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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6 | 306 | 1958년 특무처는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를 결성하고 자금·훈련·표적을 제공했다. 방패는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여섯 건의 위장 테러를 집행했으며, 모두 극좌 조직의 범행으로 위장되었다. 1966년 3월 벨포르 지하철 아르덴역 폭발로 19명이 사망한 사건이 그 정점이었다. 사건은 실재하던 소규모 극좌 조직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소행으로 처리되어 조직원 23명이 검거되고 1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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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 | 308 | 계획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1966년 조사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꼽은 응답은 78%였고, 1960년 반체제활동규제법 개정으로 좌파 단체의 등록·해산 요건이 강화되었으며, 1968년 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의석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러나 계획은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국가가 훈련시킨 무장 극우 조직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은 일로 처벌받은 좌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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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 | 309 | === 검은 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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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 | | ====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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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 | | '''검은 10년'''(Black Decade)은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루이나에서 정치적 폭력이 일상화된 시기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극좌 무장조직의 요인 납치와 암살, 극우 조직의 무차별 폭탄 테러, 조직범죄 집단의 항쟁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이 셋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뒤엉켰다. 명칭은 이 시기 사망자 대부분이 총탄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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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4 | | 이 시기를 다른 나라의 정치 폭력기와 구별짓는 특징은 폭력의 상당 부분이 국가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는 점이다. 제방 계획으로 양성된 극우 조직은 통제를 벗어난 뒤 국가와 교전했고, 그 계획에 의해 누명을 쓴 극좌 조직은 실제로 무장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이 시기를 두고 "국가가 만든 허구가 실체가 되어 국가를 공격한 10년"이라고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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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6 | 314 | ====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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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7 | 315 | 검은 10년의 직접적 기점은 1970년 2월 국가안보회의가 [[공화국의 방패]] 지도부를 표적으로 지정한 결정이다. 방패는 1965년 이후 특무처의 자금에서 독립하고 독자 표적을 갖기 시작했으며, 1969년에는 방패와 정부의 관계를 폭로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특무처는 같은 해 8월 롱비치에서 방패 지도부 9명을 사살했으나 조직은 해체되지 않았다. 14개 지부와 3,200명의 무장 행동대가 남아 있었고, 이들은 특무처가 직접 훈련시킨 인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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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9 | 317 | 여기에 세 가지 조건이 겹쳤다. 첫째는 총기 환경이다. 루이나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므로 무장 자체가 장벽이 되지 않았고, 반자동 소총을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방법은 방패 훈련 과정을 통해 이미 민간에 확산되어 있었다. 둘째는 청북전쟁이다. 3년간의 파병으로 실전 경험을 갖춘 제대군인이 대량 유입되었고, 전쟁의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를 양분했다. 셋째는 경제였다. 전비 부담과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이 겹치면서 1974년 이후 실업률이 상승했고, 산업 도시의 노사 갈등이 격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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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 | 319 | ==== 극좌 무장투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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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2 | 320 | 극좌 무장조직의 등장은 제방 계획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1967년 지하철 사건의 실행범으로 검거된 혁명적 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실은 조직의 잔존 세력에게 국가가 좌파를 상대로 사건을 조작한다는 확신을 심었다. 1971년 동맹의 잔존 조직원과 대학·공장의 신세대가 결합해 무장 조직으로 재편되었으며, 재편된 조직은 "우리는 하지 않은 일로 처벌받았다"는 문장을 창립 성명의 첫 줄에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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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 | 322 | 주요 조직은 셋이었다. [[RWL|혁명적 노동자동맹(RWL)]]은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존속한 조직으로, 기업인과 판사를 표적으로 삼았다. [[PAU|프롤레타리아 행동대(PAU)]]는 1973년 콜마르에서 결성되어 경찰과 교도 행정을 공격했다. [[10월 전선]]은 1975년 청북전쟁 반대 운동에서 분화한 조직으로, 군과 방위산업을 표적으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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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 | 324 | 전술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다리 총격이다. 표적의 무릎이나 정강이를 쏘아 살해하지 않고 불구로 만드는 이 방식은 살인보다 처벌이 가볍고 선전 효과가 크다는 이유로 선호되었으며, 검은 10년 동안 약 400건이 발생했다. 둘째는 납치다. 기업 임원과 판사를 수 주에서 수 개월간 감금하고 조직 내부의 이른바 인민재판을 거쳐 처형하거나 석방했다. 셋째는 표적 암살로, 판사·검사·경찰 간부·기업인이 주된 대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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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8 | 326 |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1977년 4월 전 하원의장 앙리 뒤발의 납치·살해다. 뒤발은 좌파 정당과의 대화를 주장해 온 중도 정치인이었으며, 경호원 4명이 사살된 뒤 51일간 감금되었다가 살해된 채 벨포르 시내에 유기되었다. 대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 표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무장투쟁의 정치적 파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은 일제히 조직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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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 | 328 | ==== 극우 테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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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1 | 329 | 극우 진영은 1970년대에 두 계열로 나뉘었다. 하나는 [[공화국의 방패]]의 잔존 세력이다. 1970년 지도부 사살 이후 방패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했고, 온건파가 1971년 해산을 선언한 반면 강경파는 콜마르 지부장 뤼시앵 바르도를 중심으로 지하화해 특무처를 상대로 보복에 나섰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특무처 요원 6명이 살해되었고, 방패는 자신들을 검거하려는 경찰과도 교전했다. 1974년 5월 콜마르 시청 광장에서 행동대 약 40명이 경찰 저지선과 4시간 교전해 경찰 7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한 사건은 루이나에서 도심 총격전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계기가 되었다. 바르도는 이 교전에서 사망했고, 1976년 방패의 지부 조직은 소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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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 | 331 | 다른 하나는 방패와 무관하게 등장한 신극우다. 1972년 결성된 질서회복단은 방패의 반공주의를 이어받으면서도 국가 자체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달랐다. 이들은 극좌의 위협에 무력한 의회 정치를 무너뜨리고 권위주의 체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고, 그 수단으로 무차별 폭탄 테러를 선택했다. 표적은 인물이 아니라 장소였다. 역, 광장, 열차처럼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곳에 폭탄을 설치해 사회 전체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그 책임을 극좌에 돌려 강경 대응 여론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제방 계획의 논리를 국가의 지시 없이 국가를 상대로 실행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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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5 | 333 | 최악의 사건은 1976년 8월 14일 오보레 중앙역 폭발이다. 여름 휴가철 대합실에서 폭탄이 터져 6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사건 직후 극좌 조직의 소행이라는 성명이 유포되었으나 수사는 진전되지 않았고, 질서회복단 관련자가 기소된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인 1985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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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7 | 335 | ==== 조직범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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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8 | 336 | 정치 폭력과 나란히 조직범죄가 급성장했다. 중심은 남부의 항구도시 올덴버그를 근거지로 하는 [[올덴버그 마피아]]였다. 올덴버그는 고대에 기원을 둔 항구도시이자 19세기 말부터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대거 정착한 곳으로, 북부에 비해 행정·사법의 밀도가 낮은 남부의 조건 위에서 이민자 사회의 상호부조 조직이 1960년대를 거치며 범죄조직으로 전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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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0 | 338 | 성장의 결정적 계기는 공백이었다. 특무처는 자체 예산 항목이 없어 작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아편 거래로 조달했고, 그 국내 유통 부분은 1967년 이후 공화국의 방패가 장악하고 있었다. 1976년 방패가 소멸하면서 이 유통망이 통째로 비었고, 올덴버그가 이를 접수했다. 이후 조직은 마약 유통을 축으로 항만 하역과 건설 이권, 노동조합 침투로 사업을 확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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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2 | 340 | 납치가 독자적 사업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다. 정치 조직의 납치가 일상화되면서 몸값을 노린 납치가 그 안에 섞여 들었고, 수사기관은 정치적 납치와 영리 납치를 구분하지 못했다. 1977년 한 해에 접수된 납치 사건은 84건이며, 이 가운데 정치 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된 것은 19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조직범죄의 소행이었으나 상당수가 정치 조직의 명의로 성명이 발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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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4 | 342 | 조직 간 항쟁도 격화되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올덴버그와 톨루즈·롱비치의 경쟁 조직 사이에 벌어진 항쟁으로 2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 사망자들은 오랫동안 정치 폭력 통계에 뒤섞여 집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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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5 | 3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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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6 | 344 | ==== 폭력의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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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7 | 345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31230><bgcolor=#131230> {{{#ffc224 '''연도'''}}} ||<bgcolor=#131230> {{{#ffc224 '''사망'''}}} ||<bgcolor=#131230> {{{#ffc224 '''무장 공격'''}}} ||<bgcolor=#131230> {{{#ffc224 '''납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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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8 | 346 | || 1970 || 31 || 62 ||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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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9 | 347 | || 1971 || 48 || 118 ||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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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0 | 348 | || 1972 || 55 || 174 || 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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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1 | 349 | || 1973 || 62 || 241 || 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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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2 | 350 | || 1974 || 94 || 388 || 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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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3 | 351 | || 1975 || 88 || 512 || 51 || |
|---|
| 354 | 352 | || 1976 || 147 || 604 || 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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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5 | 353 | || 1977 || 121 || 741 || 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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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6 | 354 | || 1978 || 109 || 583 || 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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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7 | 355 | || 1979 || 54 || 297 || 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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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8 | 356 | || 1980 || 26 || 141 || 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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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9 | 357 | || '''계''' || '''835''' || '''3,861''' || '''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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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0 | 3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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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1 | 359 | 집계는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경찰 통계를 재분류한 것이다. 위원회는 조직범죄에 의한 사망과 정치 폭력에 의한 사망이 당시 통계에서 구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835명 가운데 약 4분의 1을 조직범죄 관련으로 재분류했다. 특무처와 공화국의 방패의 교전 사망자는 별도로 집계되지 않아 이 수치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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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2 | 3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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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3 | 361 | 무장 조직의 수도 급증했다. 1970년 확인된 무장 조직은 4개였으나 1977년에는 96개, 1979년에는 214개로 늘었다. 다만 이 가운데 다수는 성명만 발표하고 실제 활동이 없는 조직이었으며, 하나의 조직이 사건마다 다른 이름으로 성명을 내는 사례도 빈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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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 | 3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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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 | 363 | ==== 일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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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6 | 364 | 검은 10년의 특징은 대형 사건보다 소규모 폭력의 지속에 있었다. 은행 강도, 정당 사무소 방화, 신문사 습격, 하급 공무원과 경찰관에 대한 총격이 매일 발생했고, 기업 임원과 판사는 경호 없이 출퇴근하지 못했다. 벨포르와 콜마르의 주요 관공서에는 차량 진입 방지 구조물이 상설 설치되었으며, 이 구조물 가운데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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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7 | 3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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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8 | 366 | 여론은 양극단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양극단론으로 기울었다. 좌우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되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정서가 확산되었고, 이 정서는 정치 불신으로 이어졌다. 1977년 조사에서 의회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응답은 19%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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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9 | 3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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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0 | 368 | ==== 절정과 군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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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1 | 369 | 1976년부터 1978년까지가 정점이었다. 오보레 중앙역 폭발과 뒤발 납치·살해가 잇따르면서 정부의 통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경제 위기와 노사 갈등이 겹치면서 의회 정치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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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3 | 371 | 1978년 10월 10일 육군 참모차장 비달 파브르 중장이 주도한 [[10.10 군사반란]]이 발생했다. 반란군은 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중앙방송국과 전신전화 중계소를 장악했으며, 제9보병사단 병력이 수도에 무단 진입해 대통령 관저를 포위했다. 12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했고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실각했다. 반란의 명분은 문민 정치로는 검은 10년의 폭력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 명분은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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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4 | 3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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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 | 373 | 국가비상위원회가 설치되고 의회가 해산되었다. 군정은 계엄을 선포하고 무장 조직에 대한 대대적 소탕에 나섰으며, 실제로 1979년 이후 폭력 지표는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나 군정의 진압은 무장 조직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가정보국이 국내 사찰에 전용되었고 광역범죄조사과는 군사경찰사령부에 흡수되어 사실상 소멸했으며, 정치인·언론인·노동운동가가 무장 조직과의 연계 혐의로 대량 구금되었다. 특무처의 후신 조직은 이 기간 국내 작전 건수가 이전 3년 평균의 6배에 달했고, 정보 은폐 부문의 정원이 3배 이상 증가해 국내 여론 조작을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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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 | 375 | 비달 파브르는 1978년 암살되었으나 국가비상위원회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군정은 1980년 10월 24일 시작된 [[10.24 시민혁명]]으로 붕괴했다. 전국에서 6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사흘간의 항쟁 끝에 10월 26일 오전 국가비상위원회가 해체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시민이 무장하고 군 일부가 항명해 합류한 이 혁명은, 검은 10년이 사회에 남긴 무장의 경험이 마지막으로 발현된 사건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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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9 | 377 | ==== 종결과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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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0 | 378 | 검은 10년은 군정의 물리적 진압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의 제도적 조치였다. 1981년 제정된 협력자 감형 제도는 조직 정보를 제공한 구성원에게 대폭적인 감형을 부여했고, 이 제도로 조직 내부에서 협력자가 속출하면서 남은 무장 조직의 지휘 구조가 해체되었다. 뒤발 살해에 관여한 혁명적 노동자동맹 지도부가 1982년 검거된 것을 끝으로 대규모 무장조직은 소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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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2 | 380 | 같은 해 설치된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군정기 국가정보국과 광역수사국의 국내 사찰을 조사하고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과 정보감찰관 제도의 도입을 권고했다. 다만 조사 대상은 정보공동체 등재 기관으로 한정되었으므로, 제방 계획을 실행한 특무처와 그 후신 조직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제방 계획의 존재가 부분적으로나마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96년 민사소송과 1998년 재심을 통해서였으며, 지하철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되었던 11명은 199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실행 주체는 재심 판결문에서도 특정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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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4 | 382 | 검은 10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국가가 좌파를 억누르기 위해 만든 폭력이 국가로 되돌아온 과정이라는 해석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나, 제방 계획의 규모가 실제 무장투쟁을 설명할 만큼 컸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가 루이나 사회에 남긴 두 가지 유산이다. 하나는 정치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고, 다른 하나는 훈련된 인원이 합법 구매한 총기를 개조해 공권력과 도심에서 교전하는 시위 형태가 이후 루이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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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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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 | 상세 내용은 [[검은 10년]] 문서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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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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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5 | 3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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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6 | 314 | === 헌정 회복과 제4·5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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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7 | 315 | 1980년 헌정이 회복되고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가 제2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베인브리지는 1979년 민주연합을 창당해 헌정 회복 국면의 주도권을 잡은 인물로, 군정 잔재 청산과 치안 재건을 내걸었다. 1981년 5월 4일 광역수사국법이 제정되어 [[MIA|광역수사국]]이 현재 체제로 출범했고, 군정기에 파괴된 수사·정보 체계가 재정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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