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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39 | 번즈는 루이나 전역 모든 노동조합원의 총파업을 원했지만, [[루이나 노동총동맹]](RLF) 의장을 비롯한 기성 노동조합들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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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41 | 루이나 경찰 고위 관계자는 정부에 "정규 병력보다 약한 전력으로는 우편 열차의 통행을 확보하거나 법원의 명령을 집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곧이어 군경 병력이 파견되어 빈덴브루크에 도착했다. 번즈는 처음에는 군경이 평화를 유지하며 파업과 보이콧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 믿고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군경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열차 운행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보이콧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군경은 RRWF가 도시별로 루이나 전역의 교통망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를 하나하나 저지했다. 수천 명의 경찰 병력과 육군 병력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조지 에스턴]] 총리가 지방 당국의 허가 없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군병력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턴 총리는 우편물 운송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실상 열차 운행 재개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그의 경제 노선에 부합하고 자본을 보호하는 데 훨씬 더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이는 우편물 배송 차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 측 법률 고문들은 보이콧이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고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군경의 투입과 그에 따른 유혈 사태는 오히려 더 큰 폭력 사태를 불러왔다. 파업 과정에서 다수의 참가자가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재산 피해는 수천만 [[루이나 달러]]를 초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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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 지역별 대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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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파업은 루이나 전역 수백 개의 도시와 마을에 영향을 미쳤다.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기관사·화부·차장 등 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성 [[루이나 기관사 형제단|형제단]] 조합들은 이번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RRWF 조합원들은 파업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들은 대체로 비숙련 지상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일반 시민과 상공인들은 대체로 철도회사의 편을 들었고, 농민들은 RRWF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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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주요 철도 거점 도시인 [[포트메이슨]]에서는 지역 정교회 신부 [[A. W. 캐버나]]가 RRWF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설교에서 이번 보이콧을 과거 루이나의 독립 쟁취 과정에 빗대며, 지방 관리들과 [[조지 에스턴]] 총리가 "건국 선조들의 정신을 저버렸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침략적이고 억압적인 기업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지키는" 대신, 지도자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금권 귀족의 순종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포트메이슨은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며칠 뒤 인근의 소규모 철도 거점 마을 [[록크로프트]]에 군병력이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격분한 파업 참가자들이 군용 열차를 에워싸는 사태가 벌어졌다. 간신히 유혈 충돌을 모면한 군병력은 해당 노선을 강제로 개통했다. 파업이 끝난 후 철도회사들은 파업에 가담했던 직원들을 전원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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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하버스턴]]에서는 보이콧이 노동운동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대도시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파업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파업 참가자들이 임금 삭감에 대한 오랜 불만을 토로하며 철도회사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파업 참가자들은 폭력과 태업도 서슴지 않았고, 철도회사들은 이를 내전이나 다름없다고 규정한 반면, RRWF는 비숙련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맞받아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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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 체포와 재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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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몽고메리 K. 번즈]]는 우편물 운송 방해 공모 및 법원이 철도 운행 방해 중단과 보이콧 해산을 명령한 금지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번즈는 저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L. 크로스와 헨리 트럼블의 변호를 받았다. 공모 재판에서 크로스는 번즈와 RRWF가 아니라 철도회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반대파를 상대로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번즈가 무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검찰은 배심원 중 한 명이 병에 걸리자 공모 혐의를 취하했다. 크로스는 법원 금지명령 위반 혐의로도 번즈를 변호했지만, 번즈는 결국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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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파업 과정에서 노조원들이 폭파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교를 건너다 열차 사고로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훗날 [[빈덴브루크]] 외곽에 기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파업 참가자들에 의해 살해당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졌있었며, 이 오벨리스크는2021년 철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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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 여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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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조지 에스턴]] 총리는 파업이 점점 더 심각한 물리적·경제적 피해를 야기하는 상황에서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홀런드의 친노동적 사고방식과 사회 개혁주의적 성향은 외부인들에게 일종의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여겨졌다. 홀런드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늘 노동자 편에 선다는 점을 우려했으며, 사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업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론은 대체로 파업에 반대했고 에스턴의 조치를 지지했다.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동부 지역 의원들은 에스턴을 지지한 반면, 서부 지역 의원들과 진보파는 대체로 그를 비난했다. [[빈덴브루크]] 시장 홀런드는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했고, 파업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전까지 경찰의 개입을 막았다. 홀런드 시장은 에스턴을 비난하며 정부의 개입 없이도 시 차원에서 모든 소요 사태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에스턴의 편을 들며 파업 참가자들을 악당으로 몰아세웠고, 홀런드 시장만이 파업 참가자들의 편에 섰다. 주요 신문들은 파업의 책임을 홀런드에게 크게 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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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언론 보도는 광범위했으나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각종 보도와 사설은 파업 참가자들을 군경이 표방하는 애국심에 반하는 외국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장과 철도에서 일하는 이민 노동자들이 파업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폭도, 이방인, 무정부 상태, 법질서 위반 등을 경고하며 여론을 자극했다. 에스턴 총리와 언론은 파업이 무정부 상태와 사회 불안을 조장할 것을 우려했다. 에스턴은 RRWF가 정부 권위에 대한 봉기를 부추기고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맹비난했다. 파업에 참여한 이민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부추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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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한편 종교계에서도 파업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일었다. [[빈덴브루크]] 일대의 일부 기성 교회 지도자들은 보이콧을 비난하며 [[찰스 R. 하트웰]]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반발한 교인들이 교회를 대거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빈덴브루크 정교회의 신부는 RRWF와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덜 알려진 여러 신부들도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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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 여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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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 노동운동의 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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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파업 이후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은 해산되었고, 정부는 HRC에 기업도시 내 주거용 자산을 매각하도록 명령했다. RRWF가 붕괴된 후 많은 HRC 노동자들은 [[루이나 노동총동맹]](RLF)에 가입했다. [[찰스 R. 하트웰]] 사망 이후 HRC의 경영권은 새로운 경영진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회사는 노동자들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 우수한 주거·여가 시설을 제공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기업도시를 산업 용도로 전환하여 녹지 대신 창고와 수리 시설을 들어섰다. HRC가 루이나 철도차량 산업을 독점하며 계속 성장하는 동안, 하트웰 기업도시는 주택 노후화와 비좁은 생활 공간으로 점차 쇠락해갔다. 이 회사는 수십 년 뒤 문을 닫기 전까지 지역 최대 고용주 자리를 유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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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 번즈의 전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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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감옥에서 풀려난 후 [[몽고메리 K. 번즈]]는 사회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로 변모했다. 그는 석방 이듬해 [[루이나 사회민주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이후 사회당 후보로 총선에 수차례 출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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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 정치적 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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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파업 주도자들, 특히 번즈에 대해 민사 및 형사 소송이 잇따라 제기되었고, [[루이나 대법원]]은 번즈의 행동을 부정하는 만장일치 판결을 내렸다. [[빈덴브루크]] 시장 [[토머스 홀런드]]는 정부가 고용주의 편에 섰다며 에스턴을 강하게 비난했고, 군 병력 대신 시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묵살된 것에 분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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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조지 에스턴]] 내각은 파업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국가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찰스 R. 하트웰]]의 온정주의적 경영 방식이 파업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며, 기업도시 운영 방식을 "반시민적"이라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하트웰이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안긴 것을 강하게 질타했다. "미적으로 잘 꾸며진 시설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낼지 모르지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후 루이나 정부는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HRC의 정관이 기업도시 운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HRC에 하트웰 기업도시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기업도시는 이후 빈덴브루크 시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상당 부분이 역사 지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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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 노동자의 날 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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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파업 이후 [[조지 에스턴]] 총리와 의회는 노동계를 달래기 위한 제스처로, 급진적인 [[5월 1일 노동절|메이데이]]와 별개로 [[루이나 노동자의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관련 법안은 파업이 공식 종료된 지 6일 만에 의회를 통과했다. 파업 종식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동조했던 [[루이나 노동총동맹]] 의장은 이 공휴일 지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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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72 |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민주화운동]][[분류:루이나의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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