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18 | 18 | |
|---|
| 19 | 19 | 청평의 경제성장률 통계를 살펴보면, 지도부 시절 내내 성장이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두 자릿수에 가까운 고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1970년대 초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10%대 성장률을 달성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시기인 1980년과 1981년에는 -25%, -27%라는 충격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이전 성과를 모조리 상실했다. 이후 실권을 잡은 개혁파에 의해 다시 4년간 10%대 성장이 이어졌지만, 곧 문화혁명이 발발하며 사회혼란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혼란이 진정된 뒤 기저효과 덕에 일시적 고성장이 있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다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
|---|
| 20 | 20 | |
|---|
| 21 | | 이처럼 두 차례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탓에, 같은 시기 북산과 유고랜드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 배 늘려가는 동안 청평은 고작 몇 배의 성장을 이루는 데 그쳤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고랜드와 청평의 소득수준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청평 지도부가 사망한 1980년대 중반에는 청평의 1인당 소득이 20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유고랜드는 열 배를 웃도는 격차를 보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격차가 더 줄어들어, 유고랜드가 청평 경제력의 잘반 이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청평의 국제적 위상을 급속히 떨어뜨렸으며,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완전고용과 안정적 성장과 대비되어 더욱 뼈아픈 비교로 남았다. |
|---|
| 21 | 이처럼 두 차례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탓에, 같은 시기 유고랜드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 배 늘려가는 동안 청평은 고작 몇 배의 성장을 이루는 데 그쳤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고랜드와 청평의 소득수준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청평 지도부가 사망한 1980년대 중반에는 청평의 1인당 소득이 20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유고랜드는 열 배를 웃도는 격차를 보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격차가 더 줄어들어, 유고랜드가 청평 경제력의 잘반 이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청평의 국제적 위상을 급속히 떨어뜨렸으며,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완전고용과 안정적 성장과 대비되어 더욱 뼈아픈 비교로 남았다. |
|---|
| 22 | 22 | |
|---|
| 23 | 23 | 물론 청평 체제 하에서는 일정한 복지가 존재했다. 집은 국가에서 배분해주었고, 도시 노동자는 평생직장이 보장되며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때문에 실질 구매력은 단순한 달러 수치보다 다소 높았지만, 북산과 유고랜드에서 컬러 TV와 첨단 가전제품이 보급될 때, 청평의 대다수 시골 마을은 전기와 상수도조차 설치되지 않은 곳이 허다했다. 자가용이라 해도 자전거가 고작이었다. 이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대실패가 청평의 잠재력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를 보여준다. |
|---|
| 24 | 24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