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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 148 | 물론 1941년 1월의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은 아직 설계도에 가까웠다. 상설 호위전대는 편성표만 존재하는 부대가 태반이었고, 표준선 1번함은 아직 선대 위에 있었으며, 상황실의 위험도 지도는 데이터 부족으로 절반이 공백이었다. 개혁이 열매를 맺으려면 최소한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독일 해군은 그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상황실의 지도가 채 완성되기도 전인 1월 하순, 도상에 표시된 적 없는 두 개의 고속 항적이 북부 초계망의 공백을 뚫고 랜드 내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귄터 뤼첸스]]의 함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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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 | 149 | ===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 (1941년 1월~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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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 1941년 1월 22일 밤, [[귄터 뤼첸스]] 제독이 지휘하는 고속전함 2척이 폭풍설에 몸을 숨긴 채 북부 초계선을 통과했다. 첫 시도는 아니었다. 한 달 전 같은 해역에서 연합군 순양함에 조기 발견되어 회항한 전례가 있었고, 이번에는 그 실패에서 배운 대로 최악의 기상을 골라, 초계함들이 파도에 밀려 배치선을 이탈한 틈을 정확히 찔렀다. 연합군이 침입 사실을 인지한 것은 나흘 뒤, 첫 희생자의 조난 신호가 끊긴 채 수신되었을 때였다. 란츠의 상황실 지도 위에 처음으로 '위치 불명의 전함 2척'이라는 최악의 표지가 올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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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 뤼첸스의 작전 지침은 냉철함 그 자체였다. 목표는 적함의 격침이 아니라 통상의 파괴이며, 따라서 대등한 전력과의 교전은 그것이 승산이 있는 경우라도 회피한다. 함대의 존재 가치는 침몰시킨 톤수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마비에 있다. 실제로 2월 초 첫 대규모 조우에서 뤼첸스는 이 원칙을 증명해 보였다. 포착한 호송선단의 후미에 구식 전함 1척이 호위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였음에도 미련 없이 반전 이탈한 것이다. 참모들의 항의에 그가 남긴 답은 짧았다. "우리 배에 구멍이 하나 나면, 그 구멍을 메울 도크는 3,000km 밖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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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 | 대신 뤼첸스은 호위가 붙지 않은 곳을 때렸다. 함재 정찰기와 사전 배치된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방수반을 활용해 선단의 집결 해역과 해산 지점, 즉 호위 체계의 이음매를 노렸고,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호위 편성이 완료되기 전의 선단 3개를 연달아 격멸했다. 두 척의 전함이 선단을 양쪽에서 몰아넣고 주포와 부포로 상선들을 차례로 지워나가는 광경은 생존자들에 의해 "도살"로 증언되었다. 두 달의 작전 기간 동안 격침 상선 60여 척, 총 32만 톤. 단일 수상함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최대의 전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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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 | 그러나 톤수는 이 작전이 입힌 피해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위치 불명의 전함 2척'이 지도 위에 존재하는 동안, 란츠의 사령부는 확률의 지옥에 갇혔다. 어느 항로가 안전한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항로가 위험했고, 결국 2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대서양 방면 선단의 출항이 사실상 전면 중지되었다. 3월 한 달간 루이나 주요 항구의 물동량은 평시의 4할까지 떨어졌고, 일부 도시에서 유류와 설탕의 배급이 시작되었다. 정부 내에서는 강화 교섭론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거론되었으며, 훗날 공개된 각의 기록에는 "이런 겨울이 한 번 더 오면 전쟁의 지속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발언이 남아 있다. 전투 전 기간을 통틀어 루이나가 패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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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 | 연합군의 추격은 여섯 차례나 뤼첸스의 그림자를 밟았으나 여섯 차례 모두 놓쳤다. 순양함이 육안 접촉에 성공한 것만 두 번이었지만, 고속전함의 속력 앞에서 접촉 유지는 번번이 실패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주력 함대는 매번 예상 요격점으로 달려갔고, 뤼첸스는 매번 그 예상의 바깥에 있었다. 3월 중순, 연료와 주포 신관의 한계에 도달한 뤼첸스는 마지막 유인 기동으로 추격 함대를 남쪽으로 끌어내린 뒤, 정반대로 북상해 점령하 프랑스의 항구로 유유히 입항했다. 두 달간의 작전에서 독일 측 손실은 전사 2명, 함체 손상 전무. 완벽하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작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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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 | 다만 이 완벽함의 이면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연합군 측의 것으로, 란츠의 상황실은 이 두 달간의 참패를 데이터로 삼켰다. 뤼첸스의 항적과 습격 지점, 보급 추정 해역이 전부 지도 위에 복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이 도출되었다. 대양에 떠 있는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송신의 습관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 측의 것이었다. 작전의 완벽한 성공은 해군 수뇌부의 신중론을 침묵시켰고, "고속전함 전대는 랜드 내해에서 무적"이라는 확신이 [[에리히 레더]]로 하여금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의 조기 투입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함대사령관에는 당연하다는 듯 뤼첸스가 재지명되었다. 회고에 따르면 뤼첸스는 출격 전 지인에게 "같은 주사위를 두 번 던져 두 번 이기는 도박사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두 번째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 1941년 5월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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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 161 | ===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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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 | 162 | ===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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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 163 | === 뤼첸스의 최후 (1941년 5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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