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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 | 303 | 군 내부에서도 동요가 시작되었다. 병사와 하급 장교들 사이에서 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에 대한 거부감이 퍼졌고, 일부 부대는 시위 진압 참여를 거부했다. 4.13의 기억은 군 수뇌부에게도 무거운 짐이었다. 또다시 대규모 유혈 진압에 나설 경우 국제 사회의 제재와 국내 사회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경제계의 유력 인사들마저 정치적 불안정이 장기화되면 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며 타협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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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4 | 304 | ==== [[1.10 민주화 선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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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 | 시위가 3주 넘게 이어지며 사회 전체가 마비 직전에 이른 1988년 1월 10일, 제5공화국의 집권당 대표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정되어 있던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가 전격적으로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수용, 정치범의 전원 석방, 정당 등록과 활동의 자유 보장, 언론 검열의 폐지, 4.13 유혈 진압에 대한 진상 조사, 그리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실시를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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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7 | 베인브리지의 선언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도, 정권 내부에게도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그는 군부 출신이 아니라 관료와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아 온 인물이었고, 정권 내 온건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더 이상의 강경 대응은 4.13의 재판이 될 것이고, 그 경우 정권은 물론 군과 국가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국제적 환경의 변화, 특히 미합중제국의 태도 변화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미합중제국은 이 시점에서 루이나의 민주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고, 제5공화국에 대한 외교적 지원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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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 | 1.10 민주화 선언은 거리의 시민들에게 환호로 맞이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오랜 억압 아래 숨죽여 왔던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목소리가 통했음을 실감했다. 물론 선언의 이행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군부 강경파의 반발과 방해, 정치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 개헌 과정에서의 이견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10.10 군사반란과 12.6 사태, 벨포르의 봄과 그 좌절, 4.13 유혈 진압을 모두 겪어 온 루이나 시민들은 이번만큼은 민주주의를 지켜 내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고 있었고, 시민 사회의 감시와 국제적 관심이 그 과정을 떠받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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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 | 310 | ==== 제 6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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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 | 313 | ==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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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 | 314 | [[분류:랜드해협]][[분류:루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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