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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56 | 그러나 당시 반란군 측은 절차를 거쳐 관할관의 영장을 발부받기는커녕 검찰관의 긴급구속 지휘를 받지도 못한 상태였고, 계엄사령관은 자신들의 상관이므로 군 지휘 체계에 따른 명령에 의해 출석을 강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반란군은 무장한 헌병대 병력으로 공관촌을 점거하고 보안사령부 대령을 위시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진입해 에드워드 스펜서에 대한 강제 연행을 시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의 상관인 대통령의 사후재가를 동시에 받아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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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57 | === 작전 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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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 1949년 12월 12일 저녁, '''비달 파브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의 주요 장교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벨포르 남부요새 근처의 수도경비사령부 제 30경비단에 집결하였다. 당시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벨포르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경사 소속이기는 했지만 수경사령관도 무장 출입은 불가할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래 모이기에는 딱 좋았다. 이날의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 이들의 본래 계획은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과 육군 수경사의 헌병들을 동원하여 참모총장 공관에서 '''에드워드 스펜서'''를 납치해서 합수부로 데리고 가는 동시에, '''비달 파브르'''는 대통령에게 가서 '''스펜서'''의 추가 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합수부로의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 체포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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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한편, 긴박했던 스펜서 연행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2월 12일 밤, 파이크 대령이 지휘하는 합수부 수사관들은 군보안사 소속 차량 2대에 분승하여 벨포르 외곽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33헌병대 병력은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해 뒤따랐다. 합수부 수사관들은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며 미리 연락해 방문 약속을 잡아둔 상태였고, 이로 인해 공관 정문을 무리 없이 통과하여 관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곧이어 33헌병대 차량도 정문에 도착했는데, 헌병들이 경비를 서던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교대 명령을 받았다”고 속이며 접근했다. 해병대 경비병들이 상부에 확인하려 하자 헌병들은 기습적으로 그들을 무장 해제 및 포박하여 초소 내부에 감금시켰고, 정문을 완전히 장악한 후 주변에 경계선을 형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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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한편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함께 참모총장 공관 안으로 들어간 헨리 파이크 대령과 노먼 하트 참모장은,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에게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군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펜서 총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파이크 대령은 “임의 동행을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지로 데려가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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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스펜서는 이를 믿지 않고 “대통령 재가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며 전속부관인 아이작 모건 소령(육사 11기)에게 대통령 권한대행 관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합수부 장교 한 명이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해 모건 소령이 총상을 입었다. 이어 참모총장 경호장교였던 앤드류 클라크 대위(육사 14기)가 권총을 꺼내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겨누자, 즉각 총격이 오가며 클라크 대위 역시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지휘하던 로버트 해밀턴 대령도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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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이 같은 충돌 끝에 스펜서 총장은 강제로 끌려나와 승용차에 태워졌다. 합수부 차량 두 대는 곧바로 공관을 떠나 벨포르 남쪽에 위치한 군보안사 분실로 향했다. 그러나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해밀턴 대령은 중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나갔고, 합수부 장교들은 총격과 피신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결과, 관저 밖에 배치되어 있던 33헌병대 병력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채 자신들만 떠나버렸다. 지시를 받지 못한 헌병들은 한동안 당황해하다가 결국 자체 판단으로 철수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이동을 시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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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이 와중에 공관 관리관인 벤자민 로드 준위가 몰래 공관을 빠져나와 인근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무장 괴한들이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급히 알렸다. 신고를 접수한 해병대 경비대는 즉시 출동해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이들은 공관 영내에 남아 있던 33헌병대 마이크로버스를 포위했으며, 막 출발하려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 이들을 버스 안에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펜서를 태운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뒤였다. 합수부 차량이 정문을 벗어난 지 약 10분 뒤 해병대 경비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정작 스펜서 본인은 이미 납치된 상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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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총성이 울리자 경찰과 벨포르 해군본부 기동타격대, 공군본부 긴급대응부대, 국방부와 수도경비사령부의 5분 대기조 병력이 차례로 출동하였다. 또한 합동수사본부 측은 33헌병대 병력이 뒤따라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30경비단 예비병력에게 “즉시 철수시켜라”는 명령을 내려 다시 공관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새벽까지 공관 정문 일대에는 서로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한 채 긴장 상태에 놓인 여러 부대가 뒤엉켜 대치하는 혼란이 벌어졌다. 총성이 난 급박한 상황에서 출동한 병력들은 이 사태가 반란인지, 혹은 외부 침투에 의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며, 상당수는 이 사태를 “북부 무장공비의 기습”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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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아침 5시 30분경 국방차관 피터 맥그로가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현장 병력은 모두 아군이며 상황은 정리되었다. 출동 병력은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대치는 해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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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한편, 혹시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군 수뇌부 인사들―특수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은 사건 당일 저녁, 미리 비밀 연회장으로 초청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군보안사 참모장 노먼 하트 준장이 대신 접대하며 이들의 움직임을 묶어 두었다. 또한 당시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 역시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지만 반란군은 그의 존재를 이용해 모건·맥켄지·하워드 장군의 동태를 감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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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1949년 12월 12일 저녁, 수도권 주요 지휘관들이 비밀리에 연회장에 모이게 된 배경은 단순한 회식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의 회고록 《12.13 반란과 나》에 따르면, 이미 12월 초부터 비달 파브르는 반란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며 주요 장교들을 회식 자리에 묶어 두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5일, 그는 자신의 측근을 통해 “연말 정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수표를 전달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노먼 하트 군보안사 참모장을 통해 12일 연회 약속을 잡았다. 이는 12월 5일 이전부터 이미 거사 날짜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우발적 반발’이 아니라 기획된 쿠데타였음을 방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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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연회 장소는 벨포르 시 외곽의 민간 주택으로, 군 내부에서는 ‘민 마담의 집’이라 불렸다. 이곳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닌, 노던 소사이어티가 은밀히 회합을 가지며 반란을 모의한 공간이었다. 훗날 이 주택은 루이나 정치사의 ‘요정 정치’의 상징으로 회자되었으나, 당시에는 사실상 쿠데타의 지휘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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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연회에는 수도경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특수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이 초청되어 있었다. 이들은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이들을 ‘연회’라는 명목으로 한자리에 묶어 두려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수도경비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도 참석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으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사실상 감시자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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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모건은 연회에 들어선 직속 부하 브라운 대령을 보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누가 허락했다고 여기에 와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브라운은 “비달 장군이 제 진급을 축하해 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답했으나, 모건은 혀를 차며 “그걸 받으러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 제치고 술을 사주겠다는 비달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꾸짖었다. 옆에 있던 맥켄지 소장이 분위기를 무마하며 “겸사겸사 축하해 주자”며 자리를 수습했으나, 연회의 불순한 성격은 명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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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 한편, 이 연회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었다. 비달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하여, 같은 시각 진행될 스펜서 총장 연행 작전(‘생일집 잔치’)에 대응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실제로 참석자들은 오후 7시까지 식사하며 비달을 기다렸지만, 정작 비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노먼 하트가 접대를 맡았다. 그러나 하트는 노던 소사이어티의 일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허점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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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저녁 무렵,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에게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스펜서가 납치되었다”는 보고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을 접한 모건, 맥켄지, 하워드 세 장군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복귀했다. 모건은 수도경비사령부로, 맥켄지는 특수전사령부로, 하워드는 육군본부로 각각 복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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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연회장에 함께 있던 에릭 브라운 헌병단장은 사령관을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로 복귀하던 도중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반란군 측은 “연회에서 술을 마신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도 못한 채 즉흥적으로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모건을 비롯한 일행은 비달 파브르를 기다리느라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이 “비달이 늦을 것 같으니 우리끼리 한 잔 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비로소 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 회고에 따르면 사태 발생까지의 간격은 불과 10여 분 내외였고, 이들은 술잔을 비우기도 전에 급보를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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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세 장군―모건, 맥켄지,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은 모두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비달이 후배라 하더라도, 그가 오지도 않은 자리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을 인물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는 처음에 스펜서 총장 납치 소식을 그의 부인의 전화로 접했는데, 납치 세력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북한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오인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합동수사본부, 즉 군보안사 소속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정황이 종합되면서 비달과 노던 소사이어티가 벌인 일임이 드러났다. 이에 육군본부는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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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모건은 사령부로 복귀하면서 참모장 윌리엄 로스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사이먼 콜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경장갑차 2대와 헌병특공대 1개 소대, 부상자 구조용 구급차 1대를 편성하여 기동타격대를 구성, 참모총장 공관으로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사령부로 복귀한 뒤 로스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노던 소사이어티 일당이 집결해 있다는 보고를 받자, 곧장 30경비단장 토머스 브래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든 것은 브래너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 인사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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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이들은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직접 보면 스펜서 총장 체포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모건은 격노하며 “이건 명백한 반란이다. 너희들에게 선전포고한다! 난 죽기로 결심했다!”라고 외친 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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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은 모건이 곧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긴급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비달 파브르는 자신이 장악한 대통령 경호실 소속 병력을 이용해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가 있던 총리공관을 확보했다. 원래 총리공관은 육군본부 헌병대가 경비를 맡고 있었으나, 비달은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공관을 장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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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리처드 에반스는 총리공관에 사실상 구금된 채 스펜서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강요받았으나, 그는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의 동의 없이는 결코 허가할 수 없다”고 끝내 버텼다. 반란군은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아 재가를 받아내려 혈안이 되었고, 육군본부는 이들이 장관을 찾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노던 소사이어티는 군보안사의 감청망과 광범위한 인맥을 통해 이미 정보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조직 역시 육군본부보다 훨씬 폭넓게 뻗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규 군 지휘부는 정보·통신망을 차단당한 채 우왕좌왕했고, 반대로 반란군은 정상적인 군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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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강직한 군인으로 평가받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며 합동수사본부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수도권 충정부대에 즉각 병력 출동을 지시하며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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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비달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다니엘 모건 사령관이 수도권 병력 동원을 시도하자 순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스펜서 총장의 연행을기정사실화하고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표면적으로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육군본부의 병력 출동을 지연시키는 신사협정을 가장했지만, 이면에서는 공수여단과 전방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핵심 지휘부를 제압하려는 작전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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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비달은 사전에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일제히 지시를 내려두었다. 그 결과 3공수여단장 브랜든 슈라이버 준장과 5공수여단장 제임스 고든 준장은 비상령 발령 직후 각각 자신의 부대로 복귀해 병력을 장악했으며, 1공수여단장 피터 할로웨이 준장은 한강의 주요 다리가 모건의 수도경비사 통제하에 막히자 부교를 우회하여 귀대하였다. 각 부대에 내려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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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 *제1공수여단 :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군 통수권을 장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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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제3공수여단 : 자기 여단 영내에 있는 특수전사령부 본부를 급습,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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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제5공수여단 : 도심지 요충지인 하이드파크 운동장으로 출동하여 대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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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 장교들 : 수도경비사 헌병단을 은밀히 장악하고, 모건 진영 지휘부에 속한 주요 인사들을 제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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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 이와 함께 비달은 공수부대 외에도 친위 세력의 병력을 대거 동원했다.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인사였던 리처드 노튼 소장이 지휘하는 제9보병사단 예하 29·30연대 각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전차 1개 대대가 출동 명령을 받았다. 이 가운데 제9사단은 루이나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평시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주둔지 이탈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비달은 이를 무단으로 출동시켜 벨포르 중심부로 진격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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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1949년 12월 12일 저녁, 비달 파브르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 주요 장교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벨포르 남부 요새 인근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 막사에 집결하였다. 당시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은 수도 방위의 핵심 전력으로, 수경사 소속이기는 했으나 사령관조차 무장 출입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립성이 강한 부대였기 때문에 은밀히 병력을 모으기에 적합했다. 이 날의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였다. 본래 계획은 군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수경사 헌병대를 동원하여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의 공관에서 그를 강제로 연행한 뒤 합동수사본부로 압송하고, 동시에 비달 파브르가 대통령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에게 직접 찾아가 ‘추가 혐의 수사’를 위한 체포 재가를 받아 이 작전을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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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합동수사본부의 실무를 총괄하던 군보안사 인사처장 헨리 파이크 대령은 수사관들과 33헌병대를 이끌고 스펜서 참모총장 공관으로 향했다. 명목상 이유는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 조사’였다. 그러나 공관에 진입한 반란군은 스펜서에게 “이미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며 거짓을 고했고, 스펜서 측 참모가 대통령 승인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려 하자 곧바로 총격을 가해 제압하였다. 이어서 외부에서 대기 중이던 30경비단 병력이 공관 창문을 깨고 돌입하여 무장 점거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이자 자신들의 상관인 스펜서 장군의 뺨에 총구를 들이대며 강제로 승용차에 태워 합동수사본부로 납치하는 초법적 만행을 저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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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이 작전의 핵심은 스펜서 연행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의 재가를 얻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원래 계획과 달리 흘러갔다. 에반스는 비달의 진술만으로는 결코 스펜서 체포를 승인할 수 없으며,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와 협의를 거친 후에야 검토할 수 있다고 버텼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합법적 명분 확보에 실패했으며, 이미 무력을 동원하여 스펜서를 연행한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치적 재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사실상 ‘완전한 군사반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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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마이클 러틀리지 국방장관은 당시 스펜서 공관 인근에 있었으나 총성이 울리자 가족을 데리고 인근 대학 캠퍼스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군부의 이상 상황을 직감하고 예하 부대에 자의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명령하는 한편, 합동방위 체제 하에 있던 연합사 지휘부에도 야전부대 이동 권한을 요청하여 쿠데타 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연합사령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이 국방부 청사까지 장악하면서 러틀리지는 체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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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121 | === 작전 성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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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123 | == 반란의 성공 원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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