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54 | 54 | 하지만 그 결과로 빌베른 황제직은 잠시 공석이였으며 경제력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루이나 - 플로렌시아등 농업생산력이 높고 민족 정체성이 강한 지역들을 대부분 잃게되었다. |
|---|
| 55 | 55 |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복구과정에서 평민회 권한이 대폭 강화되고 자유민의 가치가 상승하였다. 노예경제는 곡물 농업부문등서는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였으나, 공급의 한계와 데쾨우리(귀족) 계급의 자본 축소로 인하여 자유민과의 계약관계로 재편된다. 또한 동로마의 황제가 5년동안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을 못받는 상태였던 계기가 된다. |
|---|
| 56 | 56 | |
|---|
| 57 | |
|---|
| 57 | 58 | == 근세 == |
|---|
| 58 | 59 | |
|---|
| 59 | | “Sjstemme’a eqonomj’i loqalle’es qe laborre'a serwve'i sustajnx'att, ipsju limitte'emn prisenxtx’att ad’tempx’ qe administrat |
|---|
| 60 | “ |
|---|
| 60 | 61 | |
|---|
| 61 | | 15세기 중반, 동로마는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폴이 함락되며 멸망한다. |
|---|
|
| 62 | 15세기 초, 당시 빌베른은 루이나지역과 플로렌시아 지역의 통제 실패로 대토지에서 곡물 농경지를 운영하던 데쾨우리(토지귀족)계급이 ㅈ박았으며 항구 도시인 메비테리가 르네상스의 서유럽과 교역으로 인해 새 중심지로 떠올랐다. 원로원의 구성층이 반갈당했으니 상인 계급이 속한 평민회 권한이 강해지는건 당연한 수순이였고, 기존 황제의 지지 계층이였으며 자영농의 힘을 대표하던 평민회의 성격또한 자익을 중시하게 변화한다. |
|---|
| 63 | [*근세1. 여담으로, 기존 데쾨우리 계층이 서유럽의 르네상스 흐름에 영향받아 고전기 학문을 재연구하며 일종의 복고주의 논쟁이 생긴다. 해당 논쟁은 근세-근대 빌베른 인문학의 가장큰 동력이되었다.] |
|---|
| 62 | 64 | |
|---|
| 65 | 이때, 황제는 데쾨우리(토지귀족)계층과 합의하여 매관행위를 정부 허가하에 용인토록 하는 법령을 낸다. 해당 시점을 기준으로 빌베른의 정치구도는 황제, 원로원(데쾨우리등 구귀족)을 위시로 한 복고[*근세2. 황제(사예세르)직과 원로회 중심의 정치로의 복귀를 의미함.][*근세3. 르네상스때 시작해 19세기까지 계속되는 [[빌베른복고주의논쟁]]에서의 복고와 겹치지만 다른 개념임]파, 상인 연맹과 부상(負商)을 위시로 한 공화파, 일부 황제의 주 지지층이자 18세기에 민주파를 구성하게되는 자영농파로 재편된다. |
|---|
| 66 | |
|---|
| 67 | |
|---|
| 68 | 15세기 중반, 동로마는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소아시아반도를 잃고, 흑해로 가는 길을 잃어, 결국 콘스탄티노폴이 함락되며 멸망한다. 즉 키흑해->동로마->빌베른의 곡물 수입로,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지중해 무역이 둘다 폭4했단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곡물을 대량으로 공급할수 있었던 계층은 노예를 소유할수있는 복고파 토지귀족 뿐이였기에, 공화파의 사회적 입지가 크게 손상된다.[*근세4. 빌베른의 콘스탄티노폴(메비테리시)이 지금의 이름을 얻게된 계기이기도 하다.] |
|---|
| 69 | |
|---|
| 70 | 공화파를 이루는 부상 귀족층은 수입이 반타작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포르투갈등의 국가와 비슷하게 인도양과 대서양 무역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극동과 인도를 대상으로 한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된 만큼, 상인연맹과 회사 형성의 초기가 이 15세기 중반이라 할수있다. 의외로 서유럽, 플로렌시아/후제정사랜드/플로렌시아/청평/북산/동사랜드로의 중개무역이 고수입이였기에 공화파 부상 귀족은 반등에 성공할수 있었으며, 고대 노예경제에서 근세 상업경제로 이행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
|---|
| 71 | |
|---|
| 72 | |
|---|
| 73 |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빌베른의 상업경제는 점진적으로 크게 발전한다. 특히 인도와 동남아, 남아시아의 항구도시의 상관에 상인 보호를 명목으로 군함을 끌고가 식민지를 건설, 17세기 초의 남미 식민지의 개척[*근세5. 의외로 이때 공화파 부상귀족보다 복고파 테쾨우리 계층이 상품작물 플렌테이션에 적극적이였어서 입지가 올랐다, 임페라토르직(관군운용권 독점)을 겸하던 황제직에, 3?권분립 비스무리하게 정치가 안정되었다.], 에도막부의 데지마와 대청국 광동지역 일부항을 통하여 극동교역에 참가하는등 원거리 무역이 번성을 이루었다. |
|---|
| 74 | |
|---|
| 75 | 빌베른의 이 시기를 “1차 해상 호황”이라 부르며, 로마의 후경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해양제국이 됬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호황의 영향은 상업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구조와 정치철학/예술/식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
|---|
| 76 | |
|---|
| 77 | 상업과 경제 측면에서 빌베른은 무역회사와 플랜테이션 운영단체(노베-라티푼디아)가 그 중심으로써 재편된다. 인도/인지/극동의 향신료/도기/비단/은/구리등의 교역은 빌베른동인도회사등 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루이나 오리엔탈 컴퍼니]]와 경쟁하며 항구 도시를 점거하던 형태에서 실질적인 식민지를 통치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은 복고파 데쾨우리 계층의 라티푼디(라티푼디움)운영의 연장선상이였는데, 중세의 곡물위주의 농업에서 설탕/커피/담배/차/목재등 상품작물로 이전되었다. 군의 전권은 임페라토르직에 쏠려있었고, 사병은 빌베른사 전체에서 오랬동안 금지되어있었기에, 황제의 군사적 협력이 필요한 양 파는 세금을 지불하고 이가 시민 복지와 자영농 성장에 투자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
|---|
| 78 | 이에 조선, 금융, 무역, 제당, 제철등 근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산업이 크게 융성한다. |
|---|
| 79 | |
|---|
| 80 | 사회구조측면선 앞에 서술하였듯, 상업 경제의 활성화에 따른 상업 귀족층의 형성이 큰 영향을 끼친다. 데쾨우계층과 부상귀족계층 모두 여전히 중앙조세의 영향력 하에 있기에 소작농 및 도시소상공인 계층의 성장기반이 마련된다. 이는 본토서 개인을 중심으로 한 경제주체의 단위가 완성되게 하였고, 기존의 가부장적 가구당의 사회가 해체되는데 기여하였다. 18세기의 근대 합1리주의와 만민의 평등과 결합하여 여성인권 및 본토의 노예 감소 추세에 크게 기여한다[* 어쩌면 이 변화는 근대 빌베른에 만연해진 성적 문란과 반가부장적이고 향락적인 페티시즘 중심의 특징의 나비효과가 되었던건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18세기 초 빌베른 곳곳에서 번성하던 민간 소극장이다, 기존의 서민오락은 심히 공적인것으로써 콜로세움과 같이 스펙타클과 규모를 보여주는것이 특징이였으며 각종 공연 예술은 포룸 혹은 극장같은 공적이고 수익이 관여되지않은 곳 위주로 이루어졌다. 민간 소극장들은 그에 반해 종합적이고 비교적 소박한 극문학을 상영하였고, 건축적으로 이에 맞추어 개방성보단 몰입을 돕기 위한, 좁고 폐쇠적인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
|---|
| 81 | |
|---|
| 82 | 정치와 철학 측면선 기존의 황제-평의회-원로회의 구도가 유동적이고 개인을 중심으로 변화했다는것이다. 황제와 국가회의, 계급에 대한 인식또한 절대적인 군주와 신분보단, 공화정의 전통에 기반하여 정당히 이루어져야한단 기조를 가진 움직임에 의해 변화되었다[* 원래도 군주가 국가를 소유한다는 인식이 약했던 만큼, 빌베른이 로마제국의 후신이라기 보단, 동일한 국가란 주장이 다시 주목받고, 중세동안 축적된 고전기 로마에서의 변화를 번복하는 새로운 인문사조가 시작된다; [[신고전주의(빌베른)]]즘으다.] 이러한 변화는 루이나와 서유럽에서 발달하던 계몽주의, 사회계약론과 자연법의 적극적 수용, 18세기의 근대적 합리주의와의 결합으로 나타나게된다[* 19세기 말의 빌베른 공화국의 소란스럽지 않은 개건은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의 흐름이 큰 영향을 끼친것이라 할수있다.]. 3대 혁명[* 쌀나라 독립혁명, 불랑기 혁명, 명예 혁명즘으다.] |
|---|
| 83 | |
|---|
| 84 | 예술은 근대에 [[신고전주의(빌베른)]]으로 수렴하게되는 고전 로마기 겁축에 대한 재연구가 시작되어, 기존의 형식주의와 공공주택 숭상에서 벗어나, 주택과 상업건물등 민간적이고 소박한 곳에서도 고전기 로마건축을 접목하는 까티스타일(QEQONXDOMME’ QATTE’i)의 유행을 불러왔고, 민간 주도의 소극장과 극문학, 음악및 미술인이 개인으로써 성공할수 있게되어 어쩌면 고전 그리스기의 독립된 예술적 대상으로써의 미술과 음악의 부활을 불러왔다. (일본이랑 극동무역하다 생긴 문화에 관련된 내용을 써야하는데 까먹음) |
|---|
| 85 | |
|---|
| 86 | 16세기 아메리카 발견을 거친 서구세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분야는 요리일것이며 이는 빌베른도 차이가 없다. 근세에 이뤄진 빌베른 식문화의 변화는 2개의 요인이 있다, 신대륙의 작물과 쌀, 플랜테이션과 서민음식. 감자와 토마토가 지중해의 식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인구까지 늘려준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빌베른은 사무탁 지협등 한정적인 곳에서 비상식량 내지, 노예식으로 쓰던 쌀을 대량으로 기르게 된것은 근세 이후의 일이다. 쌀은 도정하지 않았을 때엔 1~2년정도의 꽤나 엄청난 보관기관을 가지는데, 특히 인도 항로와 남미 항로가 개발된 이 시대의 빌베른은 쌀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노예식으로 사용한다[* 이것때문에 빌베른에서 현재까지도 유명한 식품회사들은 대부분 쌀 도정에서 시작하였즘으다. 장기적으로 빌베른 사회가 서양에 비해 엄청난 강점을 가진 계지, 하지만 이것때문에 기계 부분의 산업화는 좀 뒤쳐진다.]. 이것이 어느정도냐면 근세 당시의 빌베른보다 현대의 빌베른이 인구가 더 적은 정도이다. 신작물중 토마토는 값싼 소스와 감칠맛을 의미했다. 가룸, 하드치즈와 같은 고대와 중세의 ㅈ창나게 많은 소금과 발효, 테크닉, 시간, 노동력이 있어야만 얻을수 있던 감칠맛이 드디어 가열된 신선한 토마토 정도로 쉽고 싸진것이다. 현재 빌베른 요리의 핵심인 계절감이 강조되는 야채와 상시 구비된 감칠맛 및 지방맛 보조재가 이때 완성된다. 비록 노예식이긴 하지만 당대 빌베른의 대표적인 상은 일종의 케챱을 넣고 볶은 죽인 알리체 토마티(ALICCE’ TOMATTE’i)와 소금, 생양파가 들어있을것이고, 아마 당시 식문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들어날것이다. |
|---|
| 87 | |
|---|
| 88 | |
|---|
| 89 | 18세기동안 빌베른의 해상무역은 영국, 루이나와같은 국가와 경쟁하며 하락세를 보이게된다. 물론 제국의 몰락 자체는 압도적인 인구부양력으로 매우 늦춰졌고 여전히 많은 유럽국가보단 좋은 효율을 보여주었다. 문화와 기술은 중간에 계속 혁신과 발전이 있긴했지만 17세기의 압도적인 신흥강국으로써의 면모는 보여주지 못하였다. |
|---|
| 90 | |
|---|
| 91 | |
|---|
| 9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