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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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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7b2233,#7b2233><tablebgcolor=#fff,#1f2023><bgcolor=#7b2233,#7b2233><height=100> [[파일:루이나 공화연합 로고.png|width=330]] || | |
| 4 | ||<-2><bgcolor=#7b2233,#7b2233> {{{#fff '''Republican Union of Ruina'''[br]{{{-1 Республиканский союз Руины}}}}}} || | |
| 5 | ||<width=125><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7b2233,#d98a99> '''한국어 명칭''' ||공화연합 || | |
| 6 | || '''약칭''' ||공련 (RU) || | |
| 7 | || '''창당일''' ||1885년 6월 9일[* 헌법제정회의 폐회 이틀 뒤, 회의 다수파가 벨포르 상공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 | |
| 8 | || '''해산일''' ||1951년 10월 14일[* 10.10 군사반란 직후 발포된 정당해산포고 제1호에 따른 강제 해산이다.] || | |
| 9 | || '''전신''' ||의회파 {{{-2 (1884~1885)}}} || | |
| 10 | || '''후신'''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 {{{-2 (1957년 창당)}}} || | |
| 11 | || '''중앙당사''' ||[[루이나]] [[벨포르 특별시]][br]체스터필드 스퀘어 || | |
| 12 | || '''이념''' ||'''초기:'''[br]공화주의[br]고전적 자유주의[br]----[br]'''후기:'''[br]보수주의[br]제국주의[br]보호무역주의[br]건전재정론[br]이민제한주의 || | |
| 13 | ||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파 || | |
| 14 | || '''초대 대표''' ||[[에드먼드 A. 콜빈]] || | |
| 15 | || '''마지막 대표''' ||로런스 V. 크로스비 || | |
| 16 | || '''배출 대통령''' ||5명 || | |
| 17 | || '''역대 최다 의석''' ||하원 261석 {{{-2 (1888년)}}} || | |
| 18 | ||<|2> '''당색''' ||{{{#!wiki style="display: inline; border-radius: 2px; padding: 3px 4px; background: #7b2233; font-size: .9em" | |
| 19 | {{{#ffffff '''진홍색''' (#7b2233)}}}}}} || | |
| 20 | ||{{{#!wiki style="display: inline; border-radius: 2px; padding: 3px 4px; background: #c8a24a; font-size: .9em" | |
| 21 | {{{#ffffff '''금색''' (#c8a24a)}}}}}} || | |
| 22 | || '''당원 수''' ||741,300명 ^^(1948년)^^ || | |
| 23 | || '''상징''' ||참나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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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목차] | |
| 26 | [clearfix] | |
| 27 | == 개요 == | |
| 28 | 공화연합(Republican Union)은 1885년부터 1951년까지 존속한 [[루이나]]의 보수 정당이다. [[제1차 헌정위기]]로 왕정이 폐지된 뒤 헌법제정회의 다수파가 그대로 정당으로 전환한 조직으로, 루이나 공화정의 창당 여당이자 근대 정당정치의 출발점이다. | |
| 29 | ||
| 30 | 초대 대통령 [[에드먼드 A. 콜빈]]을 비롯해 다섯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1885년 헌법과 대통령 4년 중임제,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이 모두 이 당의 손에서 나왔다. 그러나 창당 20년 만에 제국 경영과 보호무역을 축으로 하는 보수정당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자유당(루이나)|자유당]]에 밀려 장기 야당으로 전락했다. | |
| 31 | ||
| 32 | 1951년 10.10 군사반란으로 강제 해산되었으며, 1957년 [[벨포르의 봄]] 이후 잔류 인사들이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계보가 이어졌다. 오늘날 민주공화당은 공화연합을 자당의 전신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제국기의 식민 통치와 군정 부역 문제 때문에 이 계승 관계 자체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다. | |
| 33 | ||
| 34 | == 상징 == | |
| 35 | === 참나무 === | |
| 36 | 공화연합의 상징은 참나무였다. 1885년 헌법 서명식이 열린 벨포르 헌법제정회의장 앞뜰의 참나무에서 따온 것으로, "왕관은 한 사람의 머리에 있지만 참나무는 모두의 머리 위에 있다"는 콜빈의 폐회 연설 구절이 도안의 근거로 인용되었다. | |
| 37 | ||
| 38 | 당기는 진홍색 바탕에 금색 참나무를 배치한 형태였다. 20세기 들어 당이 제국주의 노선으로 기울면서 참나무 도안에 닻과 지구의를 덧붙인 변형이 널리 쓰였고, 이 변형은 제국 청산 논쟁 이후 부정적 상징으로 취급되어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 창당 시 폐기되었다. | |
| 39 | ||
| 40 | === 당색 === | |
| 41 | 당색은 진홍색(#7b2233)이며 금색(#c8a24a)을 보조색으로 썼다. 왕정기 궁정 예복의 색 조합을 의도적으로 가져온 것으로, 왕정을 폐지한 세력이 왕실의 색을 계승한다는 발상이었다. 창당 당시부터 "공화국을 만들면서 왕관의 색을 챙겼다"는 야유가 따라다녔고, 1888년 [[자유당(루이나)|자유당]] 분당 세력이 굳이 청색을 택한 것도 이에 대한 반발이었다. | |
| 42 | ||
| 43 | == 성향 == | |
| 44 | 공화연합의 성격은 존속 기간 전반과 후반이 뚜렷하게 다르다. | |
| 45 | ||
| 46 | 창당기의 공화연합은 명백히 진보적인 정당이었다. 세습 군주정을 폐지하고 성문헌법을 제정했으며, 재산 자격 요건을 철폐해 남성 보통선거권을 도입했고, 추밀원을 없애 내각의 의회 책임 원칙을 확립했다. 이 시기 당의 이념은 공화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였고, 개혁의 속도를 "한 세대에 한 걸음"으로 조절하는 점진주의가 당론이었다. | |
| 47 | ||
| 48 | 문제는 바로 그 점진주의였다. 노동 입법과 사회보험을 요구하는 세력이 보기에 공화연합은 헌법을 만든 뒤 개혁을 멈춘 정당이었고, 1888년 이들이 이탈해 [[자유당(루이나)|자유당]]을 창당하면서 공화연합에는 상공업 자본과 제국 경영 세력만 남았다. | |
| 49 | ||
| 50 | 후기의 공화연합은 제국주의, 보호무역주의, 건전재정론, 이민제한주의를 축으로 하는 보수정당이었다. 해외 영토의 유지와 제국 특혜관세 체제를 국가 존립의 조건으로 보았고, 금본위제 복귀와 균형재정을 경제 정책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 사회정책에서는 국가의 개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되 그 재원을 부채로 조달하는 것에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이 입장은 대공황기에 당을 치명적으로 고립시켰다. | |
| 51 | ||
| 52 | 종교와 이민 문제에서는 성공회 중심의 국교 질서를 옹호했다. 1922년 망명자수용법에 반대하고 1926년 이민제한법으로 이를 사실상 뒤집은 것이 대표적이며, 이 노선 때문에 발칸계·백계 망명 정교회 공동체는 이후 반세기 동안 공화연합과 그 후신을 지지하지 않았다. | |
| 53 | ||
| 54 | == 역사 == | |
| 55 | === 창당과 헌법 체제의 수립 (1885~1893) === | |
| 56 | 공화연합은 1884년 [[제1차 헌정위기]] 국면에서 형성된 의회파를 모체로 한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무력 충돌로 번진 뒤, 의회파는 그 결과를 헌법 문서로 고정하는 데 성공했고 1885년 헌법제정회의 폐회와 동시에 정당으로 전환했다. 초대 대표이자 회의 의장이었던 [[에드먼드 A. 콜빈]]이 그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
| 57 | ||
| 58 | 콜빈 정부는 1885년 헌법 제정, 대통령 4년 중임제 확립,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 추밀원 폐지를 4년 안에 마무리했다. 콜빈이 재선에 출마하지 않고 물러나면서 초기 공화국의 단임 관행이 만들어졌고, 1888년 선거에서 [[찰스 P. 위트모어]]가 당선되어 재정 제도 정비를 이어받았다. | |
| 59 | ||
| 60 | 같은 1888년, 당내 개혁파가 사회 입법의 지연에 반발해 집단 탈당하고 [[자유당(루이나)|자유당]]을 창당했다. 이 분당으로 공화연합은 하원 261석이라는 역대 최다 의석을 기록한 직후부터 실질적인 다수 기반을 잃기 시작했고, 1892년 선거에서 위트모어가 낙선하면서 창당 후 첫 정권 교체를 겪었다. | |
| 61 | ||
| 62 | === 제국의 시대와 마르비크 전쟁 (1893~1901) === | |
| 63 | 1896년 선거에서 [[너새니얼 R. 브래드퍼드]]가 당선되며 공화연합이 정권을 되찾았다. 브래드퍼드 정부는 외무성과 식민성을 통합하고 총독부 체제를 확립했으며, 1898년 미합중제국과 상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아프리카 연안 보호령을 재편했다. 제국 해저전신망 부설과 식민지 우편 단일화도 이 시기의 성과다. | |
| 64 | ||
| 65 | 그러나 1899년 개전한 [[마르비크 전쟁]]이 모든 것을 뒤집었다. 단기전 예상과 달리 전황이 장기화되었고, 현지 주민 강제수용 정책이 국내외에서 격렬한 비난을 샀다. 1900년 선거에서 브래드퍼드는 낙선했고, 종전은 후임 대통령의 몫으로 넘어갔다. | |
| 66 | ||
| 67 | 마르비크 전쟁은 공화연합 역사에서 가장 무거운 부채로 남았다. 20세기 후반 제국 청산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당의 후신인 민주공화당이 사과 요구를 받는 근거가 이 전쟁이며, 강제수용 정책은 훗날 "국가 폭력의 계보"를 논할 때 첫머리에 놓인다. | |
| 68 | ||
| 69 | === 장기 야당기 (1901~1924) === | |
| 70 | 20세기의 첫 사반세기는 공화연합에 잔혹했다. 전쟁 책임론과 반전 여론을 업고 [[자유당(루이나)|자유당]]이 연속 집권하면서, 공화연합은 24년간 단 한 차례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 | |
| 71 | ||
| 72 | 이 기간 자유당 정부는 1903년 귀화법, 국민보험 도입, 1920년 보통선거를 차례로 관철했다. 공화연합은 세 법안 모두에 반대했으나 번번이 여론에 밀렸고, 특히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 도입에 끝까지 저항한 기록은 당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낡게 만들었다. | |
| 73 | ||
| 74 | 1차 대전기에는 루이나가 군수 후방기지 역할을 맡으면서 당이 부분적으로 회복했다. 전시 군수금융위원회를 통해 재계와의 연결이 강화되었고, 이 시기 위원장을 지낸 [[하워드 S. 프레스콧]]이 전후 당의 간판으로 부상했다. | |
| 75 | ||
| 76 | === 프레스콧 집권과 몰락 (1925~1929) === | |
| 77 | 1924년 선거에서 프레스콧이 당선되며 공화연합은 24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프레스콧 정부는 1925년 금본위제 복귀와 전전 평가 환율 회복,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 증권거래 감독의 자율규제 전환을 밀어붙였고, 재임기의 호황은 당대에 "황금의 사 년"으로 불렸다. | |
| 78 | ||
| 79 | 1926년 이민제한법은 이 정부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연간 입국 상한제를 도입해 망명자 유입을 사실상 차단했고, 정교회 사회의 조직적 반발을 불렀다. | |
| 80 | ||
| 81 |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8년 [[벨포르 증권 스캔들]]로 자율규제 노선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공화연합은 선거에서 참패했고, 프레스콧은 재선에 실패했다. 그가 퇴임한 지 두 달 뒤 대공황이 발발하면서, 당의 금융·재정 정책은 위기의 직접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 |
| 82 | ||
| 83 | === 대공황과 몰락의 심화 (1929~1944) === | |
| 84 | [[러더퍼트 J. 헤이슬러]]가 세 차례 연임하며 12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화연합은 야당에 머물렀다. 당은 헤이슬러의 국가 개입 정책을 재정 파탄과 헌정 유린으로 규정하고 전면 반대했으나, 이 시기 당의 반대는 대중에게 "굶는 사람 앞에서 장부를 읽는 정당"이라는 인상을 남겼을 뿐이었다. | |
| 85 | ||
| 86 | 1932년과 1936년 대선에서 당은 연이어 패배했다. 다만 헤이슬러의 3선을 계기로 공화연합이 제기한 대통령 연임 제한론은 훗날 제3공화국 헌법(1949)의 연임 1회 제한 조항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는 당이 야당기에 남긴 유일하게 지속적인 제도적 유산이다. | |
| 87 | ||
| 88 | 1940년부터 1941년까지의 고립 항전기에 공화연합은 전시 연립에 참여해 군수·재정 부문을 맡았다. 전쟁이 당의 재기 기반이 된 것은 분명하나, 1940년과 1944년 선거에서는 여전히 패배했다. | |
| 89 | ||
| 90 | === 마지막 집권과 강제 해산 (1945~1951) === | |
| 91 | 전후 재건 국면에서 공화연합은 통제경제의 해제와 배급 폐지를 앞세워 지지를 회복했다. 1948년 선거에서 당은 24년 만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으로 정권을 되찾았다.[* 이 선거로 당선된 제17대 대통령의 인적 사항은 [[틀:역대 루이나 대통령]]을 따른다.] 같은 해 2월 [[루이나 노동당|노동당]]과 공화진보회가 합당해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신당은 첫 대선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 |
| 92 | ||
| 93 | 1949년 제3공화국 헌법 제정으로 정착 국면에 들어서는 듯했던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1년 10월 10일 [[비달 파브르]]가 주도한 군사반란으로 대통령이 축출되었고, 나흘 뒤 정당해산포고 제1호에 따라 공화연합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강제 해산되었다. 창당 66년 만이었다. | |
| 94 | ||
| 95 | 해산 이후 당 인사들의 행로는 갈렸다. 상당수는 파브르가 세운 [[국가혁명당]]에 참여해 군정에 협력했고, 일부는 정계를 떠났으며, 소수는 지하 반대 세력에 합류했다. 1957년 파브르 암살과 [[벨포르의 봄]]으로 정당 활동이 회복되자 잔류 인사들이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을 창당했으나, 창당 과정 내내 "누구를 받을 것인가"를 둘러싼 부역 논란이 이어졌다. | |
| 96 | ||
| 97 | == 지지 기반 == | |
| 98 | 공화연합의 핵심 지지 기반은 벨포르 금융가와 제국 무역에 관여한 상공업 자본이었다. 해운·보험·은행업 종사자, 식민 관료와 해군 장교단, 성공회 교구 조직이 당의 3대 기둥이었고, 상공회의소는 사실상 당의 외곽 조직으로 기능했다. | |
| 99 | ||
| 100 | 지역적으로는 벨포르 서부와 남부 항만 배후지, 그리고 콜마르를 비롯한 내륙 농업지대에서 강했다. 특히 지주와 자영농은 자유당·노동당의 토지 및 국유화 강령에 대한 반발로 공화연합에 고정 지지를 보냈으며, 이 농촌 보수벨트는 오늘날까지 민주공화당의 아성으로 남아 있다. | |
| 101 | ||
| 102 | 반대로 산업 노동자, 정교회 이민 공동체, 식민지 출신 이주민에게 공화연합은 일관되게 배척의 대상이었다. 1926년 이민제한법 이후 이 구도는 사실상 고착되었고, 당의 후신이 오늘날까지 비백인 유권자층에서 확장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 |
| 103 | ||
| 104 | == 역대 대표 == | |
| 105 | ||<tablebordercolor=#7b2233><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7b2233><rowcolor=#fff> 대수 || 이름 || 재임 || | |
| 106 | || 초대 || [[에드먼드 A. 콜빈]] || 1885~1889 || | |
| 107 | || 제2대 || [[찰스 P. 위트모어]] || 1889~1895 || | |
| 108 | || 제3대 || [[너새니얼 R. 브래드퍼드]] || 1895~1901 || | |
| 109 | || 제4대 || 시릴 W. 애더턴 || 1901~1912 || | |
| 110 | || 제5대 || 조슈아 M. 렌들 || 1912~1923 || | |
| 111 | || 제6대 || [[하워드 S. 프레스콧]] || 1923~1929 || | |
| 112 | || 제7대 || 프랜시스 R. 헤이워드 || 1929~1938 || | |
| 113 | || 제8대 || 앨리스터 D. 펜로즈 || 1938~1946 || | |
| 114 | || 제9대 || 로런스 V. 크로스비 || 1946~1951 || | |
| 115 | ||
| 116 | == 배출 대통령 == | |
| 117 | ||<tablebordercolor=#7b2233><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7b2233><rowcolor=#fff> 대수 || 이름 || 임기 || | |
| 118 | || 초대 || [[에드먼드 A. 콜빈]] || 1885~1889 || | |
| 119 | || 제2대 || [[찰스 P. 위트모어]] || 1889~1893 || | |
| 120 | || 제4대 || [[너새니얼 R. 브래드퍼드]] || 1897~1901 || | |
| 121 | || 제11대 || [[하워드 S. 프레스콧]] || 1925~1929 || | |
| 122 | || 제17대 || (확인 필요) || 1949~1951 || | |
| 123 | ||
| 124 | == 역대 선거 결과 == | |
| 125 | === 대통령 선거 === | |
| 126 | ||<tablebordercolor=#7b2233><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7b2233><rowcolor=#fff> 연도 || 후보 || 결과 || | |
| 127 | || 1885 || [[에드먼드 A. 콜빈]] || 당선 || | |
| 128 | || 1888 || [[찰스 P. 위트모어]] || 당선 || | |
| 129 | || 1892 || [[찰스 P. 위트모어]] || 낙선 || | |
| 130 | || 1896 || [[너새니얼 R. 브래드퍼드]] || 당선 || | |
| 131 | || 1900 || [[너새니얼 R. 브래드퍼드]] || 낙선 || | |
| 132 | || 1904 || 시릴 W. 애더턴 || 낙선 || | |
| 133 | || 1908 || 시릴 W. 애더턴 || 낙선 || | |
| 134 | || 1912 || 조슈아 M. 렌들 || 낙선 || | |
| 135 | || 1916 || 조슈아 M. 렌들 || 낙선 || | |
| 136 | || 1920 || 조슈아 M. 렌들 || 낙선 || | |
| 137 | || 1924 || [[하워드 S. 프레스콧]] || 당선 || | |
| 138 | || 1928 || [[하워드 S. 프레스콧]] || 낙선 || | |
| 139 | || 1932 || 프랜시스 R. 헤이워드 || 낙선 || | |
| 140 | || 1936 || 프랜시스 R. 헤이워드 || 낙선 || | |
| 141 | || 1940 || 앨리스터 D. 펜로즈 || 낙선 || | |
| 142 | || 1944 || 앨리스터 D. 펜로즈 || 낙선 || | |
| 143 | || 1948 || (확인 필요) || 당선 || | |
| 144 | ||
| 145 | == 평가 == | |
| 146 | 공화연합에 대한 평가는 창당기와 그 이후를 어떻게 저울질하느냐에 따라 정반대로 갈린다. | |
| 147 | ||
| 148 | 옹호하는 쪽은 이 당이 없었다면 루이나 공화정 자체가 없었다고 본다. 세습 군주정을 폐지하고 성문헌법을 만들었으며, 남성 보통선거권을 도입하고 내각의 의회 책임 원칙을 세운 것은 전부 공화연합의 4년 남짓한 첫 집권기에 이루어졌다.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처음 제기한 것도 이 당이며, 그 조항은 오늘날 헌법의 영구조항으로 살아 있다. | |
| 149 | ||
| 150 | 비판하는 쪽은 공화연합이 헌법을 만든 직후 개혁을 멈추고 제국의 관리인으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마르비크 전쟁의 강제수용, 1926년 이민제한법, 대공황기의 균형재정 고수는 각각 식민 지배, 인종 배제, 경제 무능의 사례로 인용된다. 특히 1888년의 자유당 분당은 이 당이 스스로 만든 헌법 체제 안에서조차 더 나아갈 의지가 없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해석된다. | |
| 151 | ||
| 152 |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마지막이다. 공화연합은 군사반란의 피해자로서 강제 해산되었으나, 동시에 상당수 당직자가 군정의 [[국가혁명당]]에 참여했다. 피해자이자 협력자였다는 이중성은 후신 정당의 정통성 논쟁에서 지금도 반복해서 소환된다. | |
| 153 | ||
| 154 | == 여담 == | |
| 155 | * 당명의 "연합"은 이념 결사가 아니라 헌법제정회의 다수파의 회의체 성격을 그대로 남긴 것이다. 창당 당시에는 강령도 당헌도 없었고, 정식 당헌은 1893년에야 제정되었다. | |
| 156 | * 중앙당사가 있던 체스터필드 스퀘어의 건물은 현재 국립헌정박물관으로 쓰인다. 1885년 헌법 초안이 작성된 방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
| 157 | * 상징이었던 헌법제정회의장 앞 참나무는 1951년 군사반란 직후 베어졌다. 1962년 같은 자리에 다시 심은 나무가 현재의 참나무다. | |
| 158 | * 초대 대표 콜빈이 남긴 "왕관을 내리고 헌법을 올린 사람"이라는 평가는 정작 그의 당이 40년 뒤 왕정기의 색과 상징 체계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주 아이러니로 인용된다. | |
| 159 | * 마지막 대표 로런스 V. 크로스비는 해산 이후 군정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으며, 1957년 민주공화당 창당대회에는 초청을 받고도 참석하지 않았다. | |
| 160 | ||
| 161 | == 관련 문서 == | |
| 162 | * [[루이나]] | |
| 163 | * [[민주공화당(루이나)]] | |
| 164 | * [[자유당(루이나)]] | |
| 165 | * [[루이나 노동당]] | |
| 166 | * [[제1차 헌정위기]] | |
| 167 | * [[마르비크 전쟁]] | |
| 168 | ||
| 169 | == 둘러보기 == | |
| 170 | [include(틀:루이나의 정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