레 P. 르쿠르브였다. 르쿠르브는 콘스탄티노폴의 공용어를 하나도 구사하지 못해 모든 업무를 통역을 거쳐 처리했다.] 자치정부의 각료와 고위 관료는 대부분 루이나에서 돌아온 망명객들로 채워졌다. 1947년 내전에서 패해 루이나로 건너간 왕정파의 후손, 3월 혁명 이후 추방된 스타투드라 정권의 관료들, 그리고 조차지 시절 루나 조차지 당국 밑에서 일하던 매판 가문 출신들이었다. 시민들이 보기에 자치정부는 한 번은 내전으로, 한 번은 혁명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돌아온 정부였다.
195
196루이나군과 자치정부는 남항구와 옛 세관 구역 일대를 장벽과 검문소로 둘러싼 '남항구 안전지대'에 틀어박혔다. 11년 전까지 루이나 조차지였고, 루이나 외무부의 비밀 문서가 '전략적 안보지대'로 지목했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안전지대 안에는 24시간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되었고, 시민들은 이곳을 '유리 상자'라고 불렀다. 밖에서는 안이 훤히 보이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192197
193198==== 저항의 시작 ====
194199이 막장스러운 전후 처리는 곧바로 시민 저항을 낳았다. 도심에 몰려든 저항세력은 루이나군이 퇴각한 구역을 중심으로 무장했고, 특히 수복되지 않은 외곽 지역은 사실상 국경이 무너진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다.
......
209214이들 세력은 단순히 루이나를 적대하는 것을 넘어서, 콘스탄티노폴 내의 각 무장세력들을 교묘히 충돌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카라즈다가 보기에 루이나군은 언젠가 떠날 존재였고, 그가 원한 것은 루이나가 떠난 뒤 서로를 증오하는 세력들로 산산조각 난 도시였다. 정화전선의 폭탄은 루이나군 기지보다 시장과 버스 정류장, 장례 행렬을 더 자주 노렸다.
210215
211216====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와 구역 전쟁 ====
212정화전선이 파고든 틈은 콘스탄티노폴인과 혼혈계 주민 사이의 오래된 균열이었다. 혼혈계는 도시국가절부터 랜드해협 지에서 흘러든 부두 노동자들의 후손으로, 남항구 인근의 칼라미 구역 모여 았다. 루이나는 자치정부의 경찰과 방위대를 모집하면서 구 정권과 연줄이 적은 혼혈계를 우선 채용했는데, 콘스탄티노폴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점령군의 앞잡'를 따로 기르는 것으로 보였다. 반대로 혼혈계 주민들은 저항세력의 폭탄이 자신들의 구역에 집중되는 것을 콘스탄티노폴인들의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213
2141974년 2월 22일, 장이 서는 금요일 오전의 칼라미 시장 한복판에서 폭약을 실은 트럭이 폭발했다. 211명이 숨지고 400명 이상이 다쳤다. 현장에는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콘스탄티노폴인 무장조직 명의로 "칼라미의 배신자들에게 경고한다"는 전단이 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조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테러가 정화전선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은 1979년 카라즈다가 사망한 뒤 그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문서에는 폭탄 트럭의 경로와 전단 문구의 초안이 적혀 있었다.]
215
216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5년이 걸렸지만, 보복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혼혈계 청년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인근의 콘스탄티노폴인 구역을 습격했고, 콘스탄티노폴인 민병대는 혼혈계 주민을 겨냥한 보복으로 응수했다.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이 연쇄 보복을 '구역 전쟁'이라 부른다. 매일 아침 해협에는 손이 묶인 시신이 떠올랐고, 도로 곳곳에 무장세력이 세운 가짜 검문소에서는 신분증에 적힌 이름과 말투 하나로 생사가 갈렸다. 시민들은 검문소를 지나는 구역에 따라 꺼내 보일 신분증을 두 장씩 들고 다녔다.
217
218구역 전쟁은 도시의 인구 지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섞여 살던 동네는 한쪽 주민만 남은 동네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70만 명 이상이 집을 떠나 피란민이 되었다.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1975년 한 해에만 약 1만 9천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나군은 구역과 구역 사이에 콘크리트 장벽을 세워 충돌을 막으려 했고, 1976년 말까지 세워진 장벽의 길이는 42km에 달했다. 장벽은 충돌을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도시의 분열을 콘크리트로 굳혀 버렸다.
217정화전선이 파고든 틈은 빌베른계 주민과 혼혈계 주민 사이의 오래된 균열이었다. 혼혈계는 조차지대에 국이 들여온 노동자들의 후손으로, 조차지가 회수된 뒤에도 대부분 옛 조차지 구역에 모여 살았다. 남항구 인근의 칼라미 구역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혼혈계 거주지였다. 조차지 시절 혼혈계는 조차지 당국의 비호를 받는 대신 빌베른계로부터 '외국의 앞잡이'라는 눈총을 받았고, 조차지가 사라진 뒤 앙금은 가시지 않았다. 루이나는 자치정부의 경찰과 방위대를 모집하면서 조차지 시절의 언어를 알고 구 정권과 연줄이 적은 혼혈계를 우선 채용했는데, 빌베른계 주민들의 눈에는 이것이 조차지 시절처럼 외국 자기 사람을 따로 기르는 것으로 보였다. 반대로 혼혈계 주민들은 저항세력의 폭탄이 자신들의 구역에 집중되는 것을 빌베른계의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218
2191974년 2월 22일, 장이 서는 금요일 오전의 칼라미 시장 한복판에서 폭약을 실은 트럭이 폭발했다. 211명이 숨지고 400명 이상이 다쳤다. 현장에는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빌베른계 무장조직 명의로 "칼라미의 배신자들에게 경고한다"는 전단이 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협의 아들들이라는 조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테러가 정화전선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은 1979년 카라즈다가 사망한 뒤 그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문서에는 폭탄 트럭의 경로와 전단 문구의 초안이 적혀 있었다.]
220
221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5년이 걸렸지만, 보복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혼혈계 청년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인근의 빌베른계 구역을 습격했고, 빌베른계 민병대는 혼혈계 주민을 겨냥한 보복으로 응수했다.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이 연쇄 보복을 '구역 전쟁'이라 부른다. 매일 아침 해협에는 손이 묶인 시신이 떠올랐고, 도로 곳곳에 무장세력이 세운 가짜 검문소에서는 신분증에 적힌 이름과 말투 하나로 생사가 갈렸다. 시민들은 검문소를 지나는 구역에 따라 꺼내 보일 신분증을 두 장씩 들고 다녔다.
222
223구역 전쟁은 도시의 인구 지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조차지 회수 이후 10여 년 동안 조금씩 허물어지던 옛 조차지의 경계가 다시 살아났고, 섞여 살던 동네는 한쪽 주민만 남은 동네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70만 명 이상이 집을 떠나 피란민이 되었다.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1975년 한 해에만 약 1만 9천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나군은 구역과 구역 사이에 콘크리트 장벽을 세워 충돌을 막으려 했고, 1976년 말까지 세워진 장벽의 길이는 42km에 달했다. 장벽 상당수는 공교롭게도 옛 조차지의 철책이 서 있던 자리를 따라 세워졌다. 장벽은 충돌을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도시의 분열을 콘크리트로 굳혀 버렸다.
219224
220225==== 특무처와 '더러운 전쟁' ====
221226구역 전쟁이 한창이던 1975년, 루이나에게는 콘스탄티노폴에 병력을 늘릴 여력이 없었다. 그해 가을 [[청북전쟁]]에서 회색의 불꽃 작전이 시작되면서 루이나군의 병력과 예산의 우선순위는 그쪽으로 넘어갔고, 콘스탄티노폴은 루이나 언론에서조차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잊힌 전쟁'이 되었다. 증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루이나가 택한 것은 적은 병력으로 판을 흔드는 비밀 공작이었고, 그 일을 맡은 것이 국방부 [[특무처]]였다.
222227
223특무처의 공작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는 저항세력과 싸울 '협력 민병대'의 육성이었다. 특무처는 칼라미의 혼혈계 자경단과 저항세력에 원한을 가진 일부 콘스탄티노폴인 민병대에 무기와 자금을 대 주었는데, 이 민병대들은 저항세력뿐 아니라 상대 공동체의 민간인에게도 그 무기를 썼다. 구역 전쟁의 사망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루이나가 무장시킨 민병대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점령이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둘째는 저항세력 지도부에 대한 표적 암살이었다. 셋째는 이 모든 활동의 자금을 의회 예산 밖에서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특무처는 콘스탄티노폴의 암시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아편을 되파는 방식으로 장부에 없는 돈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아편 유통 경로는 점령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976년 이후 [[올덴버그 마피아]]가 루이나 남부의 아편 유통망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산 아편이 주요 공급원 가운데 하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28특무처의 공작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는 저항세력과 싸울 '협력 민병대'의 육성이었다. 특무처는 칼라미의 혼혈계 자경단과 저항세력에 원한을 가진 일부 빌베른계 민병대에 무기와 자금을 대 주었는데, 이 민병대들은 저항세력뿐 아니라 상대 공동체의 민간인에게도 그 무기를 썼다. 구역 전쟁의 사망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루이나가 무장시킨 민병대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점령이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둘째는 저항세력 지도부에 대한 표적 암살이었다. 셋째는 이 모든 활동의 자금을 의회 예산 밖에서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특무처는 콘스탄티노폴의 암시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아편을 되파는 방식으로 장부에 없는 돈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아편 유통 경로는 점령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976년 이후 [[올덴버그 마피아]]가 루이나 남부의 아편 유통망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산 아편이 주요 공급원 가운데 하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24229
225230점령 후반부에는 루이나의 민간 경비업체들도 대거 콘스탄티노폴에 들어왔다. 병력이 모자란 루이나군은 보급 호송과 안전지대 경비, 자치정부 요인 경호를 민간 업체에 맡겼는데, 이들 경비원은 콘스탄티노폴의 법도, 루이나의 군법도 적용받지 않는 법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1976년 8월 19일, 자치정부 각료의 차량 행렬을 호위하던 루이나 경비업체 직원들이 세르미 광장에서 접근하던 승용차에 발포한 뒤 광장의 군중을 향해 난사해 어린이 4명을 포함한 민간인 17명이 숨졌다. 업체는 공격을 받아 대응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사에서 공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에 연루된 경비원들은 아무런 처벌 없이 루이나로 귀국했다. 이 '세르미 광장 사건'은 자치정부조차 공개적으로 루이나에 항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았다.
226231
......
232237징집병을 교대로 파견하는 구조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콘스탄티노폴에 파견된 루이나군의 대부분은 징집병이었고, 1년 단위로 교대되는 이들은 점령지의 지형과 언어를 익힐 무렵이면 귀국해야 했다. 귀국한 병사들이 전하는 '과부의 길'과 '유리 상자'의 이야기는 정부의 공식 발표와 전혀 달랐다. 청북전쟁 반대 운동이 징병 제도 자체를 겨누기 시작하자, 해협 건너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점령 역시 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33238
234239==== 현지화 정책 ====
235증원도 철수도 할 수 없게 된 루이나가 1977년부터 내건 구호는 "콘스탄티노폴의 치안은 콘스탄티노폴에게"였다. 이른바 현지화 정책은 자치정부의 방위대와 경찰을 대폭 늘려 루이나군의 임무를 넘겨받게 한다는 것으로, 방위대의 병력은 1979년 서류상 4만 1천 명까지 늘어났다.
240증원도 철수도 할 수 없게 된 루이나가 1977년부터 내건 구호는 "콘스탄티노폴의 치안은 현지의 손으로"였다. 이른바 현지화 정책은 자치정부의 방위대와 경찰을 대폭 늘려 루이나군의 임무를 넘겨받게 한다는 것으로, 방위대의 병력은 1979년 서류상 4만 1천 명까지 늘어났다.
236241
237242그러나 서류상의 숫자와 실제 병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980년 루이나 감사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방위대 병력의 약 30%는 급여만 타 가는 '유령 병사'였고, 지휘관들은 유령 병사의 급여와 보급품을 착복했다. 지급된 소총과 탄약 가운데 상당량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저항세력의 손에 들어갔고, 방위대 병사가 낮에는 검문소를 지키고 밤에는 무장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루이나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적의 군대를 우리 돈으로 훈련시키고 있다"는 자조가 돌았다.
238243
......
282287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전기와 수도는 끊긴 지 오래였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 치료를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거했다. 혁명정부 시절 구역마다 세워졌던 인민 진료소는 대부분 약탈당하거나 무장조직의 사무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AK-47을 조립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고, 하루 세 끼는커녕 하루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운 좋은 날'로 여겨졌다. 1988년 겨울에는 곡물 밀수로가 세력 간 전투로 끊기면서 기근이 닥쳐 약 3만 명이 굶어 죽거나 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283288
284289==== 국제사회의 외면 ====
285국제연합은 1985년부터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했지만, 무장세력의 수가 너무 많고 목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이듬해 개입을 포기했다.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평화에 합의할 상대가 있어야 했는데, 콘스탄티노폴에는 그런 상대가 147개나 있었던 것이다. 루이나도 더 이상 대규모 개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에도 루이나 정보기관들은 콘스탄티노폴 내에 잔류하며 [[프로젝트 KV|비공식 작전]]을 수행다.]
290국제연합은 1985년부터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했지만, 무장세력의 수가 너무 많고 목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이듬해 개입을 포기했다.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평화에 합의할 상대가 있어야 했는데, 콘스탄티노폴에는 그런 상대가 147개나 있었던 것이다. 루이나도 더 이상 대규모 개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에도 루이나 정보기관들은 콘스탄티노폴 내에 잔류하며 비공식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91
292무정부 상태의 해안은 곧 해적의 소굴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포르틸락해협을 지나는 상선들이 잇따라 습격당했는데, 루이나의 신생 물류기업이던 [[플라자 그룹]]이 1983년부터 1986년 사이 해적에게 입은 선박 피해 가운데 상당수도 이 해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6293
287294이 시기 콘스탄티노폴은 환경 재앙까지 겪었다. 1986년 루이나군 침공 이후 방치되어 있던 남부 타우로 광산의 침출수 저수지가 무너져 중금속 폐수가 남부 해안으로 쏟아졌고, 1987년에는 세력 간 전투 중 불이 붙은 남항구 석유 저장소가 11개월 동안 타올랐다. 도시를 뒤덮은 매연과 폐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이 일대의 기후이변을 부추긴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자세한 내용은 자연환경 문단 참고.]
288295
289296=== 자치권 회복 선언 이후 ===
290297==== 보안연합 체제 ====
291이러한 내전 상황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전쟁이 멈춘 것은 평화가 찾아와서가 아니라 모두가 지쳐서였다. 10년 가까운 소모전 끝에 1990년대 초에는 싸울 사람도, 빼앗을 것도 바닥났고, 살아남은 세력들은 서로의 구역을 인정하는 편이 싸우는 것보다 이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3년 남항구에서 주요 세력들이 맺은 이른바 '남항구 협정'으로 도시는 열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을 장악한 세력은 '보안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기로 했다.[* 도시를 열두 몫으로 나눈 것이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콘스탄티노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열두 집이 총을 들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298이러한 내전 상황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전쟁이 멈춘 것은 평화가 찾아와서가 아니라 모두가 지쳐서였다. 10년 가까운 소모전 끝에 1990년대 초에는 싸울 사람도, 빼앗을 것도 바닥났고, 살아남은 세력들은 서로의 구역을 인정하는 편이 싸우는 것보다 이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3년 남항구에서 주요 세력들이 맺은 이른바 '남항구 협정'으로 도시는 열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을 장악한 세력은 '보안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기로 했다.[* 도시를 열두 몫으로 나눈 것이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은 이를 두고 "열두 집이 총을 들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292299
293300보안연합은 겉으로는 구역의 치안을 맡는 민병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통행세와 보호비, 밀수 수수료를 걷는 수익 조직에 가까웠다. 구역 사이의 대규모 시가전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그 대가로 시민들은 구역 경계를 넘을 때마다 통행세를 내고 가게마다 보호비를 바치는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보안연합조차 치안보다는 수익 기반 확장에 주력했고, 협정은 수시로 깨졌다가 다시 맺어졌다.
294301
......
299306
300307선언의 법적 효력을 둘러싼 문제도 남았다. 보호 권한을 반환하려면 이를 넘겨받을 정부가 있어야 했는데, 콘스탄티노폴에는 그런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제법상 루이나의 보호령 지위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콘스탄티노폴이 오늘날까지 '명목상 루이나 보호령'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연합 역시 신임장을 제출할 정부가 사라진 콘스탄티노폴의 대표권을 사실상 정지시켰다.
301308
302==== 플라자 그룹 귀환 ====
303루이나 정부가 떠난 자리에 다시 들어온 것은 루이나의 기업이었다. 1996[[플라자 그룹]]은 타우로 장악한 보안연합 계약을 맺고 타우로 광산채굴을 재개했다. 1960년 혁명정 국유화하면서 루이나 콘스탄티노폴의 촉발했던 바로 광산, 36년 국가가 아닌 무장력의 손을 거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304
305플라자 그룹은 광산과 송로를 키기 위해 자체 경비 병력을 고, 보호 범위를 점차 넓혀 도시에 있던 나인 역까경비하게 되었다. 현재 일부 지역의 방어와 치안을 맡고 있는 플라자 그룹의 로고가 이 지역 주민과 관련된 협정서에 상징처럼 쓰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309==== 플라자 그룹 ====
310루이나 정부가 떠난 자리에 들어온 것은 루이나의 민간 기업이었다. 1989민간군사회사 부문을 출범시킨 [[플라자 그룹]]은 자치권 회복 선언 이듬해인 1995년 포르틸락해협을 나는 루이나 선박의 호송, 도시에 남은 루이나인 거주 지역경비를 맡기 시작했다. 루이나인 거주 지역은 대 루이나 조차지였던 남항구 일 몰려 있었고, 플라자 룹의 경비 병력은 구역 둘레검문소를 주변 보안연합들과 통행 협정을 맺었다.
311
3121959년 혁명정부가 옛 조차 세대 만에 다시 루이나인의 구역이 된 셈이다. 다만 이번에 구역을 지키는 것은 루이나 정부가 니라 기업었고, 그 경계 밖의 민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않았다. 현재 일부 지역의 방어와 치안을 맡고 있는 플라자 그룹의 로고가 이 지역 주민과 관련된 협정서에 상징처럼 쓰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306313
307314==== 1997년 이후 ====
3081997년에는 시국가 시절부터 명맥이어 오던 빌베른 제1 라지오-테레비방송국의 콘스탄티노폴 지국이 철수했다. 같은 해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일대에서 대규모 고속 무선통신망 시험 설치 실험을 시행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검열 기술과 관련 법제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콘스탄티노폴 안에서 자생적인 대중매체가 성장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3151997년에는 독립 이후에 빌베른계 주민상대로 방송을 이어 오던 빌베른 제1 라지오-테레비방송국의 콘스탄티노폴 지국이 철수했다. 같은 해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일대에서 대규모 고속 무선통신망 시험 설치 실험을 시행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검열 기술과 관련 법제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콘스탄티노폴 안에서 자생적인 대중매체가 성장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309316
3103172000년대 들어 콘스탄티노폴은 랜드해협 인신매매와 불법 약물 밀거래의 중심지로 굳어졌다.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인 .ct는 사기와 불법 거래 사이트에 악용된다는 이유로 2004년 루이나에 의해 차단되었고, 국제 전화는 일부 지역에서만 연결된다. 1968년 이후 인구 조사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인구는 알 수 없으며, 현재 약 520만 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311318
312319현재는 루이나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플라자 그룹이 보호하고 있는 것 외에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더이상 행정력을 투입하고 있지 않다. 로마가 떠나고, 빌베른이 손을 놓고, 루이나가 철수한 뒤에도 해협의 배들은 여전히 이 도시 앞을 지나간다. 다만 이제 그 배들은 더 이상 이 도시에 기항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