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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단체]][[분류:무장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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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2><height=80><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b01e28><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b01e28><colcolor=#fff> {{{+1 '''프롤레타리아 행동대'''}}}[br]Пролетарские боевые отряды[br]Proletarian Action Units (PAU)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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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width=30%><height=35> '''결성''' ||1973년 4월 22일 || | |
| 6 | ||<height=35> '''소멸''' ||1977년 {{{-2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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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height=35> '''창설자'''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 font-size: 0.75em" | |
| 10 | {{{#fff '''총책'''}}}}}} 에티엔 R. 보두앵 {{{-2 (1973~1977)}}} || | |
| 11 | ||<height=35> '''이념''' ||마르크스·레닌주의, 수형자 계급론 || | |
| 12 | ||<height=35> '''표적''' ||교도 행정, 행형 담당 법관, 경찰 || | |
| 13 | ||<height=35> '''규모''' ||대원 88명 {{{-2 (1975년 최성기)}}} || | |
| 14 | ||<height=35> '''강령''' ||{{{-1 "감옥에 있는 자는 모두 정치범이다."}}} || | |
| 15 | ||<height=35> '''관련 조직''' ||혁명적 노동자동맹 {{{-2 (적대적 병존)}}} || | |
| 16 | ||<-2><^|1><height=32> {{{#!wiki style="margin:0 -10px -5p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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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tablecolor=#000,#e0e0e0><tablebordercolor=#b01e28><bgcolor=#b01e28><width=25%> {{{#fff '''연도'''}}} ||<bgcolor=#b01e28> {{{#fff '''대원'''}}} ||<bgcolor=#b01e28> {{{#fff '''공격'''}}} ||<bgcolor=#b01e28> {{{#fff '''조직 손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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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1974 || 61 || 34 || 7 || | |
| 22 | || 1975 || 88 || 52 || 9 || | |
| 23 | || 1976 || 47 || 31 || 8 || | |
| 24 | || 1977 || 12 || 6 || 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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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목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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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개요 == | |
| 31 | {{{#!wiki style="border-left: 5px solid #b01e28; background-color: #fdf6f7,#191919; padding: 10px 14px; margin-bottom: 12px" | |
| 32 | "우리를 가둔 논리를 그대로 쓰는 자들이다. 저들은 우리가 무죄임을 근거로 모두가 유죄여도 좋다고 말한다." | |
| 33 | {{{-2 —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 쥘리앵 M. 파스칼, 1974년 옥중 서한}}} | |
| 3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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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프롤레타리아 행동대'''(Пролетарские боевые отряды / Proletarian Action Units), 약칭 '''PAU'''는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활동한 루이나의 극좌 무장조직이다. [[루이나/역사|검은 10년]]의 3대 무장조직 가운데 가장 늦게 결성되어 가장 먼저 소멸했으며, 규모는 가장 작았으나 대원 대비 사망률은 가장 높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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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조직의 특징은 결성 경로와 구성에 있다. 대학과 공장에서 인원을 충원한 혁명적 노동자동맹과 달리 PAU는 교도소에서 발생했고, 대원의 다수가 정치범이 아니라 절도·강도 등으로 복역한 일반 수형자였다. 조직은 이를 결함이 아니라 이론적 귀결로 제시했다. 국가가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특무처]]의 제방 계획에 따라 아르덴역 사건의 무고한 피고인 11명을 가둔 이상 유죄판결은 진실의 확인이 아니라 국가의 선택이며, 따라서 모든 수형자는 정치범이라는 것이 조직의 강령이었다. | |
| 39 | ||
| 40 | 표적은 교도 행정에 집중되었다. 교도관과 교도소장, 행형을 담당하는 판사와 검사,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경찰이 주된 대상이었으며, 탈옥 지원과 교도소 폭동 조직도 조직의 주요 활동이었다. 1975년 법무부 행형국장 폴 M. 도네를 납치했다가 33일 만에 살아서 석방한 사건은 검은 10년의 주요 납치 가운데 인질이 생환한 유일한 사례다. | |
| 41 | ||
| 42 | PAU는 1976년 11월 콜마르 은신처 급습으로 지도부를 잃고 이듬해 소멸했다. 1981년 협력자 감형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물리적으로 제거된 유일한 주요 무장조직이며, 이 때문에 조직 내부에 관한 자료는 다른 조직에 비해 현저히 적다. | |
| 43 | ||
| 44 | == 명칭 == | |
| 45 | 행동대(行動隊)는 조직의 기본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 그대로 조직명이 된 것이다. PAU는 중앙 조직이 존재하지 않고 3~5명 단위의 행동대가 병렬로 존재하는 형태를 지향했으며, 명칭은 이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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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수사기관은 초기에 이 조직을 독립된 단체로 인식하지 않았다. 각 행동대가 개별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PAU라는 약칭이 수사 기록에 통일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하반기부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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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 배경 == | |
| 50 | === 교도 행정 === | |
| 51 | 1960년대 루이나의 교도 행정은 만성적인 과밀과 인력 부족 상태에 있었다. 1960년 반체제활동규제법 개정 이후 수형 인원이 급증했으나 시설 확충은 따르지 않았고, 1970년 기준 수용률은 정원의 170%였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수형자 소요가 1969년부터 각지에서 발생했으며, 진압 과정의 폭력이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 |
| 52 | ||
| 53 | 콜마르 중앙교도소는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시설이었다.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1972년 폭동은 진압 과정에서 수형자 7명이 사망하면서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 |
| 54 | ||
| 55 | === 아르덴역 오심 === | |
| 56 | PAU의 이념적 출발점은 1966년 벨포르 지하철 아르덴역 폭발 사건이었다. 특무처가 양성한 [[공화국의 방패]]가 집행한 이 사건은 극좌 조직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소행으로 위장되었고, 1967년 동맹 조직원 23명이 검거되어 11명이 실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이 콜마르 중앙교도소에서 장기형을 복역하고 있었다. | |
| 57 | ||
| 58 | 수형자들 사이에서 이 사건은 무죄 여부를 넘어선 의미를 가졌다. 국가가 사건을 만들어 사람을 가둘 수 있다면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국가의 결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PAU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다만 아르덴역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은 당시 아무도 입증하지 못했으며, 무죄가 확정된 것은 1998년 재심에서다. | |
| 59 | ||
| 60 | == 결성 == | |
| 61 | 창설자 에티엔 R. 보두앵은 정치 조직 경력이 없는 인물이다. 1968년 무장강도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콜마르 중앙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과 같은 사동에 배치되었고,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정치화되었다. | |
| 62 | ||
| 63 | 보두앵은 1972년 폭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다른 시설로 이송되던 1973년 2월 호송 중 탈주했다. 같은 해 4월 22일 콜마르에서 탈주자와 출소자 등 11명이 모여 조직의 창설을 선언했으며, 창설 인원 가운데 정치범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 |
| 64 | ||
| 65 | 창설 선언문은 두 장 분량으로, 조직의 목표를 "감옥의 철폐가 아니라 감옥을 유지하는 자들의 제거"로 규정했다. 시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을 표적으로 한다는 이 규정이 이후 PAU 활동의 성격을 결정했다. | |
| 66 | ||
| 67 | == 이념 == | |
| 68 | === 수형자 계급론 === | |
| 69 | PAU의 이론은 네 단계로 구성된다. 국가는 아르덴역 사건에서 하지 않은 일로 11명을 가두었으므로 유죄판결은 진실의 확인이 아니라 국가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감옥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를 가르는 것은 범죄 사실이 아니라 국가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형자는 정치범이며 국가의 자의(恣意)를 신체로 겪은 유일한 계급이다. 나아가 공장 노동자는 임금으로 매수될 수 있으나 수형자에게는 매수될 것이 없으므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수형자다. | |
| 70 | ||
| 71 | 이 논리는 당시 극좌 진영 안에서도 소수설이었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PAU의 노선을 룸펜 모험주의로 규정하고 공동 행동을 거부했으며,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은 조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 |
| 72 | ||
| 73 | === 아르덴역 수형자들의 거부 === | |
| 74 | PAU 이론의 근거가 된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은 대부분 조직에 합류하지 않았다. 11명 가운데 9명이 가입 권유를 거부했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인 쥘리앵 M. 파스칼은 1974년 옥중 서한에서 PAU를 "우리를 가둔 논리를 그대로 쓰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자신들의 무죄를 근거로 모든 유죄판결을 무효화하는 것은 국가가 사실을 무시한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취지였다. | |
| 75 | ||
| 76 | 조직의 정당성 근거가 된 당사자들이 조직을 거부했다는 점은 PAU에 관한 서술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합류한 2명 가운데 1명은 1976년 교전 중 사망했다. | |
| 77 | ||
| 78 | == 조직 == | |
| 79 | PAU는 중앙 지도부를 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표방했다. 3~5명으로 구성된 행동대가 독립적으로 표적을 정하고 집행하며, 조직 전체의 결정은 행동대 대표가 참여하는 부정기 회합에서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보두앵은 총책으로 불렸으나 명령권보다 조정 역할에 가까웠다. | |
| 80 | ||
| 81 | 이 구조는 검거에 대한 저항력을 높였으나 통제력을 희생했다. 개별 행동대가 조직의 승인 없이 작전을 집행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1975년 이후에는 강도와 차량 탈취가 조직 활동인지 개별 범죄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조직 자금의 대부분이 은행과 우체국 강도로 조달되었다는 점도 이 혼선을 키웠다. | |
| 82 | ||
| 83 | 대원 충원은 교도소와 출소자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정치 교육은 형식적이었고, 가입 요건은 이념적 동의보다 실행 능력이었다. 1976년 검거된 대원 가운데 조직의 강령을 설명할 수 있었던 인원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 |
| 84 | ||
| 85 | == 활동 == | |
| 86 | === 탈옥과 폭동 === | |
| 87 | PAU의 활동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수형자 탈출 지원이다. 조직은 호송 차량 습격, 외부 조력, 내부 교도관 매수를 통해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열일곱 차례에 걸쳐 탈옥을 지원했으며, 이 가운데 성공한 것은 아홉 건이다. 탈출한 수형자 상당수가 그대로 조직에 편입되었으므로 탈옥 지원은 충원 수단이기도 했다. | |
| 88 | ||
| 89 | 교도소 폭동의 조직화도 병행되었다. 조직은 수감된 대원을 통해 시설 내부에서 요구 사항을 조율하고 외부에서 성명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폭동을 정치 사건화했다. 1975년 3월 콜마르 중앙교도소 폭동은 이 방식이 가장 체계적으로 적용된 사례로, 수형자 400여 명이 나흘간 시설 일부를 점거했다. | |
| 90 | ||
| 91 | === 표적 공격 === | |
| 92 | 표적은 교도 행정 종사자에 집중되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PAU의 공격으로 사망한 인원은 교도관 11명, 교도소 간부 4명, 행형 담당 법관·검사 5명, 경찰 4명이다. 다리 총격은 조직 활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살해보다 처벌이 가볍고 조직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이유로 선호되었다. | |
| 93 | ||
| 94 | 공격은 대체로 예고 없이 이루어졌고 성명은 사후에 발표되었다. 성명에는 표적의 이름과 함께 그가 담당한 시설이나 사건이 명시되어, 개인이 아니라 직무에 대한 공격임을 강조했다. | |
| 95 | ||
| 96 | === 도네 납치 사건 === | |
| 97 | 1975년 6월 11일 PAU는 법무부 행형국장 폴 M. 도네를 벨포르 자택 앞에서 납치했다. 경호원 1명이 사망했다. 조직의 요구는 금품이나 수감자 석방이 아니라 조직의 성명을 주요 일간지 1면과 국영방송에 전문 게재·낭독하라는 것이었다. | |
| 98 | ||
| 99 |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으나 33일이 지난 7월 14일 조직은 도네를 살려서 석방했다. 성명 일부가 지방 신문에 보도된 것을 요구가 충족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검은 10년의 주요 납치 가운데 인질이 생환한 유일한 사례이며, 1977년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전 하원의장 앙리 뒤발을 51일간 감금한 뒤 살해한 것과 대비된다. | |
| 100 | ||
| 101 | 석방 결정은 조직 내부의 분열을 낳았다. 처형을 주장한 행동대 두 개가 이후 독자 행동에 나섰고, 조직의 통제력은 이 시점부터 급격히 약화되었다. | |
| 102 | ||
| 103 | == 다른 조직과의 관계 == | |
| 104 |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PAU와의 공동 행동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수형자를 혁명 주체로 보는 노선이 이론적으로 근거가 없고, 조직 규율이 없으며, 자금 조달 방식이 일반 범죄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두 조직 사이에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협력도 없었다. | |
| 105 | ||
| 106 | 10월 전선과는 1975년과 1976년 두 차례 합동 작전을 수행했다. 다만 이는 무기 조달과 은신처 공유 수준이었고 조직적 통합 논의는 없었다. | |
| 107 | ||
| 108 | 조직범죄 집단과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PAU가 무기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올덴버그 계열 조직과 접촉했다는 진술이 1980년대 협력자 진술에서 나왔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 |
| 109 | ||
| 110 | == 소멸 == | |
| 111 | 1976년 들어 조직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도네 사건 이후의 분열, 자금 조달 과정에서 발생한 검거, 그리고 광역범죄조사과가 출소자 사회를 대상으로 실시한 집중 감시가 겹쳤다. 1976년 한 해 조직 손실은 8명으로 대원의 6분의 1에 해당했다. | |
| 112 | ||
| 113 | 결정적 타격은 1976년 11월 19일 콜마르 은신처 급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지도부 6명이 사살되고 4명이 검거되면서 조직의 조정 기능이 소멸했다. 잔존 대원 일부는 혁명적 노동자동맹에 개별적으로 흡수되었고, 나머지는 1977년 중 대부분 검거되었다. 보두앵은 1977년 3월 톨루즈에서 교전 중 사망했다. | |
| 114 | ||
| 115 | PAU는 1981년 협력자 감형 제도가 도입되기 4년 전에 소멸했다. 다른 무장조직이 협력자 진술을 통해 내부 구조가 드러난 것과 달리 PAU에 관한 자료는 압수 문서와 검거자 진술에 한정되며, 조직의 실제 대원 수와 활동 건수에 관한 통계도 추정치에 머문다. | |
| 116 | ||
| 117 | == 평가 == | |
| 118 | === 제방 계획의 후과 === | |
| 119 | PAU는 제방 계획이 낳은 결과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국가가 만들어 낸 오심이 그 오심을 논거로 삼는 조직을 낳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인과에는 단서가 붙는다.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 본인들이 조직을 거부했고, 실제 대원의 다수가 정치적 동기 없이 참여한 일반 수형자였다는 점에서, PAU가 오심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었는지 아니면 오심을 명분으로 삼은 별개의 현상이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 |
| 120 | ||
| 121 | === 이념과 구성의 괴리 === | |
| 122 | 조직이 표방한 이념과 실제 구성의 거리는 PAU에 대한 주된 비판이다. 수형자를 혁명 주체로 규정한 이론은 정교했으나 대원 대부분은 이 이론을 알지 못했고, 조직 자금은 강도로 조달되었으며, 통제 없는 행동대 구조는 조직 활동과 개별 범죄의 경계를 지웠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 부속서는 PAU를 "이론이 조직보다 정교했던 유일한 사례"로 기록했다. | |
| 123 | ||
| 124 | === 교도 행정에 미친 영향 === | |
| 125 | 역설적으로 PAU의 활동은 교도 행정의 개선을 지연시켰다. 1970년대 초 진행되던 처우 개선 논의는 교도관 살해가 이어지면서 중단되었고, 교정 시설의 보안 등급이 전반적으로 상향되었다. 과밀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소되기 시작한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인 1980년대 중반이다. | |
| 126 | ||
| 127 | == 관련 문서 == | |
| 128 | * [[루이나/역사]] | |
| 129 | * [[공화국의 방패]] | |
| 130 |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 | |
| 131 |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역사]] | |
| 132 | * [[MIA|광역수사국]] | |
| 133 | * [[올덴버그 마피아]] |