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1 | [[분류:랜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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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2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536349><tablebgcolor=#fff,#1f2023><bgcolor=#536349> {{{#fff {{{+1 '''마테르 전쟁'''}}}[br]Matir Krieg[br]Matir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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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2> 1983년 7월 18일 ~ 1984년 2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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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2> 1983년 2월 22일 ~ 1984년 7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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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7 | ||<-2> 북랜드 지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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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 247 | === 딮스마르크 추격전: 봉쇄가 뚫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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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8 | 248 | 자세한건 [[딮스마르크 추격전]]문서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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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 ==== 대공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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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 |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전선을 일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참호전과 장마로 한동안 고착되어 있던 전황은, 7월 장마 종료와 동시에 점진적 전환을 예고했으며, 루이나를 비롯한 제3국의 물자·정보 지원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흐름은 서서히 ‘되돌려지기’ 시작했다. 이 대공세는 마베라 왕국 수뇌부가 전격적으로 승인한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일환으로 시행된 일련의 반격 작전 묶음으로,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 중부 솔로몬 돌출부, 남부 A-M 라인을 축으로 하는 3방향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작전을 통해 고착화된 전선을 타개하고, 웨스타시아군의 후방 보급망과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다시금 전술 주도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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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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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 | ===== 노르트란트 회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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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4 |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며 침체되어 있던 전쟁 양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가장 주목한 지역은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이었다. 이 지역은 카르비크 고원과 로흐스 평야 사이를 잇는 좁고 긴 병목지대였으며, 웨스타시아군이 마베라 북부를 점령한 이래 줄곧 군수 보급의 핵심 동맥으로 기능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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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 |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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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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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 |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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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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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 |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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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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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 |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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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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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4 | 8월 초,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의 보급지휘본부는 "회랑 남단에서 중부까지 하루 평균 보급률이 38%로 하락했다"는 내부 평가를 내놓았고, 이는 사실상 보급선의 기능 단절을 의미하는 수치였다. 포탄은 할당량의 절반도 채 도착하지 않았으며, 전차 연료는 기지 재고로만 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가열되지 않은 통조림과 부족한 응급약으로 생존을 버텨야 했고, 환자 이송도 중단되면서 회랑 남단은 전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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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6 | 결정타는 케르덴 수로 통제소의 폭파였다. 이 수로는 회랑을 통과해 마베라 북부까지 식수와 정수 처리를 공급하던 시설로, 루이나 특수공작대가 매설한 수중 폭발물이 8월 11일 새벽 정각에 기폭되었다. 수로의 붕괴로 인해 수천 명의 병력이 식수 확보에 실패했고, 이에 따른 장티푸스 및 설사병 유행으로 비전투 손실이 실제 전투 사망자 수를 추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르트란트 회랑은 전투 이전에 병참이 먼저 붕괴한 전장으로 기억된다. 포성이 멎기 전, 이미 연료와 식수, 식량과 탄약이 끊긴 웨스타시아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 반격은 그 뒤에 이어졌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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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 | ===== 강타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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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9 | 솔로몬 돌출부는 마베라 중부 전선에서 유일하게 웨스타시아군이 동쪽으로 깊숙이 박힌 형태의 교두보를 형성한 지역이었다. 산지와 고원 사이로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펼쳐진 이 지형은 전선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리는 돌출된 압력점으로, 웨스타시아군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마베라 심장부를 위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베라 측에게 이 돌출부는 전략적으로 도려내야 할 종기와도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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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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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1 | 이에 따라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중심축으로 돌출부 제거를 위한 전면적 반격 작전, 즉 ‘강타 작전(Operation smash)’'''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명목상 48시간 동안의 강력한 포격과 기갑 돌격으로 솔로몬 돌출부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남북에서 포위망을 닫아 적 3개 사단을 고립·섬멸하는 작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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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 |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피비린내나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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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5 | 전투는 1983년 9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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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7 |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9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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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9 |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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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1 | 결정적 전환점은 9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9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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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 | ===== 아크로마-미스라타(A-M 라인) 돌파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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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 | 강타 전투 이후 중부 전선이 전술적으로 교착되자, 마베라–체르드 연합지휘부는 남부 아크로마–미스라타 일대의 전선 돌파를 전격 결정한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지형이 평탄하고, 고원과 평야가 만나는 완충지대에 해당해 전차기동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선은 오랫동안 방어 중심의 고착 상태였고, 이미 마베라군과 웨스타시아군 모두에게 지뢰대, 참호망, 고착화된 중화기 진지가 빽빽이 늘어선 "움직이지 않는 전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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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6 |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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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 |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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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0 | 작전은 1983년 10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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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 | 10월 4일, 미스라타 서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미스타라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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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 |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남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0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미스라타 북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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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6 | A-M 라인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남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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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 |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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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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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 |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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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 |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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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4 |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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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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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9 | 306 | ==== 벵가지 상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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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 307 | 자세한건 [[벵가지 상륙전]]문서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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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 | | ==== 대공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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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 |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전선을 일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참호전과 장마로 한동안 고착되어 있던 전황은, 7월 장마 종료와 동시에 점진적 전환을 예고했으며, 루이나를 비롯한 제3국의 물자·정보 지원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흐름은 서서히 ‘되돌려지기’ 시작했다. 이 대공세는 마베라 왕국 수뇌부가 전격적으로 승인한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일환으로 시행된 일련의 반격 작전 묶음으로,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 중부 솔로몬 돌출부, 남부 아크로마–베이다 전선을 축으로 하는 3방향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작전을 통해 고착화된 전선을 타개하고, 웨스타시아군의 후방 보급망과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다시금 전술 주도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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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 | | ===== 노르트란트 회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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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4 | |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며 침체되어 있던 전쟁 양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가장 주목한 지역은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이었다. 이 지역은 카르비크 고원과 로흐스 평야 사이를 잇는 좁고 긴 병목지대였으며, 웨스타시아군이 마베라 북부를 점령한 이래 줄곧 군수 보급의 핵심 동맥으로 기능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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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 | |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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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 | |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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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 | 310 |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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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 | 312 |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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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 | 318 | 솔로몬 돌출부는 마베라 중부 전선에서 유일하게 웨스타시아군이 동쪽으로 깊숙이 박힌 형태의 교두보를 형성한 지역이었다. 산지와 고원 사이로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펼쳐진 이 지형은 전선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리는 돌출된 압력점으로, 웨스타시아군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마베라 심장부를 위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베라 측에게 이 돌출부는 전략적으로 도려내야 할 종기와도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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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4 | 324 | 전투는 1983년 11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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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6 | 326 |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11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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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8 | 328 |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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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0 | 330 | 결정적 전환점은 11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11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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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1 | 331 | ===== 아크로마-베이다 돌파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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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2 | 332 | 강타 전투 이후 중부 전선이 전술적으로 교착되자, 마베라–체르드 연합지휘부는 남부 아크로마–베이다 일대의 전선 돌파를 전격 결정한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지형이 평탄하고, 고원과 평야가 만나는 완충지대에 해당해 전차기동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선은 오랫동안 방어 중심의 고착 상태였고, 이미 마베라군과 웨스타시아군 모두에게 지뢰대, 참호망, 고착화된 중화기 진지가 빽빽이 늘어선 "움직이지 않는 전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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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 | 334 |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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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6 | 336 |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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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 | 338 | 작전은 1983년 12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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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0 | 340 | 12월 4일, 베이다 서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베이다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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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 | 342 |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남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2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베이다 북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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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 | 3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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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 | 344 | 아크로마–베이다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남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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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6 | 346 |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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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 | 348 |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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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 | 350 |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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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 | 352 |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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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 | 309 | ==== 번외: 라이넬 항 탈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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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4 | 310 | 자세한건 [[라이넬 항 탈출]]문서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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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 | 312 | === 발악: 은색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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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 | 198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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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 혹한기의 추위와 폭설로 다시 공세는 둔화됐지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가다메스를 가로막아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이드리스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마베라 중부를 성공적으로 재패한 마베라 7,8군과 체르드 6군은 10월 29일 바르디야를 집중 공략해 한랜드군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몇달 전의 상황과 반대로 마베라군의 아게다비아 강북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구축됨으로써, 보급선이 전멸한 최전방의 한랜드군들은 A-M라인이 돌파된 이후부터 다음 해까지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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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7 | 83년 11월 11일. 트리넬이 함락되었다. 15척의 수송선이 함락되어가는 트리넬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알파 집단군도 마베라땅을 떠났다. 왕궁에 꽂혀있던 백십자기는 다시 끌여내려져 불태워졌고, 국왕은 이날 열린 수도탈환 기념연설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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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9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베이다의 맘무트 요새에 갇혀있던 한랜드 4군이 항복했다. 웨스타시아 공세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한랜드군 공세의 상징이었던 그곳이 함락되면서, 이제 한랜드군에는 가망이 없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웨스타시아군 초반 우세의 핵심이었던 369고지에도 왕관박힌 깃발이 올라가면서 에스타뉴 서부 & 동부 회랑이 모조리 함락. 전쟁 전 국경선이 거진 1년만에 복원되었다. 이제 마베라군의 숙제는 영토 탈환이 아닌, 영토 확장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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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 |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웨스타시아군 총사령부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지만, 이제 그들은 단순 따흐앙만 하고있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들은 이 모오든 상황을 뒤집을 카드를 내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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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6 | 325 | ==== 칼펜슈타인 공중전, 루프트바페의 괴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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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7 | 326 | ==== 토브룩의 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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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 | 327 | === 로벤자운 작전 유출과 일시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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