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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4 vs 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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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76레이먼드의 취임은 단순한 권력의 시작이 아니었다. 이는 루이나가 5세기 이후 플로렌시아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의 헌법과 제도를 갖춘 근대 국민국가로 자리매김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임시정부는 그 임무를 다하고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며, 루이나 공화국은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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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군사독재 ===
178=== 민주주의의 몰락과 12.23 쿠데타 ===
1791945년 독립과 함께 세워진 루이나의 민주주의는 짧지만 뜨거 시작이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레이먼드'''는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권좌에 올랐고,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는 전후 복구와 민주적 제도 정착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독립 초기의 낙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회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여러 계파와 세력이 권력을 둘러싸고 경쟁했으며, 급속한 경제 재건 과정에서 농민·노자·상인 간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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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무엇보다 권력기관 내부의 균열이 치명적이었다. 신생 공화국은 안보와 치안을 위해 강력한 정보기관을 창설했는데, 이 조직은 초기부터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며 대통령과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보부장은 자신이 국가 안보의 수호자라 자부했으나, 실제로는 권력욕이 강했고 레이먼드의 민주주의 노선을 불신했다. 레이먼드가 군과 정보기관을 견제하려 하자, 내부의 긴장은 점차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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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948년 7월, 비극이 닥쳤다. 벨포르 시내 광장에서 열린 “재건 5개년 계획” 연설 직후,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차량에 오르던 순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암살자는 바로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보부장이었다. 그는 체포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다. 조지 레이먼드의 죽음은 루이나 국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독립의 상징, 민주의의 상징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애도했으나, 시에 권력 공백과 정치적 혼란이 급격히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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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정국은 혼돈에 빠졌다. 의회는 임시 권한대행을 선출했지만, 정당 간 갈등과 계파 싸움은 심각했고, 일부 장군들과 보수적 정치인들은 “민주주의 체제는 아직 루이나에 맞지 않는다”는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와중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군 내부의 강경파 장군 '''[[비달 파브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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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파브르는 독립전쟁 당시 장군으로 이름을 알렸고, 군 내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레이먼드의 죽음 이후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은 강력한 질서 회복”이라 장하며 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48년 가을부터 그는 비밀리에 충성 장교들을 규합했고, 벨포르와 주요 도시의 병력 이 준비했다. 쿠데타 계획은 치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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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948년 12월 23일, 이른바 '''12.23 쿠데타'''가 발발했다. 새벽 2시, 파브르의 명령을 받은 기갑부대가 수도 벨포르에 진입해 의회 의사당과 대통령궁, 중앙 방송국, 행정기관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수도의 모든 권력기관은 군의 통제 아래 놓였다. 같은 시각, 군은 전국에 계엄을 선포하고, 반대파 정치인과 사회운동 수백 명을 일거에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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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라디오에서는 군의 성명이 흘러나왔다. “루이나 공국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결단을 내렸다. 의회는 해산되며, 모든 권력은 임시 군사위원회에 귀속된다.” 파브르는 자신을 ‘국가 구원자’라 칭하며 국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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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시민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 하루아침에 체제가 뒤집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거리에는 군 트럭과 무장병력이 가득했고, 신문사는 폐쇄되었으며, 반대 목소리를 낸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체포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불과 3년 만에 무너졌고, 국민들은 다시 철권 통치 아래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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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이렇게 루이나의 첫 민주정권은 레이먼드의 암살과 파브르의 쿠데타로 단명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의 하룻밤 몰락”이라 부른다. 루이나는 독립의 꿈을 이룬 지 불과 몇 년 만에 또다시 군부의 장악 아래 놓였고, 이후 12년간 군사독재 체제를 겪게 되었다.
196=== 군사독재 시기 (1949~1960) ===
1971948년 12·23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비달 파브르는 이듬해 초 임시 군사위원회를 해산하고, 사실상 1인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는 조지 레이먼드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며 “혼란을 틈탄 음모의 희생자”라는 서사를 앞세웠지만, 동시에 레이먼드가 추진했던 의회민주주의의 거의 모든 장치를 정지시켰다. 헌법 효력은 ‘국가비상령 제1호’로 동결되었고, 정당 활동과 전국 규모의 결사체 조직은 금지되었다. 파브르는 계엄을 상시화한 뒤 벨포르, 세인트 바룬, 롱비치, 크레테 등 주요 도시에 군사총독을 파견해 행정과 치안을 통합 지휘하게 했다. 정보기관은 ‘국가보안총국’으로 개편되어 내무·치안·정보·검열을 한데 묶은 거대한 감시기구로 비대해졌고, “비상사태 하의 행정 편의”라는 명목 아래 영장 없는 체포와 장기 구금이 일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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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정치의 목표는 ‘질서 회복’과 ‘국가 재건’으로 요약됐으나, 실제로는 권력의 제도적 독점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다. 파브르는 레이먼드 암살의 직접 범인으로 지목된 정보부장을 군사법정에 세워 공개 재판과 사형집행을 전격 단행했다. 대중은 박수를 보냈으나, 곧이어 이어진 것은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학생 단체, 지방신문사에 대한 일괄 검거였다. ‘국가비상령 제3호’는 “적대적 선동과 가짜뉴스 유포”를 중죄로 규정했고, 이 조항은 정권 비판을 사실상 봉쇄하는 칼날이 되었다. 파브르는 라디오 담화를 통해 “의회정치는 아직 루이나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반복했고, 교과과정에는 ‘12·23 정신’이 포함되었다. 초등 교실 벽에는 군 정권의 강군·근면·복종 3대 표어가 걸렸고, 청년층은 ‘국민청년단’이라는 준군사조직으로 흡수되어 행진과 군사훈련, 충성 선서를 생활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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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경제 영역에서는 놀랄 만큼 기민한 국가동원 체제가 작동했다. 파브르는 ‘3개년 산업구조 전환계획’(1949~1951)과 ‘제1차 국가개발 5개년계획’(1952~1956), ‘제2차 국가개발 5개년계획’(1957~1961)을 잇달아 공표하며 중화학 공업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밀어붙였다. 벨포르에는 통합 제강소와 압연 라인이, 세인트 바룬 해안에는 대형 도크와 조선소가, 롱비치와 크레테에는 석유정제·석유화학 콤비나트가 들어섰다. ‘라운 고원 상류 댐’과 ‘라운 동서 간선철도’는 전력과 물류의 병목을 푸는 상징 사업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산업은행’과 ‘전시세제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략산업에 대한 초저리 융자, 수입설비 관세 면제, 법인세 감면이 실시되었고, 외화와 설비, 공정 기술은 미합중제국과 빌베른의 신용공여·기술협력으로 조달되었다. 임금은 ‘임금안정령’으로 억제되었고, 파업은 ‘국가기반시설 마비행위’로 규정되어 군에 의해 즉시 해산되었다. 합법 노조는 ‘공인노동연맹’으로 단일화되어 정부 산하 노사정위원회에서 임금·복지·노동시간을 ‘합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적 교섭력은 미약했다. 도시에는 ‘산업주택단지’가 대량 건설되어 저렴한 숙소와 배급소·탁아시설을 제공했으나,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벨포르 변두리와 라운 하구 일대에 비인가 판자촌이 확산했다. 농촌은 상대적 소외가 누적되었다. 대지주제 폐단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임대차 상한과 기계화 보조금이 도입됐지만, 청년 노동력이 공장으로 빠져나가면서 농가 소득은 정체했고, 농기계·비료 구입을 위한 고리의 사금융 의존이 만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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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문화·일상의 질감은 이중적이었다. 한쪽에서는 ‘산업국가 루이나’라는 미감이 만들어졌다. 뉴스릴과 선전 포스터에는 새로 솟은 제강소 용광로와 항만의 크레인이 웅장하게 그려졌고, 학교 소년들은 조선소 견학을 다녀와 ‘강철의 시’를 암송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문학·연극·음악에 대한 사전심의가 의무되어 현실비판적 작품은 창작 단계에서 차단되었다. 레이먼드에 대한 기억은 ‘건국의 공’으로서 일부만 남고, ‘통치의 실패’ 서사로 대체되었다. 파브르는 레이먼드의 초상을 국정 교과서에서 지우지는 않았지만, 그 옆에 군인정부의 ‘국가재건’ 장면을 더 크게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명절과 기념일의 배열도 바뀌어 독립선언일보다 ‘질서회복의 날’(12월 23일)이 더 큰 규모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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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그럼에도 균열은 말기에 뚜렷해졌다. 1957년 이후 세계 경기 변동과 원자재 가격 급등, 거듭된 설비투자로 인한 과잉부채가 겹치면서 ‘제2차 국가개발 5개년계획’의 수치 목표는 잇달아 수정·하향되었다. 물가가 들썩이자 정부는 ‘물가안정 특별조치’로 생필품 가격을 묶었고, 통제와 배급이 강화되었다. 벨포르 변두리의 판자촌과 세인트 바룬의 하역 노동자 지대에서는 비인가 야학과 ‘상호부조회’ 같은 자생 조직이 싹텄다. 1958년 봄, 롱비치 석유화학 단지에서 연쇄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과 군경의 초동 대응 실패가 밝혀지며 ‘능률과 질서’라는 정권의 자부가 금이 갔다. 같은 해 가을, 벨포르 공과대 학도들은 ‘기술자에게는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다’는 성명을 내고 안전관리·산업보건 기준 공개를 요구했으며, 이는 곧 진압되었지만 대학가의 침잠한 불만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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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권력 내부도 편치 않았다. 국가보안총국과 군 정보참모부는 예산·영향력 경쟁을 벌였고, 파브르의 측근 장성들 사이에서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파브르는 병약설을 부인하며 지방 시찰과 군 열병식을 강행했지만, 1959년 이후 공개석상에 서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정권은 ‘전국 애국현장 순례’ 같은 상징 행사로 기세를 유지하려 했으나, 생활물가와 거·의료·교육 불만을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독립전쟁 세대 일부 원로들은 “국가가 강해지는 것과 국민이 침묵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말을 낮게 흘렸고, 이는 곧 비밀경찰의 보고서에 ‘잠재적 선’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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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이렇듯 1949년부터 1960년까지의 군사독재는 철권과 원의 시기였다. 철저한 검열과 감시, 정치범 수용, 군의 행정 장악이라는 그늘 위에, 제강·조선·석유화학·전력·교통으로 상징되는 산업 인프라가 솟아올랐다. 파브르는 레이먼드가 상징하던 ‘자유의 공화국’을 ‘질서의 공화국’으로 바꿔 놓았고, 그 과정에서 루이나는 외형적 국가역량을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사회의 심부에는 억눌린 불만과 피로가 층층이 쌓였다.
179210=== 민주화 운동 ===
180211[include(틀:루이나의 민주화운동)]
181212====군사정권 부역자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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