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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5 vs r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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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209이렇듯 1949년부터 1960년까지의 군사독재는 철권과 동원의 시기였다. 철저한 검열과 감시, 정치범 수용, 군의 행정 장악이라는 그늘 위에, 제강·조선·석유화학·전력·교통으로 상징되는 산업 인프라가 솟아올랐다. 파브르는 레이먼드가 상징하던 ‘자유의 공화국’을 ‘질서의 공화국’으로 바꿔 놓았고, 그 과정에서 루이나는 외형적 국가역량을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사회의 심부에는 억눌린 불만과 피로가 층층이 쌓였다.
210210=== 민주화 운동 ===
211211[include(틀:루이나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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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루이나의 민주주의는 1948년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의 암살과 12.23 쿠데타로 무너진 뒤, 10여 년간 군사독재 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국민들의 불만은 점차 누적되었고, 특히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군사정부의 경제적 성과가 불평등한 분배로 귀결되고, 정치적 자유가 철저히 억압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민주화 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노동자 집단에서 발생했으나 점차 시민, 지식인, 종교계까지 확산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시민혁명으로 폭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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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1959년 1.11 학생민주의거 (벨포르) ====
2161959년 1월 11일, 벨포르 대학에서 일어난 시위는 루이나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군사정부가 대학 언론을 폐쇄하고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자, 수천 명의 학생이 캠퍼스를 넘어 시내 중심부로 행진했다. 이들은 “자유 없는 지식은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검열 철폐와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다. 군경은 최루탄과 곤봉으로 시위를 해산했지만, 시민 수백 명이 동참하면서 시위는 단순한 학생 운동을 넘어 사회 전반의 문제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벨포르 대학가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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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1959년 2.8 민주의거 (세인트 바룬) ====
2192월 8일, 세인트 바룬에서 항만 노동자와 상인들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항만 사용료와 임금 억제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학생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연대하면서 시위는 도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군사정부는 항만을 봉쇄하고 지도부를 체포했지만, 시위는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 지속되었다. 세인트 바룬 민주의거는 노동자와 학생, 종교계가 함께 군사정권에 맞선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 각 지역 민주화 운동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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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1959년 6.15 의거 (에포르) ====
2226월 15일, 에포르에서는 지식인과 전문직 단체가 주도한 대규모 의거가 일어났다. 변호사, 교수, 언론인들이 공개적으로 군사정권의 불법 구금과 고문 실태를 고발하며 독립 사법부와 의회 복원을 요구했다. 이들은 “법 없는 질서는 폭력일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수천 명의 시민이 동참하여 도심 광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이 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단순한 청년·노동 운동을 넘어 사회 엘리트 계층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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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959년 [[12.23 민주시위]] (롱비치) ====
225쿠데타 11주년을 맞은 12월 23일, 롱비치에서는 군사정권이 기념식을 열려 하자 수만 명의 시민이 이에 항의해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처음에는 학생과 노동자 중심이었지만, 곧 상인, 종교인, 가정주부, 심지어 일부 공무원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항쟁으로 번졌다. 시민들은 “12.23은 질서의 날이 아니라 억압의 날이다”라 외쳤고, 군사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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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시위는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으며, 롱비치 전역이 사실상 민중의 자치구처럼 운영되었다.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나누고, 병원과 교회가 부상자를 돌보았으며, 학생들은 비밀리에 전단을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결국 병력을 투입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은 실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나, 현장에서는 발포와 집단 구타가 있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롱비치는 오랫동안 철저히 통제되었고, 정부는 사건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했으나,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가장 치열한 저항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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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1960년 [[10.24 시민혁명]] (전국) ====
2301959년 연속된 민주의거와 롱비치의 참극은 결국 1960년 10월 24일 전국적 시민혁명으로 폭발하였다. 벨포르, 세인트 바룬, 롱비치, 에포르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총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 노동자, 종교계, 상인, 중산층 시민까지 합류하여 수십만 명의 인파가 거리를 메웠다. 계엄군은 여러 지역에서 발포까지 감행했으나, 시위대의 규모와 결속은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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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시민들의 분노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무장투쟁으로 번졌다. 각지의 시위대는 군사정권의 선전 방송을 차단하고 철도와 항만을 점거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위원회가 지방 행정을 대신 운영하였다. 그러나 1960년 가을, 분노가 임계점에 달하자 시민들은 더 이상 맨손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벨포르와 세인트 바룬, 롱비치 등지에서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갖춘 뒤, 자발적으로 조직된 ‘시민군’이 수도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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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12년간 공포와 검열로 군림해 온 비달 파브르의 정권은 이미 군 내부조차 균열로 가득했기에, 시민군의 무장 진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수도 벨포르는 수만의 인파와 무장 시민들로 뒤덮였고, 군사정부 청사는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결국 파브르는 은신처에서 시민군에 의해 끌려나왔으며,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즉결 재판에 회부되었다. 군중의 함성 속에서 그는 권총 사격으로 즉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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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이날은 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시민군이 스스로 독재자를 끌어내려 처단한 순간, 12년간 이어진 군사독재는 피와 분노의 결말로 종말을 맞이했다. 거리는 환호와 해방의 함성으로 가득 찼고, 루이나는 다시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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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10.24 시민혁명은 루이나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짧지만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의 불꽃은 시민혁명으로 이어졌고, 루이나는 다시 헌정질서를 복원하며 민주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후 이 시기의 사건들은 ‘루이나 민주화 운동사’의 근간으로 기록되며, 오늘날까지도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212239====군사정권 부역자 처벌====
213240루이나는 1949년 12월 13일 발생한 [[12.13쿠데타|군사 쿠데타로]] 인하여 수립된 군사정권에 부역했던 부역자들을 철저히 처벌하고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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