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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비교)

r10 vs r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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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96
197197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산 유신'''은 북산을 더 이상 낡은 봉건 왕국이 아니라, 동방에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왕정은 상징으로 남았고, 의회와 내각이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었으며, 근대적 군대와 산업, 교육 체제가 국가를 지탱했다. 북산은 이 유신을 통해 비로소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할 수 있었고, 이는 훗날 청평과의 전쟁과 루이나와의 접촉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98198=== 제 1차 청평침공 ===
1991929년, 북산 왕국은 수십 년간의 근대화와 ‘북산 유신’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모해 있었다. 왕정은 상징적 권위만 남고, 의회와 내각이 국가 운영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는 서구 열강의 군사 교리를 받아들여 정예화되었다. 철도와 전신망은 전선을 빠르게 연결했고, 근대식 공장에서는 탄약과 무기가 대량 생산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북산은 더 이상 피폐한 농업국가가 아니라, '''부국강병'''을 실현한 동방의 신흥 강국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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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오랜 세월 북산에게 치욕과 굴레를 안겨주었던 청평은 이제 쇠락한 제국에 불과했다. 왕조의 권위는 부패한 관료제에 갉아먹히고 있었으며, 낡은 무기와 제도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북산 의회는 청평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원정을 승인했다. 이 결의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라기보다, '''“북산의 운명을 되찾는 성전”'''으로 선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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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929년 4월, 북산군 총사령관 '''나카무라 겐로쿠(中村 玄六) 장군'''의 지휘 아래 25만 대군이 동원되었다. 현대적 훈련을 받은 보병 사단, 최신식 야포와 기관총을 장비한 포병대, 그리고 신설된 기갑부대와 항공정찰대가 함께 투입되었다. 전선에는 철도가 깔려 보급이 신속히 이어졌으며, 전신선이 군사 지휘를 실시간으로 연결했다. 이는 청평군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직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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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침공은 세 갈래로 전개되었다.
206- 북부 방면군은 산악을 넘어 청평 국경 요새를 돌파했다. 산성은 강고했지만, 작역탄을 사용한 압도적 포격으로 방어진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207- 서부 방면군은 강을 도하하여 청평의 농업 지대를 점령했고, 철도로 보급된 대포가 성곽을 무너뜨렸다.
208- 동부 주력군은 수도 '''띠에우리엔(Tieurien)'''을 직접 겨냥하며 진격했다.
209
210북산군은 “포병 사격 → 보병 돌격 → 기관총 화망으로 퇴로 차단”이라는 서구식 교리를 완벽히 수행했다. 청평군은 여전히 장창과 낡은 화승총에 의존하며, 지휘 체계조차 부패와 혼란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곳곳의 요새는 포탄 세례에 파괴되었고, 청평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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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7월, 북산군은 띠에우리엔을 포위했다. 수도 방어선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고, 주민들은 공포 속에 굶주렸다. 청평 황실은 끝내 북산군의 포위를 버텨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북산 측은 이를 “대륙의 신질서가 시작되는 순간”이라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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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북산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제1차 청평 침공은 “'''과거의 수세적 운명을 끊어내고, 북산이 동방의 주도자로 떠오른 전쟁'''”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이를 유신의 결실로 포장하며,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에서 환호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조약은 경제적 기반을 강화했고, 북산 사회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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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막대한 군비와 전쟁 비용이 사회에 부담을 남겼으며, 청평의 완강한 저항과 민중 봉기가 뒤이어 발생했다. 북산은 승리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전쟁은 훗날 더 큰 갈등의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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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자세한 전쟁의 경과와 점령 과정은 [[청평 침공]] 문서를 참조.
199219=== 현대 ===
200220=== 청북전쟁 ===
201221== 자연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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